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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외전3: 고대 마룡 루키우스(3) (141/148)

141화 외전3: 고대 마룡 루키우스(3)

과일이 없는 부분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간 끝엔, 놀랍게도… 고아원이 있었다.

창문으로 빼꼼하게 내민 작은 고개들은 전부 아이들의 것.

“우와아! 멜론이다!”

“포도다!”

“조, 조심해. 포도는 뭉개지니까 손으로 마구 움켜쥐면 곤란해!”

수레가 고아원 앞마당에 들어가자마자 들이닥쳐 과일을 챙기는 아이들의 법석과 요란에, 코끝이 찡했다.

옛날의 기억이 떠올라….

늘 비슷한 음식을 먹다가 상큼한 과일을 먹을 기회가 오니 기분이 좋았겠지.

많이 먹으렴.

이 모든 일이 남들은 모르는 과거라 해도 내가 느낀 감동은 똑같을 거야.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 페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좋은 분이셨어요.”

“뭐? 어느 누가 드래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실은 저도 고아원 출신이었거든요.”

페이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루키우스는, 페이가 수도원에서 힘들게 생활했다는 고백을 들을 당시에도 자기가 과거에 뭘 했느니 하며 으스대지 않았어.

이게 그에게 있어 잘난 척하는 위선의 일부면 어때? 누군가는 진짜로 도움을 받고 행복해졌는걸?

그거면 됐잖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더니, 자기는 새벽에 일어나서 이 과일을 시장에서 공수해 왔겠지.

드래곤이니까 자기가 부리는 권속의 밭에서 가져와도 될 걸…. 구태여 인간에게 샀다.

바보 루키우스.

입만 열면 자긴 오만한 드래곤이었다고 회개하지만 이 정도면 좋았잖아!

“흠. 어려운 환경에서 마법을 놓지 않다니 기특하군.”

“마법은 제가 현실에서 탈출할 유일한 길이었어요.”

“그래, 그만큼 실력을 쌓았으면 성공의 가도를 달려도 충분하다. 약속한 대로 샤르프 황궁으로 가 볼까. 너 정도면 황궁 마법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취직하고 싶나?”

이렇게 갑자기요?!

페이는 감탄하면서도 급히 사양했다.

“엇…! 황궁 구경은 해 보고 싶은데, 그들의 일원이 될 자신감은 없어요. 그것만은 사양하겠습니다.”

고대의 환영에서 나가기 전에 샤르프 제국의 황궁을 구경한다면 그야말로 피날레!

이 안에서까지 일하는 건… 됐다. 필요 없어.

루키우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일원이라니? 너라면 그들의 머리가 되어도 충분한 실력이다.”

“그렇게까지 많은 건 바라지 않아요.”

“넌 참 재밌는 자로군. 드래곤 앞에선 떨지도 않고 할 말 다 하면서 인간은 두려워해? 흠…. 살면서 독한 놈에게 제대로 데이기라도 했나.”

예… 예리하잖아! 이 안에서 몸을 사리는 게 꼭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오늘 샤르프 제국의 황궁 마법사가 된 다음, 단 하루를 재직하고 끝을 내면 느낌이 이상할 것 같거든.

페이는, 이 안의 세상에 정을 붙이게 될까 봐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약속을 했으니 황궁으로 가 보자. 이리로.”

‘앗…!’

휘익.

루키우스가 가까이 오더니, 페이의 허리를 퍽 거친 손길로 휘감았다.

그는… 그녀가 아는 그가 절대로 하지 않는 행위.

근육이 잡힌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가두고 머리 위의 입술이 휘파람을 불 듯 공간 이동의 주문을 외웠다.

간결하고 내키는 대로 하는 동작이 잘못인가.

설…레 버렸다.

‘난 몰라. 고대의 환영 밖으로 나가면 절대 말 안 할 거고 평생 비밀이야, 너무 창피하잖아!’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페이는, 주변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한참 동안 모르고 있었다.

“…….”

“이제 진정했나?”

“네? 앗!”

기다리다 못한 루키우스가 묻자, 페이는 그제야 황급히 옆을 둘러보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동굴 안에서 봤던 이오니아 양식의 용신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고아한 내부.

샤르프 제국의 황궁이다!

루키우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에게 한 발 휙 다가가며 말했다.

“나는 이 안에서 세네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대충 마법 원로 정도 되는 위치니 잘 따라오면 된다.”

“네…!”

그를 따라서 황궁 곳곳을 구경하는 내내, 루키우스의 등을 평범하게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는….

바보, 인간을 사랑했잖아. 이 정도면 박애주의자잖아!

난 알 수 있어!

‘루키우스, 실은 카론 황제와 함께 샤르프 제국도 멸망시킬 수 있던 거 아니었어요? 고대 이전에 태어난, 당신의 형제와도 같은 드래곤들이 주신의 손에 몰살당할 때도 꿋꿋이 살아남았잖아요….’

그러나 인간의 손에 패배했다는 치욕의 서술을 역사서에 남기고 스러지길 택했던 루키우스.

어쩌면 주신께서도 아셨을 거다.

루키우스만은 지상에 남겨 둬도 되는 이유를….

‘하, 하이사는 지금의 시점으로는 나이가 적은 드래곤이고 고대에 태어나서 죽음을 면한 건가.’

그야 고대의 환영 바깥으로 나가서 알아보면 될 일이긴 한데, 썩 내키진 않았다.

일단 그에게 있어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루키우스는 ‘세네카’란 명패가 써진 자신의 방에 들어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낄낄댔다.

“어때, 넓지? 내 레어와 비교하면 병아리 부리에 달린 콧구멍만도 못하지만.”

“네….”

“…왜 또 우는 얼굴이지? 넌 툭하면 눈물을 흘릴 것처럼 생겼군. 어디 아픈가?”

“…….”

이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당신의 진심을 알았다고 어떻게 고백한단 말인가.

그녀 앞에서 유치한 변명 한 번 내세우지 않았던 루키우스는 정말로 멋있는 남자였다.

“이봐, 인간.”

“네.”

“나 정도의 자리를 원한다면 당장 줄 수 있다. 어때, 내가 매일 와 보지는 못해도 적당히 챙겨 줄 순 있는데? 탐나나?”

거만한 척하는 말끝에, 너를 돌봐 주겠노라고 제안하는 섬세한 배려까지.

안 되겠어. 여기서 더 머무르다간 환영에 불과한 그에게 또 반할 기세다.

‘난 역시 루키우스를 사랑하는구나.’

페이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의 힘으로 해 보겠어요. 루키우스 님 말씀대로 저는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르니까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자, 받아라. 내 권한으로 황궁 내부를 다닐 수 있는 신분패다. 난 아마 돌아오지 않을 거다. 오늘 하루는 황궁에서 묵고 내일부턴 네 뜻대로 살아라, 인간. 네 수명으로 이 세상을 살기란 괜찮을 거다.”

갑자기 이별?

루키우스는 서랍에서 묵직한 금화 주머니 하나를 꺼내 놓더니 눈을 들었다.

심연보다 더 깊고, 모든 것을 삼킬 능력을 가진 흑안과, …마주쳤다.

“인간, 네 이름이 뭐지?”

“페이입니다.”

“페이? 괜찮은 이름이군. 기억해 둘 만해.”

만약 루키우스가 지금 하는 말을 용신도들이 들었다면,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감사하다고 절을 했을 것이다.

위대한 드래곤이 인간의 이름을 물어보다니!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들은 페이는 찡해지는 코끝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환영에 불과한 루키우스와의 순간순간이 자꾸만 소중하게 느껴진다.

“예.”

“잘 지내라, 페이. 인간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착같이 굴기도 하고, 연구 대상으로는 충분하지. 너 자신이 중심을 잃지 말아야 인간들 틈에서 살 수 있는 법이다.”

심오한 충고를 남긴 루키우스, 고룡 루키우스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더니 사라졌다.

꿈결과도 같은 시간이었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페이는 숨을 골랐다.

“하아….”

한참 후에야 일어선 그녀는 마법 원로, 세네카에게 주어진 방의 양식과 내부 장식 등을 종이에 미친 듯이 정리했다.

그에게 받은 만년필에는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정리가 끝난 후엔, 아마도 황실 마법사들 전용으로 주어진 듯한 이 별궁을 기웃거리느라 반나절을 다 썼다.

밤이 찾아오고 셋째 날의 자정을 지나, 새벽녘이 어슴푸레한 사위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곧 떠나는구나.’

보고 싶다, 루키우스.

고대 샤르프 제국의 황궁은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지.

별궁의 정원에 앉은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고, 연인의 뜻을 알아차린 바깥의 루키우스가 외유의 시간을 끝내 주었다.

스크롤 안의 거대했던 세상이 남모르게 사그라들었다.

* * *

다른 시간대에서 잠깐 살아서 허무하다든지, 괜히 갔다는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

최근의 경험 중에선 최고였는걸.

현실 세계로 돌아온 페이는 눈앞에 보이는 루키우스를 와락 껴안았다.

“루키우스…!”

“이틀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 날 더 사랑하게 됐어?”

역시 다르다.

부드럽게 놀리는 말투와, 그러면서도 그녀를 살뜰하게 안아 주는 두 팔. 머리를 쓰다듬는 손아귀엔 나긋한 온기가 배어 있다.

페이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어… 흠, 흠.”

루키우스는 뜻하지 않은 대답에 좋으면서도 헛기침을 했다.

“꾸에엑.”

일부러 토하는 시늉을 하는 모모까지.

이 일상은 무엇과도 못 바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은 페이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웃음을 터트렸다.

“드라칸은 전혀 못 봤어요, 루키우스. 고대엔 잘나갔다던데 눈을 씻고 봐도 없던걸요? 공룡 샤르보니스는 봤어요! 사람들이 길들여서 목줄을 매 뒀는데 진짜 끝내줬어요…!”

루키우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랬어? 어디서?”

“하이사의 용신전이요.”

“떨어져도 하필 그런 데를 갔어, 못 쓰겠네.”

“전 좋았어요, 정말로요.”

안에서 있던 일, 역시 말하지 말까.

루키우스가 그녀에겐 포근하게 굴어 주고, 일전에 클라인 공작가의 가족들이 행한 무례도 눈감아 줬다지만….

공연히 질투를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루키우스, 좀 쉬어요. 한숨도 못 잤을 거잖아요.”

“음…. 그럴까.”

“저기 누워요. 전 메모한 것 보고 기억에 남는 게 있으면 더 적어 두려고요.”

“그래.”

수정구의 불빛을 끈 루키우스가 간이침대에 가서 순순히 누웠다.

모모의 콧김 소리도 조용해진 뒤, 페이는 가방을 열어서 종이를 꺼내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나?’

고대의 환영에서 만난 루키우스가 줬던 금화 주머니도, 어차피 못 갖고 나오는 거라 책상 위에 두고 왔는데.

가방 안엔, 깜빡 잊고 있던 얼음꽃 만년필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루키우스는 안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오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이것…!’

그는 자고 있지.

뒤를 홱 돌아보고 나서야 그걸 깨달은 페이의 눈이 만년필로 향했다.

차가운 연못에서 건져 올린 듯 냉한 기운을 머금은 고대의 추억, 유물, 드래곤의 잔재.

‘…정말 모르겠어. 손수건도 가방에 있었는데 사라졌잖아.’

그녀는 소중한 그 물건을 서랍 안에 따로 넣고는, 익숙한 볼펜으로 그간 보고 들은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페이도 졸음이 왔다.

하룻밤을 꼴딱 샌 거나 마찬가지라서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여전히 자는 루키우스의 곁으로 다가붙었다.

“으음….”

낮고 달콤한 그의 잠꼬대.

그가 자는 모습을 보는 기회란 좀처럼 없기에, 페이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다 말고 제대로 누웠다.

곁에만 있어도 좋은 너, 나의 연인.

만족감에 취한 페이가 잠들고 넉넉히 한 시간 후.

“…….”

루키우스가 눈을 뜨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수정구로 단순히 그녀의 심박수 정도만 확인하던 게 아니었다.

고대의 환영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버젓이 다 보고 있었지.

알면서도 페이 앞에서 모르는 척 입을 다문 건….

‘젠장. 하필 만난 존재가 과거의 나라니 정말 창피하기 짝이 없군. 하이사 그놈이 용신전에서 유세를 떨 때 그 안으로 떨어졌어도 기분이 나빴겠지만…!’

그는 얌전히 걸어가 서랍을 열고 얼음꽃 만년필을 꺼냈다.

이것을 만든 기억, 난다.

머릿속을 구태여 뒤지지 않아도 잊었을 리가 없다. 그는 드래곤이니까.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장인 정신이어야 마땅하다면서 흐뭇하게 완성했었지.

지금 자세히 보니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없애면 난리가 나겠지, 후우. 내가 만들었던 건 레어 외부에 놔둬서 침략받을 당시에 같이 불탔는데…. 쩝.’

언젠가는 페이가 용기를 내서 이 만년필의 유래를 물어볼 텐데…?

어쩔 수 없나. 과거의 루키우스를 시간을 되돌려 죽여 버릴 순 없고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루키우스는 피식 웃고는, 만년필을 서랍 안에 넣고 간이침대로 돌아와 그녀를 안았다.

‘오늘은 마탑에서 너 안 재워.’

모모 따위, 깔끔하게 무시하고 드래곤 레어로 이동한 그는 눈에 닿는 가장 편안한 침대에 페이를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나의 사랑, 달콤한 꿈을 꾸기를.

내일의 너는 또 어떠한 말로 나를 자극하고 졸라 댈까?

…나도 알고 싶다.

넌 내 유일한 꿈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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