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8화 (8/94)

<8>

에드윈은 꿈을 꿨다. 전장에 서 있는 꿈을. 전장에서 에드윈은 성검으로 적군을 베었다. 오래간만에 사용한 성검, 파시오는 멋대로 날뛰며 적군의 목을 베고 배를 갈랐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승리를 거머쥔 에드윈과 제국군이 검을 높이 치켜들어 함성을 내질렀다. 아, 서부 변경의 전장이구나. 에드윈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성검을 집어넣은 에드윈이 말을 탄 채 누군가가 기다릴 수도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을 막 넘어가던 에드윈과 제국군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죽인 줄로만 알았던 흑마법사 하나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마법사는 음침한 미소를 입에 걸고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해낸 에드윈이 검을 빼 들고 흑마법사에게 달려가 그대로 찔러넣었다. 흑마법사가 외던 주문도 포기하고 에드윈의 검을 막아낼 방어막을 급히 만들었다.

방어막에 튕겨 제자리로 돌아온 에드윈이 검을 틀어쥐고 다시 한번 찔러 넣으려 할 때였다. 빠르게 주문을 영창한 흑마법사가 비열하게 웃어댔다. 이윽고 흑마법사의 손끝이 제국군을 향해 뻗어졌다. 놀란 에드윈이 고개를 돌려 흑마법사의 손끝에 서 있는 인물을 쳐다봤다.

아놀드 페르도였다.

원래의 에드윈이었다면 소수를 희생하더라도 악을 처단했겠지만, 꿈속의 에드윈은 달랐다.

그리 친하지도,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실력의 기사 하나를 지키려 몸을 날릴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몸을 던질 이유가 있던가?

그런 의문도 잠시, 흑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에드윈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옆에는 아놀드가 서 있었다. 목전이 컴컴했다. 꿈임에도 실제인 것처럼 생경한 느낌이었다.

에드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아놀드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렸다.

“-을, 부탁…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마법사는 뜻밖의 수확에 으스대고는 재빨리 텔레포트 했다. 더 머물렀다가는 제국군의 마법사에 의해 죽을 수도 있었으니.

또다시 꿈이 조각났다. 에드윈의 머릿속에 머물던 꿈이 전부 사라지면서 강렬한 두통이 일었다. 에드윈은 얼굴을 찡그리며 바르작거리다가 눈을 떴다.

“……아”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드윈은 몸을 일으켜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침실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침실에 있는 것인가, 싶어서 잠시 어리둥절한 채 있던 에드윈이 곧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냈다.

발을 들인 기억이 없는 페르도 백작저에서 공작저로 서둘러 돌아왔던 기억을 말이다. 그렇게 돌아온 침실은 이상하게도 어딘가 낯선 느낌이었다. 꼭 무언가가 없어진 듯한 기묘한 느낌.

에드윈은 앉은 채로 제 침실을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낯선 느낌이 있기는 해도 무엇이 낯선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기분이 영 별로였고.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윈이 침실을 가로질러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아아, 주인님!”

“아, 테오.”

“이럴 수가! 정말, 정말 주인님께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집사, 테오였다. 테오는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로 에드윈을 꼼꼼히 살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상할 정도로 저를 반기는 테오의 모습에 에드윈이 의아한 낯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테오가 코앞에 들이미는 일정표를 보며 헛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모레 점심에 황제 폐하께-”

이어지는 일정들에 얼굴을 찌푸린 에드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테오는 이전과 다름없는 에드윈의 모습에 다시금 안심하며 덧붙였다.

“참, 주인님. 결혼식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영애께서도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하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네?”

“내가 대체 누구랑 결혼 약속을 했는지 묻는 거야.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일인데.”

“……네?”

에드윈의 말에 테오가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기에 당연히 델시아도 기억하는 줄로만 알았다. 델시아는 에드윈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하여 페르도 백작이 보낸 서신에 적혀 있던 ‘기억 상실’이라는 문구를 거의 잊을 뻔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하잘것없는 자신까지 기억하는 에드윈이 델시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에 너무나 당황하여 무어라 반응할 수 없었다. 기억에서 지워진 것이 다름 아닌 델시아였다니. 혹여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는 것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봤지만, 에드윈은 정말 델시아를 모른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에드윈의 눈동자에 피어있던 말간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델시아를 만나며 피었던 생기가, 봄의 햇살과도 같았던 따스함이 눈동자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데, 델시아 아가씨를 기억하지 못하신다고요?”

“……뭐?”

테오의 음성이 높아졌다. 에드윈은 그 이름에 애틋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불쾌함도 느꼈다. 그 이름을 곱씹을수록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격통이 일었다. 에드윈은 고개를 내저으며 통증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것보다 내가 왜 페르도 백작의 저택에 있었던 건지 자세하게 설명해보도록.”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물음에 테오는 번뇌해야만 했다. 어느 부분부터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

투명한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침대에 누워있는 델시아를 비췄다. 눈 부신 햇살이 델시아의 얼굴에 닿자 누군가 커다란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페르도 백작이었다.

페르도 백작은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델시아의 방으로 달려왔다. 금방 깨어날 것이라던 비안나의 말과는 달리 델시아는 점심때가 지나도록 미동 하나 없이 누워있었다. 그 사실이 페르도 백작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먹은 것도 많이 없어 배가 고플 텐데, 꿈속에서 맛있는 것이라도 먹느라 늦는 건지. 페르도 백작의 입매가 바르르 떨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간헐적으로 나타나 전신을 지배했다.

페르도 백작의 온몸을 주무르듯 나타난 불안감은 델시아의 멀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말렸을 것이다. 말리지 못한다면 제 심장이라도 대신 주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아이가 죽은 듯이 누워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페르도 백작은 일 년을 사는 것도 기적이라는 마녀의 말은 차마 떠올리기도 싫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이 또다시 시한부가 되었다는 게, 일 년도 채 못 살고 스러질 수 있다는 게 과연 믿을 수 있는 말인가.

페르도 백작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델시아의 얼굴에 내렸던 그늘이 조금씩 흔들렸다. 페르도 백작은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숨을 삼켰으나, 삼켜낸 숨은 끅끅거리는 기이한 소리가 되어 방을 채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언제나 나를 기쁨에 젖도록 해주던, 나의 행복이었던 아이가.

“왜, 왜 이러고 있는 게냐? 응? 델시……,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손톱과 머리카락이 필요하다던 말에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다던 아놀드의 말에 델시아를 의심했다면. 이런 처참한 결과는 보지 않았을 텐데.

채 잇지 못한 말이 목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쇳소리에 가까운 음성이 들려도 델시아의 눈이 뜨이는 일은 없었다. 페르도 백작의 심장이 자꾸만 철렁했다. 한 점의 변화도 없는 말간 얼굴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델시아의 잠든 얼굴이 이토록 미웠던 적이 있던가.

페르도 백작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델시아를 담는 눈의 시야가 흐릿했다. 희뿌연 시야 틈으로 델시아의 창백한 안색이 보였다. 페르도 백작은 달달 떨리는 손을 델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 좋은 상아색 머리카락은 백작의 손길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렸을 적에는 아니 최근까지도 이 손길에 미소를 지어주던 아이가 이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델시, 어서 눈을 뜨렴. 이 아비의 속을 얼마나 더 태울 생각이냐. 응?”

그때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여기 계세요?”

아놀드의 목소리에 페르도 백작이 볼에 달라붙은 눈물을 서둘러 훔쳐냈다. 아무리 비통함에 허우적거리더라도 아들자식에게만큼은 무너진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문을 열고 들어온 아놀드의 눈 밑이 거무튀튀했다. 델시아에 대한 걱정과 자신을 향한 자책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다. 점심이 지난 시각이었으니 이제는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여 달려온 아놀드가 작은 한숨을 뱉어냈다.

여전히 델시아는 누워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페르도 백작의 맞은편에 창을 등지고 선 아놀드가 델시아의 희멀건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꼭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 나오는 잠자는 공주 같네요.”

“그렇구나…….”

“아무리 단잠이라도 그렇지, 아무리 아델리오 공작이 좋아도 그렇지…….”

넋두리하듯 떠들던 말은 어느새 작은 원망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나를 원망하지, 차라리 내 심장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아놀드.”

“그럼……, 그럼 내가 줬잖아. 군말 없이 줬잖아.”

작은 원망의 화살조차 아놀드 저 자신을 향했다. 아놀드는 이불 위에 깍지낀 채로 놓인 델시아의 손등을 매만지며 절망했다. 멍한 동공에 괴로움과 죄책감이 여러 차례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아놀드의 눈에 델시아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델시아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뒤척이던 델시아의 눈이 뜨였다.

“데, 델시! 어디, 어디 불편한 곳은 없니? 응?”

“델시아, 괜찮아?”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다투어 물었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델시아가 앓는 소리를 흘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갓 눈을 뜬 델시아의 눈에는 절망과 안도가 공존하고 있는 제 가족의 얼굴이 보였다.

델시아는 상황을 파악하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이내 찡그렸다. 침실 안이 너무나 환하게 느껴졌다. 꼭 긴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처럼 아릿했다. 에드윈을 그렇게 보내고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것인가.

바르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델시아가 돌연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허덕거렸다.

“하, 하아…….”

호흡을 빠르게 하며 가슴께를 움켜쥔 델시아가 창백한 얼굴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델시아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눈동자는 겁에 질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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