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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외전3: 고대 마룡 루키우스(1) (139/148)

139화 외전3: 고대 마룡 루키우스(1)

“부럽네요.”

“뭐가?”

페이의 뜬금없는 말에, 루키우스는 읽던 책을 홱 집어 던지고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녀가 뭔가를 갖지 못해 투덜거린다는 건 그의 사전에 있을 수도 없는 일.

만약 그게 실라스의 머리 위에 얹힌 금관이라도 뺏어서 주리라 생각하는 순간.

그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날아왔다.

“루키우스가요. 루키우스한테 경험담을 듣고, 고서를 보고, 고대의 바다에 들어가서 유추를 해 봐도요. 진짜 고대사를 겪은 사람, 아니 드래곤한테는 못 배겨 나는 일이잖아요.”

“난 또. 사람 사는 세상 다 비슷해, 페이. 물론 고대만의 특징이 있긴 한데 어휴…. 난 이 시대에 널 만나서 좋았어.”

루키우스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는 지극히 옛날부터 오만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이었다.

만에 하나 그 시절에 페이를 만났더라도, 사랑은 느끼되 그놈의 구질구질한 자존심을 끝까지 못 버렸을 거다.

그러다가 헤어졌더라면…. 말도 안 돼.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세상의 구원이고 뭐고 다 망해야 마땅하지.

루키우스는 자기가 땅바닥에 처박힌 전적이 있기에 정신을 차렸다는 가설을 지금도 믿고 있었다.

암, 그렇고말고. 우린 지금이 최고야.

“꾸이, 꾸이익!”

그 와중에 날아온 책 모서리에 머리를 맞은 모모가 항의를 하기 바빴다.

페이는 느긋하게 웃으며 모모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도 당연히 루키우스가 좋아요. 좋은 건 좋은 거고 부러운 건 부러운 거죠.”

“넌 여전히 고대사를 좋아하는구나.”

그간 꾸준한 연구와 공부로, 물 마법의 경지는 마탑에 머무르는 엘프들을 확실히 능가했다.

다른 속성의 마법도 배우고는 있다지만 그녀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는 단연 고대사 연구.

그녀는 모모를 내려놓고는 투덜댔다.

“아, 저도 그 시절에 태어나서 루키우스를 받드는 용신도 중 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걸요.”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그들과 매일 얼굴을 보고 뭘 해 주는 입장이 아니었어!”

“그래도요. 단 하루만이라도 고대인으로 살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조만간 고대사 논문도 쓸 텐데 얼마나 현실감 나겠어요?”

보기 힘든 페이의 생떼에, 루키우스는 망연자실했다.

그가 전지전능한 드래곤이라고 해도 사라진 시대를 불러와 완벽하게 구현하는 건 불가능한 일.

기껏해야 한다는 게 생태계 일부의 복원인데….

“끄응.”

“삐익, 삐이익.”

그때였다.

그새 나은 머리를 짧은 다리를 올려 문지르던 모모가, 책장에서 뭔가를 끄집어 와서 페이 앞에 내밀었다.

낡고 귀퉁이가 닳은 작은 종이엔 <고대의 환영 B.A. 162, 72시간>라고 쓰여 있었다.

“응? 모모. 이게 뭐야?”

“아…! 이게 있었네. 근데… 후우, 이놈. 칭찬을 해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에라, 모르겠다.”

“뭔데요? 네?”

루키우스의 난감해하는 말투에서 희망을 찾은 그녀가 찰싹 달라붙었다.

페이의 가느다란 팔이 그의 허리를 잡아당기고 조르자 남자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용건은 잠시 미뤄 두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 볼까?

그녀와의 알콩달콩한 순간은 무엇과도 못 바꾸지.

꼬물거리는 따스한 감촉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와서, 튜닉 사이를 알맞게 꼬집…었다!

아프다는 느낌이 루키우스에게 있을 리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라고, 살점 조금만 집어 소심하게 꼬집은 페이가 재차 물었다.

“빨리 말해요, 루키우스. 궁금하단 말이에요.”

“나 원 참…. 이건 과거에 존재했던 시간과 공간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스크롤이야. 완벽하진 않고 어중간한 실패작이라 완성품으로 안 만든 거지. 고작 사흘 정도만 유지되거든.”

페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물었다.

“B.A. 162면 아칸 제국 건설 162년 전 맞죠?”

“…무섭네, 무서워. 맞아. 이 시기는 샤르프 제국이 건재하고 멸망의 징조는 아직 멀었지.”

나는 눈치챘지만.

루키우스는,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그 말을 꾹 삼켰다.

“부탁해요! 저, 이거 써 보고 싶어요. 루키우스? 네?”

세상에, 살면서 이런 횡재가 있나?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루키우스의 허리에 매달렸다.

때마침 연구하던 시기와 거의 들어맞다니, 이런 행운이 다 있나? 논문 완성 시기가 한층 앞당겨질 절호의 기회였다.

사랑하는 여자의 조르기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이것저것 잔뜩 준비한 페이가 기운차게 일어났다.

그 시기와 어울리는 튜닉과 롱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참으로 아리따웠다.

페이는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아 보이며 말했다.

“이 튜닉, 루키우스가 입었던 것하고 비슷하네요.”

“…페이, 난 네 상황이 나빠지면 바깥에서 강제 소환을 할 거라 같이 들어갈 수 없어. 원래 그만큼 마력 용량이 큰 스크롤도 아니고. 이걸 쓴 사람이 위험해지면 자동으로 나와지긴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니까.”

루키우스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네. 충분히 주의할게요. 루키우스, 돌아와서 봐요!”

‘결과물을 망쳤을 때 그냥 없애 버릴 걸 그랬나. 아니야…. 페이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막기도 곤란하지.’

루키우스는 스크롤을 발동하는 주문을 외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녀 대신 수정구를 응시했다.

그는 앞으로 페이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절대로 잠들지 않을 것이다.

* * *

파앗.

불유쾌한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떨어진 페이는 숨을 죽였다.

‘이곳이… 고대의 공간….’

그녀가 살아가는 대륙도 고대에 똑같이 존재했었다고는 하나, 느낌 자체가 다르다.

습한 공기에 코를 씰룩이는 것도 잠시.

눈을 들자, 거대한 종유석이 달린 천장이 이곳이 동굴임을 증명했다.

동굴 탐험부터 시작인가?!

‘자연 탐사는 이곳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어디 나가는 통로가 없을… 앗?’

토도도독.

발밑,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이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소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위대한 고룡께서 신도들을 굽어살펴 주심이 감사하옵니다.”

“…를….”

후드가 달린 검은색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뭔가를 외우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히 경이롭고 신비했다.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고대어고 반복이 많아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보다 발밑이 아찔하기 짝이 없었다.

‘내,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닥이 아니라 절벽 위쪽이었잖아?! 아래에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데…. 어딜 가는 거람? 조금만 더 내다보면 보일 것 같은…!’

“어이.”

“흡!”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페이는 놀라 헛숨을 삼켰다.

콜록콜록. 기도로 공기를 삼켜 버린 바람에 쿨럭거리는 그녀를 뒤에 따라붙은 남자가 급히 잡아챘다.

“떨어지겠다고!”

‘자… 잠깐. 기다려!’

바닥이자 위쪽에 엉덩방아를 찧은 페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익숙한 목소리, 벌써 흐릿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펄럭이는 튜닉, 삐죽삐죽하게 뻗친 은빛 머리카락, 그녀를 향해 내민 손-

루키우스!

눈물 속에서 알아본 그의 표정은 오만에, 약간의 당황이 뒤섞여 있었다.

페이는 주르륵 흘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스스로 일어섰다.

“우으….”

“뭐야, 너. 어디 아픈가?”

고대로 오자마자 그를 보게 되다니.

하지만 이곳 말고 바깥의, 그녀만을 사랑하는 루키우스가 일러 주었다.

“조심해. 이 스크롤 안의 존재 중 너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설령 나 혹은 모모를 만나도 마찬가지니 명심하도록 해. 만에 하나 그들이 널 해치려고 들면 바깥으로 바로 불러낼 테지만.”

“네, 알았어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고룡 루키우스. 으음…. 그 당시에는 괴짜에다 포악하다는 이유로, 종종 마룡 취급을 당했다는 그 시절의 그를 보고픈 마음이 없잖았다.

그런데 오자마자 만나다니…!

페이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그에게 공격당하지 않을 만큼 얌전히 굴면서 이 근처를 더 보고 싶으니까.

“아닙니다. 이… 이곳이, 말로만 듣던 위대한 드래곤 루키우스 님의 용신전인가요?”

딱 봐도 레어는 아니었다.

그가 구성한 드래곤 레어를 샅샅이 구경했었는데, 종유석은 전혀 없었거든.

위험 때문일 리가 없고 물 떨어지는 동굴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루키우스가 다른 곳을 선정했다고 했었지…. 아하하.

고대의 루키우스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렇다! 인간 주제에… 호오? 마법을 제법 익혔군. 엘프가 손댄 아인가?”

다른 속성도 아니고 물 마법을 주로 배운 진가가 이런 데서 발휘되는가.

페이는 라파엘이 시범을 보여 줬던,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엘프 종족과 친하지는 못했으나, 스스로 마법에 뜻이 있었습니다.”

“흠! 인간의 몸으로 그만큼 노력했다면 제법이구나. 내 눈에 찰 정도로는 아니다만, 잘 키우면 마탑의 차기 마탑주 정도는 노려봐도 되겠어. 인간으로서 그 정도면 성공이지.”

푸훗!

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하필 마탑주라니.

페이는 웃음의 위기가 닥쳐왔으나 간신히 참고, 거만한 루키우스의 환심을 사서 용신전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다르네, 역시 달라.’

잠깐이긴 하나 고대의 루키우스를 대한 그녀의 소감이었다.

그는 노인과도 같이, 느긋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평상시의 루키우스는 그녀 앞에서는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인기척을 느끼기 직전엔 가끔 저 상태였거든.

루키우스는 자기를 뒤따르던 페이에게 손짓하더니 먼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용신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보아라.”

“와…! 아까 그 사람들이네요?”

“그래. 훗, 우리가 걸어서 온 곳이 나름대로 지름길이지. 저들은 날짜를 정해 매일 이 주변을 순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페이는 두 손을 꼭 모으고 감탄했다.

“신비로워요. 이런 장관을 보다니요. 루키우스 님도 이 광경을 보면 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축복을 주실 법한데요.”

페이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은근히 사람을 찔러 보는 이런 말투, 예리한 루키우스가 모를 리가 없다. 자기 정체를 뻔히 알면서 떠봤다고 노하겠지.

죽…으려나?

루키우스가 그녀의 눈앞에서 공격 마법을 쓴 횟수는 많지 않았다.

이왕이면 재빠른 번개 마법이 날아들기를. 덜 아프게.

페이는 바깥의 루키우스를 믿으므로 겁을 집어먹진 않았으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마법을 맞지도 않고 바깥으로 소환되지도 않았다!

눈앞의 루키우스가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말했다.

“그걸 원하나?”

“네?”

“저들은 사실상 내가 없어도 된다. 그저 나란 존재를 안식처 삼아 기대길 원할 뿐이지.”

예전에 루키우스가 말해 줬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 고룡 루키우스 님이십니까?”

“알고 물어봤으면서 뭘 모르는 척하나? 음흉하긴.”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에 그녀는 더 놀랐다. 루키우스는, 그럼 페이의 생각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긴가?

“그걸 어떻게…!”

“날 보고 울었잖나.”

“……?”

“인간이란 족속들은 내가 머리 위에서 비행하면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거든. 너도 똑같았지. 위대한 존재를 눈앞에서 보는 소감이 어떤가?”

‘그건… 거대한 드래곤이 나는 모습을 보니 무서워서 운 거 아닐까요?!’

고대 루키우스가 히죽대며 하는 말에, 페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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