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외전2: 공녀님의 연인(2)
“너무 예쁜데. 황궁에 가서 너한테 사람들이 다 반하면 어쩌지?”
“어휴! 그런 말이 어딨어요. 둘 다 반지 끼고 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나, 페이는 반지 착용을 드물게 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흑요석과 플라티나 링 대신 새로운 커플 반지를 나란히 맞춰서 가지고 있었다.
페이의 피부가 약해서 얼굴로 손을 올렸다가 긁힌 적도 있고, 루키우스는 그런 점에서까지 질투하진 않았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빼고 다니라고 말한 게 그였다.
그래도 오늘은 끼고 가야지.
루키우스와 함께 황궁으로 가는 페이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
아카드니아 홀로 들어서서, 무척 당황한 듯한 클라인 공작 내외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아버지, 어머니도…?”
“오…! 티아나. 웬일이니.”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라인 공작 부인이 딸을 보고 여길 왜 왔냐고 물은 적은 없었다.
바깥에서 만나 반가워했으면 반가워했지 왜 당황한단 말인가, 부부 침실을 습격한 것도 아니고.
눈치 빠른 루키우스는 페이의 팔짱을 더욱 휘감았다.
공작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황태자 전하의 부하니 당연히 올 수 있지. 그래, 온 김에 같이 가서 인사 올리자꾸나.”
“네.”
…그러나, 꿍꿍이가 있는 공작도 딸을 단단히 붙든 사내의 팔뚝을 노려보는 일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 잘되는 욕심 앞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게 정상 아닌가.
넷 중에서 가장 태평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페이 혼자였다.
실라스는 그 어느 때보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서 오오, 클라인 공작, 클라인 공작 부인. 공녀도 오랜만이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늘은 그간 아카데미를 졸업하거나 정식 기사로 서임 받은 자들을 불러 간소히 축하하고자 하는 자리요. 근 5년 만에 하는 일이지. 공녀, 그대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면 고맙겠소.”
“네, 당연히 할게요.”
처음엔 작은 무도회라더니 황태자가 중간에 말을 바꿨는데도, 페이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윽고, 황궁 시녀가 갓 피어난 장미 바구니를 들고 와서 건넸다.
왠지 등 뒤가 따가운 느낌이었지만, 페이는 바구니를 옆에 낀 채 장미를 한 송이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입니다. 졸업을 축하드려요.”
“시온 퀘이사입니다, 공녀님. 부모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과연 아름다우십니다.”
“어머…! 퀘이사 백작가의 그분이셨나요?”
얼굴이 앳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간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아카데미에서 수학을 마치고 외가에 가 있느라 처음 뵙겠습니다. 클라인 공녀님께 영광이 있기를.”
시온은 말을 마치고, 절도 있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는 페이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면서 어느 기사단에서 나왔다고 해도 손색없을 동작이었다.
그녀와 약간 떨어져 있던 루키우스의 눈에 금세 불쾌감이 서렸다.
‘저게?’
그냥 기사가 하는 짓이라면 봐줄 수도 있는데 이건 좀 아니다. 저놈은 목적이 있는 놈 아닌가.
나서서 다 엎어 버리고 싶은데 장래의 장인, 장모와 연인의 뒷배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라서….
“흐음, 흠.”
“티아나보다 어리긴 한다는데…. 뭐, 의젓하네요. 교육을 잘 받았어요.”
클라인 공작 내외가 쑥덕이는 사이.
어느새 다가와서 시온을 슬쩍 밀어낸 다른 사내가 인사를 건넸다.
“클라인 공녀님, 다시 뵙는군요.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이든 경!”
이번에 날아든 날파리(?)는 라파엘이 있는 크로우 기사단의 선임 기사, 이든이었다.
‘이 자식은 기사가 된 지 십 년도 넘지 않았나? 어디 염치도 없이 이 자리에 끼어들어?’
루키우스가 노려보는 눈초리를 깡그리 무시한 이든이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하하, 이런 자리가 간만이라 아직 뭘 모르는 신입 기사들을 데리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셨군요? 고생 많으셔요.”
“같이 차라도 한잔하실까요? 모시겠습니다.”
이든은 뻔뻔하게도 공녀의 옆자리를 자기가 죄다 차지하려고 들었다.
“이… 이 장미는 화병에 꽂아 잘 보관해 두겠습니다. 공녀님, 저는…!”
이든의 노골적인 등쌀에 밀려난 시온이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으나 때는 늦었다.
바구니에 꽂힌 장미는 한정적이고, 다른 시녀들이 나눠 주는 장미도 충분한데 다들 이쪽으로 달려들기 바빴다.
영문을 모르는 페이는 장미가 다 떨어질까 걱정하면서 한 송이씩 나눠 주고 이름을 불러 주느라 진땀을 뺐다.
아무리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고 해도, 이럴 때 소외받으면 나중에 서러운 법이거든.
그녀는 그런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장미를 약 세 번 정도 보충하고 나서야 나눠 주기 행사가 다 끝났다.
레이디 모르가나도, 마법사 페이도 아니고 클라인 공녀로 온 자리라 지친 표정을 짓기도 눈치가 보인다.
‘허… 허억, 왜 이러지? 평소에 알던 사람들도 갑자기 나와 인사를 하려고 들었어. 이런 번잡한 자리가 아니어도 나중에 볼 수 있는데 왜…?’
“클라인 공녀, 고생 많았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중간에 말릴 걸 그랬군.”
어느새 다가온 실라스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사죄했다.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 다들 제국의 일꾼인데 장미 한 송이 나눠 줬다고 지치진 않습니다.”
페이는 웃으면서 거짓말을 했고, 실라스는 그녀의 손을 곁눈질했다.
“그대는 벌써 곁을 정했는가. 서로 같은 반지를 끼고 온 것을 보면 틀림없군.”
“크흡!”
“으음….”
황태자의 의미심장한 말에,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클라인 공작 내외가 동시에 쿨럭였다.
당했다!
능구렁이 같은 나이 있는 귀족들도 아니고 젊은 축을 다 모아 놓고 말을 하다니.
클라인 공작 부인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여전히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페이는 간결하게 말했다.
“……? 네. 일전에 말씀드렸지요, 마탑에서 함께 연구하는 동료이자 제 연인, 루키우스입니다. 그는 제 스승이기도 해요.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고요.”
“그러한가, 축하하는 바요.”
페이는 며칠 전에 황태자가 답신을 보내 와 미리 말해 달라 청했던 그 이야기를 꺼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슬슬 반려를 정하셔야죠. 조만간 랏셀 공녀의 생일인데 초대받았거든요, 동행을 한 명 정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 가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황태자더러 결혼하라고 종용하면서, 인연이 있는 여성의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자고 곧바로 말한다?
만약 이게 무슨 말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남에게 되묻기보다는 자기 머리를 찬물에 넣어서 식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모두 숨을 죽이고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예. 어떠신가요?”
“…좋소. 꼭 가도록 하지.”
실라스의 미소는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 목적이 이거였군.’
루키우스는 손을 입으로 올려서 뭔가를 고민하는 척하면서, 잔뜩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려고 노력했다.
이 나라의 황태자가 전에 파혼했던 랏셀 공녀와 다시 이어지고 싶어 한다는 건 페이에게 온 서신을 통해 사전에 알았다.
그런데, 이쪽에도 위기가 있었고 그걸 자기 일과 엮어서 깔끔하게 처리해 주다니.
‘멍청하진 않다는 내 평가보다 더 괜찮군.’
그는 아칸 제국이 앞으로 천년, 그 이상으로 번성하길 바랐다. 갑자기.
꿍꿍이를 따로 만든 클라인 공작 내외를 괘씸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원래 그렇지, 일이 해결된 뒤에 그쪽에 얼씬도 안 한 그의 탓도 있고….
루키우스는 인간들의 꿍꿍이를 이번에는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마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어색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의 얼굴이 마음에 걸린 페이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앗!”
“사랑해.”
“루… 루키우스! 여기 황궁 안이에요. 지나치게 움직이면 마차 흔들려요!”
갑자기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고백했다.
좋긴 한데, 때와 장소를 가려 줘야지. 누가 멀찍이서 안을 훔쳐보기라도 하면 창피하단 말이야!
페이의 질책에도 남자의 이마는 조금씩 자리를 움직여, 그녀의 따스한 쇄골 아래에 안착했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페이의 귓불이 말랑한 살결에서 어여쁜 루비로 익어 갔다.
“네가 그렇게 나설 줄은 몰랐어.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루키우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사랑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신과도 같았다.
“뭐를요? 황태자 전하의 요청은 어차피 저한테 온 거였잖아요.”
“…눈치가 많이 없어졌네.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기야 하지.”
“네?!”
마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 말이 의미한 것과 페이는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던 것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날 황궁의 경계 근무를 서느라 잠깐 홀에 들렀던 카셀이, 사태를 알고는 편지를 보내와서 읽었거든.
급하게 써서 보냈는지 평소 정갈했던 필체는 거의 휘갈겨져 있었다.
- …해서, 면목이 없구나.
네가 전에 그와 만나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어도 우리가 착각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네 사적인 생활을 캐묻기도 곤란했거니와, 그간 루키우스란 마법사와 공작저에 통 오지 않아서 둘 사이가 흐지부지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너의 연인에게는 따로 사죄를 청하겠다.
티아나, 나는 항상 너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 다오. 너만 괜찮다면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 뒤에, 너와 그의 결합을 추진하고 싶다. 천천히 답해 주렴.
“세… 세상에. 아니, 나한테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셨을 줄이야…! 분명히 사귄다고 말했었는데!”
뒤에서 편지 내용을 힐끗거린 루키우스가 중얼거렸다.
“내 탓이야. 너하고 있는 시간이 좋아서 너무 안 움직였었네. 내가 공작 내외라도 딸보다 못한 남자는 무시하겠다.”
“아니에요! 루키우스가 그간 얼마나 노력을 해 줬는데요.”
“그게 나 말고 바로아일 때 한 거라 문제잖아.”
“아…! 맞다, 그건 그러네요.”
그의 조력이 많긴 했으나, 타인을 만난 모습은 죄다 변신한 바로아일 때가 많았다.
선대 마탑주가 떠난 후, 차기 마탑주가 될 거란 풍문이 떠도는 신비의 마법사면 뭐 하나?
얼굴을 보이지도 않는 놈 대신 제국의 황태자를 사윗감으로 꿈꿔 보는 게 더 먹음직하고 좋은 일이지….
잠깐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루키우스의 손에서 뭔가가 하얗게 피어났다.
황궁의 홀에서 페이가 나눠 주던 장미보다 더 아름답고 고결한 백장미.
어찌나 아름다운지, 갓 꽃망울을 터트린 백합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만큼 사람의 탄성을 자아냈다.
루키우스의 미적 감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만든 적이 없었다.
“와….”
“받아 줘, 페이. 오늘 황궁으로 가느라 꽃 주는 시간을 생략했네.”
“어,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다고 그래요!”
루키우스는 그녀에게 선물을 즐겨 하긴 했는데, 요즈음은 새로 쓴 책이나 신기한 마도구 등이 많아 꽃은 좀 뜸했다.
다른 꽃도 아니고 하필 장미를 내민 건 그도 오늘의 일로 발끈했다는 거겠지.
‘루키우스, 화 많이 났을 텐데 먼저 굽혀 주고 상냥해. 다음에 가면 다신 이러지 말라고 꼭 말해야겠어, 황태자 전하는 내게 이성적인 관심이 전혀 없는데…!’
페이는 손으로 들어온 하얀 장미를 꼭 쥐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만나게 된 나의 운명, 나의 연인, 루키우스.
우리가 마주한 이유가 처음에는 슬픈 숙명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 것처럼.
나란 사람도 많은 게 달라졌죠.
또 시간이 흘러서 우리 둘의 모습과 마음이 변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 나는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어.’
“페이, 사랑해.”
“…저도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이 다 시드는 날까지 너를 사랑해.”
“어휴…! 어디서 그런 이상한 말 좀 배워 와서 하지 말아요. 고대에 유행했던 대산가요?!”
루키우스의 속삭임에 페이가 몸을 뒤틀었다.
“진심인데. 원하면 더 해 줘? 네가 손을 들고 마법을 펼치는 모습은….”
“그, 그만. 그만해요! 다른 건 몰라도 마법만은 건드리지 말아 줘!”
손에 들린 백장미가 주변으로 흩뿌려졌다, 웃고 떠드는 루키우스와 페이를 장식하듯이.
둘의 소원은 하나였다.
연인을 웃게 한 즐거움이 내일도 가득하기를.
그들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