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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외전5: 설산의 스노우 드래곤, 하이사(1) (144/148)

144화 외전5: 설산의 스노우 드래곤, 하이사(1)

“으흠흠~ ”

“페이, 여기에 있었어?”

“루키우스!”

페이가 즐거운 듯이 연인의 이름을 외치자, 돌로 된 벽에 소리가 부딪혀 조그마한 울림을 자아냈다.

이곳은 그의 드래곤 레어에 마련된 페이의 개인 열람실.

책장에 가득한 책들, 양피지며 큰 지도 등의 부속 열람물이 각종 보관함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차분한 느낌을 주는 옅은 회색 벽지 어딘가에 달린 선반엔, 보호색도 못 띤 모모가 올라가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놈!’

“삐… 삐이익….”

최근에 ‘지극히 혼날 짓’을 해서 혼쭐이 난 모모가 거대한 마력에 눌려 식은땀을 흘렸다.

“루키우스, 그만해요.”

“쳇.”

“한번 혼냈으면 그만둬야지 두고두고 우려먹으면 모모도 힘들잖아요.”

“알았어.”

온도 조절 장치를 슬쩍 살핀 루키우스는 페이에게 다가서며 도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책을 워낙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이곳을 따로 꾸미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뒀는데, 가면 갈수록 보람차다.

뭐랄까…. 루키우스의 입장에선, 페이가 마탑에 있기보다 그의 안식처에서 즐겁게 지내 주는 편이 더 좋았다.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하면 느낌이 묘해지므로 말하지 않는 것뿐.

그는 페이의 뒤로 다가서서 허리를 다정하게 껴안았다.

“오늘은 뭘 보고 있었는데?”

“이거요.”

“하….”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 이유가 있었다.

부스러진 흔적이 역력한, 오래된 종이에 그려진 드래곤의 골격.

드래곤 앞에서 본 드래곤의 구조도를 보고 있었던 페이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저는 인체 해부도를 봐도 특별한 느낌이 없었는데 루키우스한테는 아니었나 봐요?”

“…날 이걸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니지?”

다행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루키우스가 농담을 하자 페이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따스하기 그지없는 눈길과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흑빛 눈동자, 늘씬하게 뻗은 콧대가 흐릿하게 보여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후에 벌어질 일이란 뻔하지.

잠시 후, 가벼운 입맞춤을 마친 그들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보고 있던 드래곤에 관한 주제들로.

페이는 드래곤 일람을 펼쳐 보며 신나게 말을 하다 말고 문득 웃었다.

“왜 웃어?”

장난스럽게 캐묻는 말투에, 그녀는 루키우스의 목부터 꼭 끌어안았다.

언제부턴가 알게 되었다.

그가 일어나지 않은 운명, 노예 제나의 기구한 삶에 대해서 끝없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루키우스의 이 환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해야 했다.

“으응, 루키우스가 과거에 마룡이 될 뻔했다는 사실은 영원한 비밀이잖아요?”

“…어.”

예상대로, 그의 목소리가 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빨리 말해야지!

“그냥 흔한 생각이었어요. 드래곤이 클라인 공작저를 습격할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야생의 드래곤을 맨눈으로 관찰할 일도 없잖아요. 조금 아쉽다고요.”

“야생….”

엄밀히 따지면, 산 드래곤 중에 야생이 아닌 드래곤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주신이 아니고서야 누구 앞에서라도 애완용 장난감으로 전락할 리 없으니.

페이의 말도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

고대가 끝나고 아칸 제국이 대두한 이후로, 드래곤은 사실상 멸종 위기를 넘은 절멸 단계라고 학계가 인정하고 있지 않나.

고룡 루키우스의 행방이 묘연하다고는 해도 확인할 길은 없고, 뭣보다 인간인 페이가 드래곤에 접근해 관찰한다는 건 너무 위험하다.

그녀는 루키우스의 뺨에 입을 한 차례 더 맞추고는, 몸을 뒤틀어 조그마한 지도를 가리켰다.

“카셀 오라버니 말로는 황궁 지하에 본 드래곤이 있다는데 작동은 안 된대요. 그리고 바다랑 동화된 수룡들은 어쩐지 방해하고 싶지 않고요, 봉인된 드래곤을 저 보자고 봉인을 풀면 나쁜 거잖아요? 그러니까 관찰 기회는 없는 거죠.”

“그….”

있다.

드래곤-정확히는 살아 있는 해츨링-을 관찰할 기회.

루키우스는 드래곤 가운데도 꽤 거만한지라 자기 본체를 보일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몰래 숨겨 놓은 데샤루트를 어떻게 포장해서 보여 줄까 하는 고민을 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티세르 대륙에 풀어 놓기도 곤란해진 그 어린것을.

페이는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전에 모모가 그랬는데, 드라칸이 진화 과정에서 조금만 더 영리했으면 드래곤들한테 상당히 대접을 받았을 거래요.”

“호오?”

대접?

뭔가 들려서는 안 되는 단어가 들리자, 루키우스의 눈초리가 버릇처럼 벽의 선반에서 자는 놈을 찾아냈다.

드래곤의 아종.

그 단어에 들어 있는 뜻 하나가 그의 심기를 몹시 거스르게 하고 있었다.

“그랬으면 드래곤하고 드라칸 사이에서, 또 비슷한 종이 탄생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신기해요!”

루키우스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학자다운 면모를 보이는 페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정말 사랑스럽고, 또 용감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할 수 있나!

그녀를 아는 드래곤이 오로지 그 하나뿐이라 다행이지.

그놈은…. 평생토록 볼 일이 없을 터이니.

루키우스의 머릿속은 만난 적은 없으나 인간들의 탐험으로 인해 알려진 ‘모 드래곤’의 특성을 재빨리 훑고, 페이의 지식욕을 채워 주기 위해 바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페이는 오랜만에 황궁에서 급한 연락을 받고 마탑 외부로 나왔다.

‘모모를 본체화해서 타고 오라니, 무슨 일인 거지? 누가 실력 행사라도 하려고 든 걸까?’

황궁에 무려 세 기사단을 두고 있음에도 구태여 드라칸 라이더를 찾는다는 건 심상치 않았다.

“기다려.”

“루키우스!”

루키우스는 무척 굳은 표정을 한 채로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 보기 드물게 로브 소매를 낚아채는 손길에, 그도 긴장하고 있음이 역력히 느껴졌다.

하필 며칠 전 그는 당분간 마탑에 없으리라는 거짓 전갈을 황궁에 보내 놓은… 상태였다.

왜냐고? 페이와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방해받지 않으려고.

요즘은 마탑에서 뭔가를 배우고 연구하는 것보다도 그의 레어에서 지내는 게 좋기에 페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게 좀 꼬여서, 황궁에 오라는 사람이 그녀로만 한정된 게 영 켕기는 눈치였다.

“혼자 가지 마.”

“하지만….”

“젠장, 내가 급하게 돌아온 걸로 하면 되잖아.”

“무슨 짐작이 가는 일이라도 있어요?”

루키우스는 평소와는 달리 금방 대답하지 않고 입술 안에서 뭔가를 씰룩대고 있었다.

페이도 이젠 그의 버릇을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입 모양으로 욕을 하고 싶은데 참는 걸 봐서는, 감이 잡히긴 하는데 확실치 않구나 싶었다.

“그….”

“걱정하지 말아요, 루키우스. 같이 가면 더 좋지요. 갈래요?”

“그래.”

둘은 드라칸의 안장에 탔고, 그는 그녀를 뒤에 숨기고 외투로 폭 감싸기까지 했다.

정말…. 이런 과보호, 남의 눈에 띄면 부끄럽다니까!

페이는 어느새 실라스를 만나야 한다는 걱정은 잊고 볼을 붉힌 채로 비행을 즐겼다.

창피하긴 하지만 하늘 위니까 누가 보고 손가락질할 일도 없기에 너무너무 즐거웠다.

황궁의 풍경은 계절이 달라질 때마다 즐거움을 주었다.

봄엔 각종 나무에서 자라나는 연둣빛 새싹들과 경쾌하게 흐르는 해자의 물소리가, 여름엔 차례대로 피는 꽃들과 위용이 넘치는 조각상과 성 내부를, 가을엔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나무와 수확제의 기쁨이 무척 컸다. 겨울… 겨울도 나름대로 운치 있고.

뿌듯함만이 가득했던 작년의 수확제를 떠올린 그녀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후훗.”

“…….”

그러나, 그녀와는 달리 루키우스는 황궁으로 근접할수록 얼굴을 굳혀 갔다.

드래곤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그에게 있어 몹시 구리고 맡기 싫은, 동족의 냄새!

‘젠장!’

약속한 장소인 아이리스 별궁의 공터에 내린 페이는 깜짝 놀랐다.

이 안의 공기, 계절이 분명히 초가을인데 왜 이렇게 얼어붙은 것처럼 느껴질까.

그녀의 피에 잠든 물의 마력이 가만히 있지 말고 스스로를 보호하라며 속삭이는 듯했다.

새끼손가락이 움찔거리는 찰나, 루키우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에 서 있어. 내가 먼저 갈게.”

“루키우스…?”

그는 페이를 제쳐 두고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저벅저벅.

저편에서 하나로 맞춰 들리는 군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황태자와 카셀, 발리엣 경에 해밀턴 경을 비롯하여 얼핏 봐도 실력이 우수한 선임 기사 무리였다.

‘왜 저렇게 많이 나왔지?’

페이는 루키우스의 뒤편에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루키우스의 은발보다 더 하얗고 생생한, 눈과 닮은 머리칼을 가진 낯선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서 대한 듯 친밀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서 오게, 레이디 모르가나. 루키우스도 함께 왔군.”

황태자는 왠지 모르게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기사를 호위로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페이는 자기 직감이 시키는 대로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혹시, 저 앞에 있는 남자….”

“하이사!”

그보다 루키우스의 호명이 더 빨랐다.

하이사라고? 내가 아는 이름, 루키우스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깨어 있는 그 스노우 드래곤 하이사란 말이야?

“흠.”

루키우스와는 달리, 고대사의 중간 즈음에 태어난 하이사는 어깨를 쭉 폈다.

실라스는 놀라지도 않고 이쪽을 보며 말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따라들 오게.”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루키우스는 지금도 자신이 드래곤임을 숨기고 있는데…. 행여, 이 기회에 밝혀지는 건 아닐까?

페이로선 두근두근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카셀에게 눈인사만 겨우 해 보이고는, 응접실에 거만한 자세로 앉은 하이사를 힐끔 보았다.

나른한 눈빛을 하던 그는 루키우스를 살짝 째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 이야기는 유효합니다, 인간 세계의 황태자여.”

실라스는 예상외로 흡족한 표정이었다.

“로지아 국경 지대의 설산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애초에 건드릴 생각도 없었고 곧 보호 법안이 제정될 거요, 스노우 드래곤.”

“편하게 불러도 됩니다.”

어어? 그전부터 연락을 주고받기까지 했었나?

고대의 환영 속에서 하이사의 용신전까지 다녀온 페이로선 뭐라도 말을 해 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산 드래곤을 만나서 관찰하고 싶다고 투덜댄 게 며칠 전인데 그 소원이 이뤄지기 직전이잖아!

그러나, 그녀는 자기 호기심을 못 이겨 일을 망칠 바보는 아니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하이사가 이쪽을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과연 물 마법에 통달해 있음이 느껴지는군요.”

“그러한가, 레이디 모르가나는 적지 않은 나이에 마법을 연구해서 금방 실력을 쌓은 천재지.”

내… 내가 천재라니! 전하, 그런 칭찬까진 바라지 않았습니다!

페이는 몸 둘 바를 몰랐으나 이런 경우에 겸양을 떨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음을 잘 알았다.

허세도 세상 살면서 필요할 때는 있거든.

그래서 그냥 웃었다.

잘나가는 마법사인 척…. 입술까지 뜨거워지는 부끄러움을 간신히 숨기면서 말이다.

하이사는 무척 흡족한 표정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두 마법사들만 남겨 놓고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만, 되겠습니까?”

“레이디 모르가나, 루키우스. 어떤가? 우리 제국은 스노우 드래곤 하이사와의 협업을 기대하고 있네. 그대들은 제국의 유능한 마법사가 아닌가. 부디 이야기를 잘해 준다면 좋겠군.”

협어업~?

드래곤과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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