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외전2: 공녀님의 연인(1)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칸 제국의 클라인 공녀는 잃어버린 이름과 지위를 되찾았고,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사교계에 입성도 했다.
그전에도 사교계에 나온 몸이라지만 이번 봄의 데뷔탕트가 더욱 특별해진 이유였다.
봄의 전령이라고 일컫는, 수없이 많은 꽃과 풀들이 자라나고 지는 계절.
티아나가 좋아한다는 장미 묘목이 정원으로 하염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걸 심고 유월에서 칠월이 되면 장관을 이루겠지.
빠알간 장미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공녀는 정말 사랑스러울 거다.
그 장면을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던 모리스가 불쑥 말했다.
“언제쯤 할 겁니까?”
“뭐를?”
귀여운 여동생만 빼고 다른 가족이 다 모인 자리.
카셀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티아나의 결혼 말입니다. 당장 식을 치르진 않는대도, 약혼은 먼저 해 둘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
“요즘 황궁에 가기만 하면 공녀는 잘 있느냐고 온갖 사람들이 물어 오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너…!”
모리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가 고르기가 제일 좋지요. 아, 형님이 집안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결혼을 반드시 먼저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다면야….”
“그럴 리가 없잖나!”
카셀은 그 누구와 결혼해도 클라인 공작가를 더 번창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리스, 말 잘했다. 이 기회에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구나.”
“어…머님.”
“티아나가 마법사로 계속 살아도 존중할 인품을 가진 자라야겠지. 조건이 고작 하나 더 붙는 거라지만 사람을 고르는 일이라 신중해야 할 거다.”
클라인 공작 부인이 말을 거들자, 신문을 보던 공작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곳에선 똑같다니?
되도록 여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카셀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정을 명확히 다 들은 바는 없다지만.
티아나가 마탑의 마법사, 루키우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까지는 안다.
그 말고 눈앞에 있는 모든 가족도 언질을 들은 바가 있다.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갑자기 결혼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 남자가 우리 티아나의 반려가 되기에 적절한가?’
카셀도 은연중에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싫다는 게 아니라, 이후 그의 행보도 그러하고 둘이 여전히 사귀는지도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클라인 공녀가 된 페이, 티아나는 자기가 마탑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부 말해 주지 않는다.
연애 사실을 말할 때도 둘이 만난다고 짤막하게만 말했지 첫 만남이 어떻고, 잘 만난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다.
최근 공작저를 숱하게 드나들면서도 티아나는 루키우스를 대동하고 오는 일이 거의 없지.
그러므로 잘 지내냐고 먼저 말을 꺼내기도 난감했다. 그 카셀마저도.
‘나 모르게 헤어졌는데 말하기 껄끄러워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잖나?’
젊은 시절에 제멋대로 하는 연애란 불꽃같아서 언제 사그라질지 모른다지.
괜히 물어봤다가 티아나의 슬픔만 사면 더 곤란한 일인데.
티아나가 루키우스에게 건네받은 드라칸을 지금도 데리고는 있다지만, 일과 사랑은 또 별개의 문제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셀이 루키우스를 훌륭한 사윗감(?)에서 은근슬쩍 밀어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 마음에 더 드는 신랑감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티아나가 때로는 드라칸을 타고 어디를 훌쩍 다녀온 뒤에 사후 보고를 하곤 하지. 카셀이 아니라, 황태자에게.
…그리고 황태자는 그런 공녀의 행동을 전부 받아 주는 눈치다. 원칙대로라면 안 될 일인데 말이다.
실라스는 유독 티아나에게만 상냥하고 무르다.
처음 드라칸 라이더로 황궁에 입성할 당시부터, 진정한 클라인 공녀로 거듭난 지금까지 황태자는 늘 그래 왔다.
현실이 이러한 데 희망을 품을 이유가 왜 없겠는가.
카셀은 한 명의 남자로서 실라스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다신 예전처럼 칩거하는 일도 없을 거고, 제국의 모든 공무를 무사히 물려받으실 분. 여동생의 짝이 된다고 해서 황실을 업신여긴다든지 하지 않고 지금처럼 잘 받들 거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나야… 둘이서 만약 잘 된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다. 첫사랑은 잘 안 되어도 두 번째 사랑이 잘 되면 다 좋은 거겠지. 사랑으로 사랑을 잊는다는 말도 있잖나.’
이처럼 큰 오해를 산 데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상사와 부하. 페이도 그렇고 실라스도 자기 개인적인 말은 타인에게 좀처럼 안 하는 성격이라서였다.
마지막 보루,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의 마음이 매정하게 돌아서는 순간.
페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마탑에서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이 차 정말 맛있네요.”
“그래?”
“네, 냉차인데 향도 좋고 거북하지 않아요. 누구든 반할걸요.”
“예전에 너한테 줬던 테리프리아 잎으로 만든 차야.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꽃도 예쁜데 잎으로 차도 만들고 좋은데요?”
루키우스가 빙긋이 웃었다.
“그렇지? 재배가 착실히 잘 이뤄지고 있으니 네가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쓸 수 있게 해 둘게.”
대놓고 모두가 좋아할 거라고 해도 너한테만 주겠다고 말하는 남자.
그는 그야말로 그녀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사는 중이었다.
레어 혹은 아공간, 고대의 바다에 가서 뭔가를 가꿀 때도 사멸한 생태계의 복원보다 페이가 좋아할 것을 선택하는 게 우선이다.
페이는 루키우스의 지극한 사랑을 매일 느끼고 있었다. 충분히, 매우 많이, 넘치도록.
“고마워요. 으음…. 루키우스, 근데 정말 명예욕 같은 거 없어요?”
“명예욕?”
“원하기만 하면 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어디서든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요. 이대로 칩거하기엔 루키우스가 가진 재능과 안목이 너무 아까워요.”
“내가 왜. 없어.”
루키우스는 그녀를 향해 바보처럼 웃을 때와는 달리 퍽 퉁명스럽게 말했다.
카론에게 패배하기 직전까지 어지간한 일을 다 겪은 그가, 이제 와서 인간사에 미련을 가질 턱이 없었다.
그는 아칸 제국이 내일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남자다.
물론, 페이가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울부짖으면 밤을 새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야 하겠지만….
루키우스의 소원은 페이와 둘이서 알콩달콩, 잘사는 게 다였다.
클라인 공녀로 자리매김한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이 사회적으로 잘 대접받는 현실이면 충분하지, 뭐.
루키우스가 긴 의자에 벌러덩 눕자, 간이 커진 모모가 냉큼 배 위에 올라탔다.
페이가 없는 자리라면 손가락을 튕겨서 날려 보내겠건만, 그러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저지른 짓.
‘이놈이?’
눈을 부라려도 모모는 모르는 척 꼬리를 말고 주둥이가 찢어지도록 하품까지 해 댔다.
루키우스가 복근에 힘을 줘 마력을 은은하게 실어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버티는 근성의 드라칸!
그 와중에 페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진짜로요?”
“없어…! 괜히 그런 거 했다가 네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의무니 책임이니 해서 못 움직이는 상황이 되면 곤란하잖아. 어차피 나라면 무슨 일이든지 1초 안으로 다 해결할 거지만.”
“크케켁! 헤에취이!”
어이없는 소리라는 듯, 모모가 얄미운 재채기를 해 댔다. 마력으로 인해 너무 아프면서도 최후의 발악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용서 못 한다.
루키우스가 모모의 꼬리를 잡고 벽으로 던질 기세이자, 페이가 얼른 손으로 받아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생각해 봐요, 네? 루키우스가 바로아였던 것도 말 안 하기로 하고, 기껏 이룬 업적을 다 덮은 마당이라 그런지 가끔은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제가 마탑에 올 수 있었던 안배부터 드라칸 라이더, 공녀의 자리를 되찾은 지금까지 루키우스의 손길이 안 닿은 게 없잖아요. 매년 호화로운 계절을 맞는 기쁨도 다 루키우스가 준 걸요.”
페이가 하늘로 둥둥 띄워 주는 말에, 루키우스의 입이 찢어지도록 커졌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를 알아주고 고마워해 주는 지금.
“하, 널 위한 거라면 당연히 다 하는 거지. 황궁에 가서 종일 네 이름이 써진 연날리기를 하라고 해도 난 할 건데.”
“루키우스, 농담이 지나쳐요.”
“농담은 무슨 농담이야? 페이, 난 너한테 좋은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 광대 짓이든 뭐든.”
요점은 드래곤인 자기가 가능한 일을 그녀만을 위해 다하겠다는 뜨거운 사랑 고백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마음은 서로를 바라보는 하나였다.
“루키우스….”
페이의 연둣빛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였고, 그걸 보고 있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도 다정함이 감돈다.
이 꼴을 거의 매일 보고 사는, 중간에 낀 모모만 죽을 맛이었다.
“꾸우우웅…!”
간격을 조금 두고 떨어져 있던 둘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다가붙으려는 순간.
뽀뽀도 뽀뽀인데, 페이의 손에서 자길 잡아다가 요절을 내려는 루키우스의 무시무시한 손길이 느껴지자 모모는 재빨리 도망쳤다.
그때였다.
똑똑.
“누구세요?”
‘어떤 자식이야!’
짧은 입맞춤의 시도가 좌초당하자, 루키우스가 문을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원하면 그의 연인과 얼마든지 포옹도, 키스도 할 수 있다지만 남이 방해한 것과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의도치 않게 드래곤의 원한을 산 불청객은 황태자의 전령이었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모르가나, 나흘 후에 아카드니아 홀에서 황태자 전하를 위시해 작은 무도회를 열 예정인데 참석 가능하십니까?”
“나흘… 뒤에요?”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인 공녀로 되돌아가기 전에도, 황태자가 그녀를 황궁에 부르는 일은 종종 있었다.
황태자의 명령 때문에 급히 불려 가는 것도 아니고, 소규모 무도회라면 꼭 참석할 이윤 없는 일.
고작 나흘 뒤에 오라면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전례가 없던 일이라 더 빨리 황궁에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예. 일정을 조정하기 힘드십니까? 드레스는 황궁에서 구비한 것으로 갈아입으셔도 됩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갈 수 있어요.”
진짜로 그냥 다과회를 여는 게 목적의 전부였나?
마탑의 생활이 즐겁다고 해도 고작 하루 시간을 못 낼 그녀는 아니었다.
전령이 물러가기 전, 루키우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나도 갈까?”
“루키우스도요? 좋죠! 저어, 마탑의 마법사 루키우스도 참석 명단에 가능한지 확인 부탁드려요. 회신은 전서구로 보내도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나흘 후.
루키우스가 오면 좋다. 아니, 꼭 와 주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을 거라는 이상한 답신이 왔었다.
‘뭐였을까?’
마탑에도 페이를 위한 드레스룸이 있기에, 외출 준비를 하려고 공작저에 따로 들르지는 않았다. 정 입을 게 없다면 루키우스의 힘을 빌려도 충분하고.
유독 잘 어울리는 하늘색 드레스에, 안개를 표현한 듯한 실크 햇 베일까지 쓴 페이.
청순하면서도 화사한 모습에 루키우스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