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만할래요, 공작님 >
<1>
ep 1. 당신을 위해
오늘은 기나긴 기다림만이 반복되던 여느 날들과는 달랐다.
델시아는 설렘이 가득 담긴 쪽빛 눈동자를 하고서 자신의 연인 에드윈을 기다리고 있었고, 사용인들 또한 에드윈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오늘은 폴타 왕국과의 전쟁을 위해 서부 변경에 갔던 에드윈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델시아는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온 에드윈과 일주일 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자신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델시아는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많은 준비를 해야만 했다.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떨어져 있던 에드윈과 재회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기에 하녀들은 더욱 치장에 힘을 썼다.
델시아는 에드윈이 없는 동안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다고, 당신 걱정을 하며 밤을 지새운 적이 있기는 해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노라고. 항상 에드윈이 당부하던 일들을 잘 지키면서 지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델시아가 상아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아래로 땋은 채 침실을 돌아다니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 정말 괜찮아?”
“네, 그럼요. 무척이나 아름다우세요.”
“빈말이라도 고마워, 엘라.”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꾸하는 시녀, 엘라의 모습이 귀여워 델시아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치장하고 좋은 말을 들어도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괘념을 전부 지워내지는 못했다.
부친 서신에 따르면 전장에서 출발한 에드윈은 오늘 저녁이나 되어서야 수도에 도착한다고 했다. 저녁까지는 아직 한참 이른 점심때이기는 했으나 델시아는 떨림과 설렘을 주체할 수 없어 잔뜩 들뜬 상태였다.
“에드윈이 돌아오면 고생 많았다고 꼭 안아 줘야겠어. 오빠를 빼놓으면 서운해할 테니까, 오빠도 안아 줘야지.”
“좋은 생각이에요, 아가씨. 아델리오 공작님과 도련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 갑자기 걱정되네. 오랜만에 봐서 에드윈이 어색해할지도 몰라. 어렸을 적부터 에드윈은 워낙 숫기가 없었으니까…….”
“어……, 아델리오 공작님을 그렇게 보는 사람은 아가씨밖에 없을걸요?”
엘라가 깔깔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드윈이 변경으로 떠난 지 약 석 달이 흐른 시점이었기에 델시아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부끄럼 많은 에드윈을 석 달 동안이나 보지 못했으니, 그가 오랜만에 본 자신을 어색해할 수도 있다는 게 그 걱정이었다.
물론 엘라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드윈은 숫기가 없는 게 아니라 델시아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선을 긋고 무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대강 대하는 것이었으니까.
“아, 아가씨!”
그때 저택의 문이 활짝 젖히며 다급하고도 절박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저택 곳곳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 기웃거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그 소리에, 마침 침실을 나와 아래층으로 향하던 델시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조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저택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렌토였다.
“아, 아가씨……. 아아.”
계단 손잡이를 쥔 델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렌토를 쳐다봤다. 델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위태롭게 서 있던 렌토의 무릎이 그대로 꺾였다.
델시아가 놀란 얼굴을 하며, 풀썩 주저앉은 렌토의 앞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올린 렌토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델시아에게 종이를 건넸다.
핏물이 든 종이를 건네받은 델시아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렌토, 괜찮니?”
“아, 아가씨 앞으로 온 그, 급보가…….”
“얘, 렌토. 더듬거리지 말고 제대로 말할 수는 없겠니?”
“괜찮아, 엘라. 렌토가 급하게 와서 조금 지쳐있나 봐. 그렇지, 렌토?”
델시아가 따뜻한 목소리로 렌토를 다독이며 손에 들린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핏물이 든 종이를 완전히 펼치자 급하게 휘갈긴 티가 나는 글씨가 보였다. 글씨는 핏물과 한데 뒤섞여 한눈에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델시아의 입이 벌어졌다. 이내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이게 무슨 말이야?”
델시아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여러 차례 반문했다. 렌토의 얼굴과 종이의 글씨를 번갈아 쳐다보던 델시아가 입을 벙긋거렸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절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현실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는 듯했다.
종이를 든 손이 발발 떨렸다.
“……아.”
델시아의 잇새로 짧은 울림이 일었다.
“렌토…….”
돌연 델시아가 렌토의 이름을 불렀다. 렌토의 이름을 혀끝에 얹은 델시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사 귀환을 염원하는 관례는 이미 했잖아.”
페티아 제국에는 귀족이고 평민이고 가릴 것 없이 행하는 전통이 하나 있었다. 전장에 나가는 식솔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기 위해 붉은 물이 든 편지를 적어서 태우는 것. 편지 안에는 식솔의 이름과 식솔이 전사하였다는 글귀를 적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핏물이 든 편지를 실제로 받지 않기 위해 옛날부터 행해오던 유구한 전통이었다. 델시아의 오빠인 아놀드를 보낸 페르도 백작 가문과 에드윈을 보낸 아델리오 공작 가문도 이미 그 전통을 치른 바 있었다.
“렌토.”
“아가씨……. 어, 어떡해요.”
렌토가 울상을 한 채 델시아를 쳐다봤다.
“……아니지?”
“아, 아가씨.”
“에드윈이 어떻게……. 렌토, 아니지?”
델시아는 그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장난이라는, 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 작은 장난이었다는. 그런 가벼운 말을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델시아의 바람과는 달리 렌토의 조그만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렌토를 바라보던 델시아의 쪽빛 눈동자가 한순간에 빛을 잃었다. 힘겹게 버티고 서 있던 델시아가 기어이 몸을 비틀거렸다.
“아, 아가씨!”
엘라가 서둘러 델시아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그녀는 힘없이 흔들리는 제 주인의 몸을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에드윈이 좋아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델시아의 손에는 여전히 종이가 쥐여 있었다. 엘라의 도움으로 침실에 도착한 델시아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천천히 심호흡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릴 적 에드윈을 따라서 긴 거리를 뛰었을 때처럼 숨이 찼다. 턱 끝까지 차올라 자신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몸을 떨면서 간신히 버티던 델시아의 잇새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흐……, 흐윽.”
“……아가씨.”
종이의 내용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엘라조차 감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비통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제 주인을 위로해야 할지 망설이던 엘라가 이내 팔을 벌려 델시아를 얼싸안았다.
“어, 어떡해. 흐……, 흐흑. 엘라, 나 어떡해.”
“아, 아가씨…….”
자신의 주인이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온 세상의 불행을 끌어안은 듯이.
엘라는 자신의 짐작이 빗나가기를, 자신의 무엄한 짐작을 눈치챈 델시아가 그런 끔찍한 생각은 그만두라고 혼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엘라는 이내 제 짐작이 맞았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에, 에드윈이. 에드윈이…… 흐, 흐윽.”
델시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델시아의 연인, 델시아가 제 심장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사람. 고귀한 에드윈 아델리오 공작이 전사하였노라고.
급보라고 온 종이에는 그리 적혀 있었다.
긴 전투 끝에 승리를 쟁취하고 돌아오던 길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흑마법사가 나타나 광범위한 마법을 펼치려 했다고.
그 마법을 홀로 막아낸 에드윈이 일격을 날리기 직전에, 흑마법사가 재빠르게 펼친 마법이 델시아의 오빠인 아놀드에게 향했고, 이를 본 에드윈이 일격을 포기하고 아놀드 대신 그 마법을 맞았노라고.
그 모든 것을 다시금 상기한 델시아의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델시아는 에드윈이 무슨 생각으로 아놀드 대신 마법을 맞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슬퍼할 저를 생각하여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아놀드를 잃었다는 사실에 무너질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여…….
“에, 에드윈. 아, 아아…….”
그러나 에드윈은 델시아의 마음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의 죽음으로 델시아의 마음은 진창이 되었다.
에드윈 아델리오가 죽었다. 신성력을 지닌 그와는 상극인 흑마법에, 에드윈이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져 페르도 백작가와 아델리오 공작가에만 알려졌다.
성검을 가진 아델리오 공작의 죽음은 제국을 뒤흔들 게 분명했으니까. 하여 황실은 페르도 백작가와 아델리오 공작가만을 흔들기로 한 것이다.
델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에드윈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혹여 선잠이라도 들면 에드윈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잠꼬대했다. 그러고는 다시 깨어나 눈물을 흘리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했다.
엉망진창.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불릴 만한 그런 불행한 이틀이었다. 델시아와 페르도 백작가 그리고 아델리오 공작가만이 보낸 지옥 같은 이틀이었다.
“흐, 흐으윽.”
델시아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슬픔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알기도 전에 어머니는 눈을 감았고, 사랑스러웠던 고양이 엘라이가 죽었다. 훌쩍 크고 나서야 알게 됐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아니, 실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고 괴로운 이런 감정이 사람들이 말하는 슬픔이라는 것을.
“아, 아아……. 아니야. 아니야!”
델시아가 머리를 싸매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이런 비참한 게 델시아의 현실일 리 없다. 그래. 이 모든 것은 꿈이다. 전부, 전부 꿈.
델시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게 너무나 선연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