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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외전6: 어느 결혼식과, 따사로운 봄날(1) (147/148)

147화 외전6: 어느 결혼식과, 따사로운 봄날(1)

루키우스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전신 거울로 슬쩍 비춰 보니 거기 서 있는 건 턱시도를 입은 목각 인형이었다.

어깨를 건드리면 무릎이 꺾일 것 같고, 발을 옮기면 몸체가 다 무너질 듯 뻣뻣하다.

이 인형 좀 사세요, 라고 상인이 불러도 다들 거절할 만큼 어색하잖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어렵사리 표정을 바꾸려는 찰나, 디자이너가 등을 탁 쳤다.

“하하하, 신랑님. 정신 차리십시오. 이러다가 신부님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기절하겠습니다!”

“…….”

디자이너를 돕던 메이드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아까 보고 왔는데 신부님 정말 아름다우셔요. 근래 본 신부님 중에 최고로요. 세상에, 베일을 씌웠는데도 머리카락이 너무 눈부셔서 다들 눈을 감았다니까요?”

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에 이 정도 칭찬은 흔했으나, 메이드의 말은 진심이었다.

클라인 공녀는 세기의 신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웠거든.

‘당연하지! 난 안 봐도 다 알아.’

루키우스의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디자이너가 다시 초를 쳤다.

“신랑님. 신부님은 완벽하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요. 안 그러면 큰일입니다.”

“뭐?”

“신랑이 버진 로드 걷다가 쓰러지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어딨겠습니까? 편하게, 긴장 푸십시오. 아, 왜 다른 신랑님들은 신부를 번쩍 안고 입장도 한다는데 그건 꿈도 못 꾸겠군요.”

참자.

그는 자기가 인간들의 눈에 업신여겨진다는 모욕감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자신은 한심하다.

드래곤이랍시고 온갖 잘난 척을 다 하더니만….

오늘은 무조건 기분 좋은 날!

‘페이…. 조금만 기다려. 네 곁으로 금방 달려갈게.’

사랑하는 그녀가 공녀의 지위를 되찾고도 몇 년 후.

그는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고, 그 자리에서 거절당한 전적이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사랑한다며! 나와 함께하자고 맹세했었잖아? 그새 애정이 식은 건가? 젠장, 더 빨리 말했어야…!

“페… 페이?”

“루키우스. 전 루키우스를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결혼이란 의식으로 루키우스와 저를 묶어 놓는 일은 꺼려져요.”

“왜?!”

그녀의 답변은 간결하면서도 심오했다.

“시간이 흐르고, 루키우스 혼자만 남으면 루키우스가 영원히 고통스러워할 것 같아서요.”

그는 그런 것까지 모두 감안하고 청혼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약한 마음까지 오롯이 들여다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지.

루키우스는 생각이 부정적으로 바뀐 페이를 설득했다.

“난 괜찮아. 아니, 방법이 있어. 내 드래곤 하트를…!”

“당연히 못 먹죠!”

“머, 먹다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페이. 간단히 생각해. 내 드래곤 하트의 마력과 생명력을 너와 내가 나눠 가지는 방식이야. 예전부터 연구했었고 너만 결정하면 돼. 난 너와 영원히 하나이길 원하거든.”

“그런….”

페이는 다시금 망설였으나, 루키우스는 사력을 다해 그녀를 껴안고 어르고 달래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간신히 승낙을 받은 뒤에도 조건이 붙었다.

“마력은 빼 주세요.”

“왜. 난 네가 나만큼 강해지고, 내가 그만큼 약해져도 좋은데.”

“…….”

워낙 중요한 순간이라, 그 모모도 삐죽한 주둥이를 꼭 다물고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모에겐 루키우스의 무력 약화가 세상에 더없는 축제였다. 마력을 빼다니, 왜!

제발 루키우스의 뜻대로 이뤄져라! 제에에에에에발!

“그러다가 만에 하나 부부 싸움이 크게 일어난 날에 마탑이 무너지면 어떡해요. 마력은 아무래도 무서우니까 관둬요.”

“그… 그래, 알았어.”

부부 싸움이라.

페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루키우스는 헤벌쭉 웃으면서 프로포즈를 한번 거절당한 충격도 다 잊어버렸다.

모모의 주둥이에서 터진, 아니꼬운 한숨도 그래서 봐줬었지.

아무튼 다 끝났다.

몇 년을 벼른 이 결혼식을 끝내고 나면, 그 누구도 둘을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 거다.

이 교만하기 짝이 없는 두 인간도…! 아아, 그만두자. 결혼식을 마치는 순간까지 부정을 타는 생각을 해선 안 돼.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 티세르 대륙을 멸망시키지 않는다…. 바다도 한 줌의 호수도 말라붙게 하지 않는다…. 하아, 그래. 그래야만 한다.’

루키우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혼란한 정신을 안정시켰다.

1분이 1년같이 흐르던 대기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그가 먼저 입장하는 순간이 왔다.

클라인 공작저는 이날을 위해서 호화로운 홀을 하나 새로 지었다.

앞으로도 태어날 자손들이 약혼, 결혼을 하게 될 때 여길 쓸 계획이라나.

그 첫 시작을 페이와 루키우스의 결합이 차지했다.

‘후우.’

“신랑, 입장!”

루키우스는 망연한 걱정과는 달리 멀쩡하게 걸어 클라인 공작의 앞에 섰다.

공작은 심적 고통을 몰아내서인지, 몇 년 전보다 회춘한 듯이 더 건강해 보였다.

공작 부인은 벌써 시큰거리는 코를 손수건으로 누르며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모습.

딸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집은 보통 이런 얼굴,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지.

‘흔한 광경인데 내가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군. 인간들은… 제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는가.’

그의 상념을 곧바로 몰아내는 외침이 들려왔다.

“신부님 들어오십니다!”

“와아아!”

“페이 마법사님, 아름다우세요!”

“삐이, 삐이이!”

“꺄아악! 카셀 님, 여기도 보아 주세요!”

루키우스가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요란하기 짝이 없는 하객들의 아우성.

그러나 그 소란은 루키우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서, 카셀의 손을 잡으며 입장하는 페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에 핑크빛과 연둣빛으로 빛나는 보석이 그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 그 인간 메이드. 말이 틀렸잖아.

근래가 아니라 티세르 대륙이 창제된 이래 가장 아름다운 신부인데?

가장 아름답고 화창한 봄날을 골라 결혼식을 치르는 보람이 있었다.

야외가 아니라 홀에서 열리나, 창문을 모조리 열어 둬서 환한 햇살이 안으로 비쳐 들어온다.

그 눈부신 빛을 받은 페이는 상기된 얼굴을 하였으나, 눈은 앞의 루키우스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부끄러움이란 두 볼에만 자리하는 듯 발갰다.

‘페이!’

베일 끝이 살랑거려 그녀의 팔꿈치 아래를 건드렸다.

봄의 산들바람이라도 불어온 걸까, 페이의 입가에 실룩이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루키우스도 그냥 헤벌쭉 웃어 버렸다.

내게 뭐가 있겠어? 네가 좋아하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너 하나인걸.

어서 와, 기다렸어. 내게로 영원히 와 줘….

팔불출을 넘어서 페이 유일주의가 된 그는 저절로 손을 내밀었다. 하나도 아니고 양쪽 다.

버진 로드 행진을 지켜보던 좌중은 웃음이 터졌다.

신랑이 신부를 좋아하는 티가 나도 너무 난다!

“아하하!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신랑님!”

“안 그래도 신부님께서 가고 있습니다!”

“급하네, 급해!”

“끼룩끼룩, 삐이익!”

…루키우스가 다가오는 페이의 미모에 흠뻑 빠져 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사로운 원한을 더 쌓지 못했으니까.

하늘에 맹세코, 루키우스는 그 뒤에 예식의 순서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다가오는 페이에게 반지를 끼워 주고, 베일을 거둬 입을 맞추고, 뭔가를 시작했으나 떠밀리듯 몸이 일을 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날은 까마득하게 저물었고 페이는 그의 곁에 없었다.

“페이!”

“예, 신랑님. 머리의 핀을 다 뽑고 오신다고 10초 전에 나가셨습니다.”

남아 있던 시녀장이 뒤늦게 타일렀다.

“내가 하면 되잖아?!”

멍하니 있던 루키우스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제지당했다.

“안 됩니다.”

“왜!”

“신부님이 엄명을 내리셨어요.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올 거니까 무조건 여기서 기다리시라고요. 만약 쫓아오면 오늘은 클라인 공작 부인과 함께 주무시겠다고 하셨는데 못 들으셨군요?”

“큭….”

페이의 말은 루키우스에게 있어서는 가히 주신의 명령이었다.

힘없이 주저앉은 그는 그야말로 하염없이 기다렸고, 그 처량한 꼴은 주인의 귀가만을 바라는 하얀 강아지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버거운 드레스를 갈아입고 하얀 로브에 외투를 걸친 페이가 돌아왔다.

낮에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여신 같았다면, 지금은 달이 뜰 때만 외출하는 밤의 고귀한 정령 같았다.

무슨 정령이냐고…? 그게 중요한가, 지금 페이가 내게로 왔는데!

루키우스는 다급하게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페, 페이!”

“많이 기다렸어요?”

“천년은 지난 줄 알았어!”

“크윽….”

공작저의 시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문을 살그머니 닫았다.

이 신혼방 안에, 근 열흘은 먹고 마셔도 될 음식과 음료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뭐…. 문을 슬쩍 열고 신선한 샐러드를 전달해 주는 것까지도 될 거고.

시녀는 뒤로 돌자마자 속삭였다.

“며칠 후에나 나오실까?”

“신랑님의 불타는 눈을 보니까 난 일단 사흘.”

“공녀님의 남편이 고작 사흘로 되겠어? 사흘 받고 난 닷새!”

“너희들! 대체 무슨 소리를 떠드는 거야? 당장 물러가지 못해?”

공작 부인의 엄명을 받고 온 베린스가 소리치자, 쑥덕대던 시녀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한편, 드디어 페이와 재회한 루키우스는 그녀를 꼭 껴안고 넋두리를 늘어놨다.

“다신 안 놓칠 거야….”

그의 말은 애절하기 짝이 없어 페이는 몹시 당황했다.

“…루키우스. 우리 근 2년 동안 단 하루도 안 본 날이 없었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아무튼 싫어.”

고개를 푹 꺾고 뒤에서 들려오는 말투는 쓸쓸한 고단함을 머금고 있었다.

‘왠지 처음 보는 모습 같네.’

그는 그녀의 앞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사죄하는 모습, 처결(?)을 기다리는 힘없는 모습 등등을 보여 줬다.

그런데 오늘의 루키우스는 그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애착이 붙은 곰인형을 잠들기 전에 잃어버렸다가 간신히 찾은 아이 같잖아?

‘이, 이건 말하면 안 되겠어. 자존심이 상할 거니까 그냥 내가 기다려 주자.’

루키우스가 서툰 페이를 많이 기다려 줬듯, 이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 한다.

“…….”

“…….”

잠시 후에 포옹을 푼 루키우스가 페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다리를 가린 로브가 말려 올려지는 느낌에 페이가 낮게 탄성을 질렀다.

낯설면서도 은근한 전율이 몸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아!”

“…참 나. 페이. 그거 알아? 낮에 건방진 디자이너가 나 보고 이런 것 못 할 거래.”

“네?”

“너무 긴장해서 널 안고 못 걸을 거라고. 하! 어이가 없지. 우리 앞으로 매년 리마인드 웨딩 하자.”

“뭐… 뭐하러요.”

루키우스의 몸에서는 은은하면서도 묘하게 단 향이 났다.

그는 뭔가를 만들 때 향이 묻는다면서 향수 따위는 거의 쓰지 않았다. 정작 페이에겐 향수를 만들거나 사서 틈틈이 선물했지만.

그런데 오늘만 다른 이 향기가,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단어와 한숨과 투덜거림 모두가 한데 뒤섞여 페이를 자극해 왔다.

이미 그와 가깝지만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어.

‘아….’

그에게 안겨 달랑거리는 두 다리가 떨린다.

스르륵 떨어져 무릎을 드러나게 하는 로브의 트임새를 그가 알아줬으면 한다.

실은, 나도 하루 내내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는걸?

곁에 있는 루키우스를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간절히 바랐어. 우리 둘만 어서 남게 해 달라고.

몽롱하게 풀려 가는 두 연둣빛 눈동자가 주인을 마주한 건, 침대 위에 가뿐하게 올려진 뒤였다.

“1년마다 널 오늘과 똑같은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해야지.”

“루키우스…!”

“페이, 내 모든 걸 걸어서 너를 사랑해. 나머진 내게 맡겨.”

루키우스의 손이, 나긋하게 풀린 연핑크빛 머리칼을 빗처럼 짙게 훑어 냈다.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스쳐 한 올 한 올 살아날 때마다 페이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 안의, 바닷속에서 살랑거리는 산호처럼 유혹하는 움직임을 남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루키우스의 뜨거운 입술이 와 닿는 순간 페이는 환희에 가득히 찼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벅찬 마음을 안은 둘의 몸이 무너지듯이 침대로 넘어갔다.

* * *

“…….”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노크를-”

“어허! 어제 했을 때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언제쯤에요?”

“음, 두 시간 뒤? 진득하게 기다려야 해.”

닫힌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용인들이 쑥덕댔다.

결혼식을 치르고 나흘. 그동안 문이 잠깐 열릴 때는 있었으나 안에서 사람이 걸어서 나온 적은 없었다.

이 기간이 길면 길수록 호사라지?

사흘을 꼽아 내기를 한 사용인들이 판돈을 다 잃은 일은 덤이었다. 베린스를 비롯해서 집사에게 빠짐없이 쥐어박히기도 했었고.

끼이익--

“여, 열린다!”

“다들 나란히 서세요! 표정,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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