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외전4: 인간 남자가 된 모모(2)
마뉴엘라가 받은 쪽지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 마뉴엘라 랏셀 공녀여, 이 몸은 아칸 제국을 수호하는 드라칸 모이테트라 바누스일세. 잠시 화급한 일이 생겨 위기를 맞았으니 부디 도와주지 않겠나? 내 사례는 꼭 할 것이외다.
“……?”
“공녀님, 어떻게 할까요?”
공녀는 잠시 갈등하다가 물었다.
“그 바깥에 선 사람, 사람 맞죠?”
“예. 허우대는 멀쩡해 보였습니다. 귀족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요.”
“흐음….”
마뉴엘라는 한숨을 쉬었다.
실라스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조만간 결혼할 결심마저 품은 뒤 이 저택을 찾아오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개중에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자도 없진 않았는데, 대낮에 이런 짓이라니 너무 황당하다.
‘인간인데 자기가 드라칸이라고 주장하는 자를 어떻게 내쫓는다…?’
마뉴엘라의 맞은편에서 열심히 수를 놓던, 리그레아로 뽑인 라티나 남작 영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공녀님? 제가 도울 수 있을까요?”
“오, 아니에요. 그냥 하던 일 계속하죠. 그리고… 내쫓으세요.”
마뉴엘라는 잠시 망설였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본디 온화한 성품이나, 이 집에 손님이 와 있는 데다 앞으로는 누구도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할 방침이었다.
사랑하는 실라스와 제국을 위하여.
“예.”
두 여인이 남은 공간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억울해, 흐흐흑…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인간에게 두 번이나 쫓겨나나!”
따지고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경계심이 많은 법.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는 모모는 이를 갈았다.
‘젠장. 두고 봐라. 내 반드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얄미운 둘의 저택에 호된 화염을 쏟아붓고 말 것이다! 크흑…. 이 기회에 드래곤으로 진화할 수만 있다면…!’
뜻은 창대한데 몸은 허약한 인간의 것이니 감당할 길이 없었다.
꼬르륵!
그 와중에, 인간의 육신으로 변해서인지 배를 울리는 천둥이 들려왔다.
드라칸은 한번 폭식을 하면 두 달에서 석 달을 먹지 않아도 견디나 모모는 그런 삶과는 달랐다.
마탑에 있을 때만 해도 페이가 잘 챙겨 주는 고기며, 오동통한 애벌레를 수시로 잡아먹고 사는 게 취미였지.
지금은 인간으로 변한 부작용인지, 코앞에 나뭇잎에 매달린 녹색 애벌레가 보이는데 구역질이 났다.
저걸 어떻게 먹어!
“우욱…! 이런 걸 먹어 봐야 배가 찰 리가 없잖나. 하아, 어디로 가지….”
훔친 루키우스의 금화로 인간의 음식을 사 먹는다는 생각도 났으나, 자기가 인간 모습이라는 게 너무 기막혀선지 눈물이 나려 했다.
모모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을 훔치며 거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런 그를 지나치는 몇몇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여보, 저 남자 우나 봐요.”
“못 본 척해 주오. 때로는 사나이도 우는 법이야.”
“엄마!”
“쉿, 쉿. 알았으니까 이리 와. 엄마도 봤는데 저리 가서 얘기하자.”
‘이… 이것들이… 크윽, 백 년도 못 사는 것들이 나를 놀려…!’
분명히 배가 고팠는데 서러움으로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라파엘과 마뉴엘라에 대한 전의를 상실한 모모는 서점으로 향해, 두 시간이 넘게 안을 샅샅이 뒤졌다.
‘제길… 뭐라도 건져 내야 한다. 드라칸을 인간으로 만드는 저주가 있다면 푸는 법도 당연히 존재할 거야, 그래야만 해! 나는…!’
타악.
“앗, 죄송해요.”
모모는 책장 모서리에 있다가 몸을 돌려 나오는 여자를 못 보고 부딪히고 말았다.
인간의 몸이 되더니 고작 이것 하나 못 피하나 싶어서 우울할 틈도 없었다.
흐릿해진 시야로 보이는 저… 저 여자는….
페이!
“그렇게 아팠어요? 죄송해요, 이것 드릴….”
“잠깐만!!!”
모모는 손수건을 건네려는 페이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기적적으로 만났는데 여기서 놓치면 끝장이야!
그 바람에, 사려고 품에 안았던 그녀의 책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안에서 소란이 일자 바깥에서 기다리던 기사들이 기웃거리다 뛰쳐 들어왔다.
“공녀님께 당장 떨어져라!”
“네 이놈! 그분이 누군지 아느냐!”
“그 손 놓지 못할까!”
“어… 저… 잠깐….”
페이는 낯선 남자가 자기 손가락에 끼워진 흑요석 반지를 뺄 듯이 단단히 붙들어서 상당히 놀랐다.
이 단순한 반지에 루키우스가 보호 마법을 추가로 걸어 줬기에, 닿아도 괜찮은 존재는 한정되어 있다.
그녀, 루키우스, 그리고… 모모.
카셀 등을 만날 때는 빼고 다니거든.
시간이 조금 흐르고, 둘은 조용한 카페테리아 2층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페이는 눈물을 훔치고 있는 이 남자, 모이테트라 바누스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느라 진땀을 뺐다.
‘으음….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네.’
연핑크빛 머리칼이 클라인 공녀의 것이란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루비 펜던트의 저주를 해소했으므로 더는 영향을 받지 않기에, 원래대로의 옅은 금발로 돌릴 수도 있으나 페이는 그러지 않기를 택했다.
이미 이 외모가 그녀의 특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 서점에 가리란 생각을 충동적으로 해냈지.
이 수상한 사람이 사전에 알고 들어와 준비한 거짓말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모모가 루키우스의 명령을 받아 보물 창고에 갔다는 걸 아는 사람, 아니 존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으음….”
“페이이! 너도 나를 못 믿는 것인가, 크흑. 그토록 주인으로 잘 섬기고 등에 태우고 다니기까지 했는데! 나의 이 위기를 그냥 넘길 건가!”
페이는 모모가 자기에게 반말을 한다고 해서 못마땅해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만든 스크롤도 아니고 인간에서 드라칸으로 돌려보낼 마법을 아는 건 루키우스뿐인걸.”
“뭐…?”
연핑크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마법사가 빙긋 웃었다.
“알겠어. 네가 진짜 모모라면 루키우스가 보자마자 알아보겠지? 내가 잘 말해 줄게, 나하고 같이 가서 저주를 풀어 달라고 하자.”
모모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 그랬다간 나는 죽는다고! 지금까지 말한 게 그 내용이었다! 주인에게 안 들키고 날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그렇지만 모모, 저주는 원래 건 사람이 풀 수 있는 거잖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같이 가… 모모, 모모?”
콰당-탕!
의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졌고, 사내는 순식간에 달려 2층을 벗어나고 말았다.
문가에서 기사가 지켜 서고는 있었으나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그들은 클라인 공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게 중요했지, 미친놈을 잡아 혼쭐내는 게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
“공녀님, 어떻게 할까요. 잡아서 다시 대령합니까?”
“…….”
페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특기는 물 마법. 유일한 회복 마법인 큐어로 저주를 해소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결국, 모모를 구해 줄 존재는 온 세상천지에 그 저주를 실행했던 루키우스뿐이다.
‘큐어로 시도라도 해 볼 걸 그랬나, 흑요석 반지를 건드리고도 무사했으니 진짜 모모가 맞을 텐데…. 하아, 루키우스에게 말해서 너무 혼내지 말라고 해야겠어.’
루키우스가 모모를 많이 혼냈어도 지금까지 죽인(?) 적은 없었지. 그에게 모모를 찾아 달라고 해야겠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으며, 페이는 부드럽게 웃고 일어섰다.
모모가, 그녀가 알던 귀여운 새로 돌아와 품에 안기면 예뻐해 주고 고기를 먹여 줄 생각이었다.
후우- 후후우-
밤에만 우는 새가 울부짖는 외로운 시간.
모모는 마음껏 아기 새로 변해 놀던 나날이 그립다고 생각했다.
나무 위를 올라타기는커녕 미끄러지지 않으면 다행인, 쓸모없는 손발을 가진 인간으로 변하다니.
‘흐흑….’
앞선 인간 둘은 그렇다고 쳐도, 2대 여주인까지 자신을 배신한 게 너무 쓰라렸다.
이 모든 일이 그가 늘어지게 자다가 책장을 엎어서 생긴 일이란 건 모모에겐 안중도 없었다.
억울해, 분해, 원통하다.
그깟 낮잠 좀 잤다고 이 수모를 당하다니….
모모는 터벅터벅 걸어, 낮에 앉았던 강둑으로 가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강에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지자,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페이한테 애교 좀 많이 부려 놓을걸. 공작저에 간다고 할 때도 기를 쓰고 따라붙었으면 내가 주인의 보물 창고를 지키는 개로 버려질 일도 없었겠지.’
새삼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사무쳤다.
마탑에서의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신 그러지 않을 텐데.
모모는 주책맞게 또 훌쩍이며 강둑 옆으로 넘어갔고, 어느새 두 눈을 감고 말았다.
하염없이 자느라고 사고를 쳤으면서도 또 잠들고 마는 모모는, 어쩔 수 없는 사고뭉치였다.
완전히 잠든 남자의 몸 위에 수상쩍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이 못된 놈에게 걸린 마법을 일찍 해제하기 위해 나타난 마법사였다.
“흠.”
“푸우우우….”
그 누군가의 말로는 이자가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반성한다더니….
잘만 자는데?
“…할 말은 많지만 나중에 몰아서 하도록 하지. 네놈을 진지하게 마주할 시간을 비워 뒀으니 그때 보자고.”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인간의 모습을 한 남자는 금세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땅에서 자는 무언가를 마법으로 들어 올린 마법사는 마탑으로 이동했다.
“…….”
“…르렁, 드르렁… 피유우… 뿌욱!”
“무슨 소리를 내는 거야, 모모. 너무 요란하잖아. 적당히 좀 자고 일어나.”
귓전에 울리는 달콤하고 살짝 나무라는 말투.
페이다!
모모는 눈을 번쩍 떴고, 인간의 흉측한 팔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안 놓쳐!
그러나 짧고 앙증맞은 솜털이 달린 날개는 그곳까지 닿지 못했다.
데굴데굴.
균형을 잃은 작은 몸이 멋지게 한 바퀴 굴러서 책 옆으로 다가붙자, 페이가 웃었다.
“후후, 앞구르기까지 하는 거야?”
“삐…이(페이)?”
“그래, 모모. 고작 며칠 만인데 되게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다. 그치?”
모모는 두 팔, 아니 날개를 파닥거리다가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눈치챘다!
‘됐어. 본체로 돌아갈 수 있는, 내 피에 흐르는 힘도 느껴진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쁜 꿈이었나?’
고작 하루 사이에 알던 사람 셋에게 차례로 거절당한 쓰라림을 진짜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악몽이지, 암.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식곤증으로 자다가 끔찍한 악몽을 꾸고 만 게 틀림없다.
유리한 대로 생각하는 성향 때문에, 늘 멍청하다고 꾸지람을 듣는 모모는 해죽대며 페이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따뜻하고 아늑하다.
다신… 다신 이 여주인의 근처를 벗어났다가 그런 끔찍한 꿈을 꾸는 사태를 만들지 말자.
“삐이익(사랑해).”
“뭐어? 으음, 잘못 안 거겠지. 모모가 사랑한다는 말을 자의로 말할 리가 없잖아? 후후, 이젠 괜찮을 거야. 앞으로는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해?”
페이는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으나, 위대한 드라칸으로 돌아왔다는 자부심에 취한 모모는 그 말을 해석할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
평소와 같이 마법 연구를 마치고 밤이 깊어 잘 시간.
유독 할 일이 많다며 자리를 비웠던 루키우스가 돌아왔다.
“잘 있었어?”
“그럼요!”
“호오…. 이쪽도 상당히 잘 있었나 보군.”
루키우스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모가 보물 창고 천장이 울리도록 코골이 소리를 내던 시점부터.
예전부터 혼쭐을 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스크롤을 꼬리로 찢어서 마법을 자기 몸에 씌우더니 도망까지 가? 정령들은 이놈이 지껄이는 말에 속기나 하고…!
루키우스는 자기 권속들이 나태하게 군 만큼 그들을 굴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모모는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늘어져서 쿨쿨 자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서, 포근하게.
페이가 루키우스의 팔에 매달렸다.
“자기도 모르고 한 일이라 고생했을 거니까, 좀 봐줘요.”
“자-알 봐줄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모모는 네 드라칸이야. 죽이거나 인사불성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
“푸… 푸우….”
조그마한 콧구멍을 울리면서 자는 모모는 자기 운명을 알고나 있을까?
페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루키우스는 바구니를 향해 손을 뻗었고, 진정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모름지기 기적이 가져다주는 기회란 영원하지 않은 법.
그걸 두 눈 감고 있느라고 놓쳤으면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