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외전1: 가족과의 시간(1)
머리 위엔 샹들리에가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만찬장도 아닌데 하인들이 금 촛대를 줄줄이 날라 오고 있었다.
“연기가 안 나게 조심히 켜게.”
“예!”
촛대의 심지를 곧게 세워 불을 켜는 하인의 손목 각도는 그야말로 절도가 흘러넘쳤다. 초만 천 번 정도 켜 본 사람처럼.
커튼만 열면 환한 대낮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왜 이래….’
예고 없이 클라인 공작저로 온 페이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여기 응접실에서 대접받는 게 처음도 아닌데 너무 긴장들을 한다. 설마, 그건가?
황태자에게 받은 서신을 떠올린 그녀는 괜히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지.
미리 약속을 잡고 그들도, 페이도 마음의 다짐을 하고 나서 보는 자리다.
예고 없이 혼자서 덜컥 와 버린 게 이쪽에 무슨 오해를 단단히 산 눈치였다.
‘틀림없어. 나 모르게 황태자 전하와 언질을 한참 나눈 뒤인 거야.’
“허억….”
“마님!”
그때였다.
열린 문으로, 한참을 뛰었는지 앞머리가 휘어지고 엉망이 된 클라인 공작 부인이 들이닥쳤다.
놀란 페이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지친 공작 부인 역시 부들거리는 팔을 딸에게로 뻗으면서 간곡히 말했다.
“조금… 조금만 기다려 다오, 아주 조금만. 응?”
“네?”
“마님, 진정하셔요. 레이디 모르가나? 사전에 약속이 안 된 방문이어서 준비가 상당히 미흡합니다. 식사 준비는 금세 끝나오니 차를 먼저 끓이겠습니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헐떡이면서도 베린스를 돌아보았다.
“안 돼, 허억. 식사를 제대로 하려면 차는 뒤에 내와야지…. 그럼, 샐러드라도 먼저, 헉, 가져오라고 할까?”
숨이 턱 끝에 차도록 뛰어온 이유가 이거였어?
페이는 응접실에 들어오고 실제로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았음을 알기에 머쓱하기만 했다.
공작저에서 식사를 안 하든, 다과 대접을 못 받든, 클라인 공작은 물론 공작 부인을 비롯해 아무도 없어서 그냥 돌아가더라도 페이에겐 딱히 큰일이 아니다.
다음에 내킬 때 다시 오면 되니까.
하지만 눈앞의 공작 부인에겐….
‘가슴을 쥐어뜯을 만한 일이 되겠지. 딸이 애써서 찾아왔는데 하필 그때 자리를 비웠노라고 말이야.’
모든 일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페이는 친모의 고단한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는 중이었다.
가짜 공녀의 이간질에 넘어가 흘겨보고 노려봤던 아이가 내 아이.
진실이 어렵사리 밝혀진 뒤에도, 차마 돌아오라고 말 붙이기도 어려운 타인.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며 얼굴 한번 편하게 쳐다보기도 힘들어하는 공작 부인의 모습….
가슴속에 느껴지는 비애가, 친모를 향한 연민임을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안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흐른 뒤에야 페이는 클라인 공작 부인의 절절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아픔이 흐릿해져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도 나이를 더 먹어서 너그러워진 걸까?
당장 입을 열어서 눈앞의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 왔던 말을 할 수는 있지만….
“…….”
“…….”
“…….”
부, 부담스러워!
시녀 베린스는 물론이요, 초를 다 켠 하인들도 페이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기도 하거니와 지친 공작 부인이 안쓰러웠기에 페이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단 앉으세요.”
말해 놓고 나니 더 이상했다.
이 집 주인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라서 말할 주체가 아닌데.
그런데, 클라인 공작 부인은 그 한마디에 눈물을 금세 글썽이며 말했다.
“흑…. 그래.”
“마님, 닦으셔요.”
베린스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은 클라인 공작 부인의 눈초리가 홱 돌아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서둘러 식사를 했으면 하는 무언의 압박이겠지.
얼마 되지 않아 다이닝 룸으로 들어선 페이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아니….”
손님맞이 식탁이, 보통의 식사 과정보다 더 화려하고 공들인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대체 이건…?
응접실의 촛불 켜기는 전조에 불과했다고 할 정도로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한 해 마지막을 기념하는 정찬 식탁을 눈앞에 뒀으려니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특히나 요리사가 칠면조 구이 접시 뒤쪽에 길게 꽂아 놓은 깃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너무 화려하잖아.
‘저거…. 칠면조 깃털 아니고 공작새 깃털 아니야?’
왠지 웃음이 나오려고 했으나, 페이는 시녀장의 손길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천천히 먹으… 흐윽, 먹도록… 해요….”
“…울지 마세요.”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되었던 걸까.
클라인 공작 부인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페이는 여기서 쉽게 돌아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 버렸다.
루키우스하고 같이 나왔다가 그는 마탑으로 먼저 돌려보내고 나만 잠깐 왔다 가려던 건데.
‘그라면 내가 늦어도 이해해 주겠지만 말이야.’
식사 시간은 생각보다 상당히 길었다. 페이는 소식가에 속했고, 연구로 바쁠 땐 한 그릇으로 해결 가능한 그라탕이나 라이스 종류를 즐겨 먹었다.
이 자리에선…. 그릴 요리만 한 세 번 본 것 같다.
속이 더부룩해.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 걸까?
‘어, 언제 끝나는 거야! 배가 불러서 안 먹겠다고 하면 울음을 터트릴 기세고…!’
겨우 눈물을 그친 공작 부인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통이라 곤란하기 짝이 없다. 하필 마음이 약해진 뒤라서 포크 내려놓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강제로 소화를 시키는 마법은 없는지 머릿속을 진지하게 뒤져 볼 때였다.
“실례. 티아나가 정말로 왔는가?”
“카셀!”
“아…! 오라버니.”
급하게 들이닥친 카셀의 모습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디저트 코스의 기나긴 초입으로 막 들어선 상태라 정말 힘들었는데!
페이는 그의 힘을 빌려 성대하기 그지없던 식사 자리를 간신히 파할 수 있었다.
뜨거운 차는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여서 물을 조금씩 마시는 동안, 카셀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혼자 그 많은 음식을 다 맛봤다는 거니? 고생했구나.”
“휴우, 말도 마세요. 공… 그분께서 눈시울을 붉히고 쳐다보는데 그만 먹고 싶다고 어떻게 말해요. 너무 죄스럽더라고요.”
공작저에서 페이와 사이가 제일 좋은 카셀이 오고 나서야, 공작 부인은 안심하고 잠깐 자리를 비웠다.
선약 없이 들이닥친 이후 계속 대접을 지휘하느라 지치셨겠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편하게 대해 줘도 나는 정말로 괜찮은데.
카셀이 쓰게 웃었다.
“나도 비슷한 순간이 있어서 네 마음을 안다.”
“오라버니, 공작 각하하곤 싸워도 공작 부인 앞에서 언성 높이기는 곤란하죠?”
“말도 마라. 변방에 다시 가라면 얼마든지 가겠는데 어머니와는 힘들다.”
“…….”
페이가 모르는 곳에서, 지나간 그 일을 두고 어지간히도 다퉜겠지. 구태여 말로 전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짐작할 이야기들, 이젠 바래진 과거의 기억.
“저, 좀 걷고 싶어요.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밤엔 숨쉬기도 힘들겠어요.”
“알았다, 같이 가자.”
두둑해진 배를 안고 일어선 페이는 카셀의 인도를 받아 산책을 하기로 했다.
오늘 밤에 잠은 무사히 잘 수 있으려나? 어느 정도나 걸어야 소화가 될 건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
낯익은 풍경이 보이자, 그녀는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셀피아 하우스가 있었던 공간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루키우스의 귀띔으로는, ‘그 애’가 공작저를 완전히 떠나기 직전까지는 놔뒀다는데. 그 이후에 건물을 때려 부순 듯싶었다.
이전에 스치듯이 지나갔을 당시엔, 안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었다.
페이는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오라버니, 저요…. 실은 이곳에 운디네를 한 마리 보낸 적이 있어요. 안 될 일일 건 아는데, 저도 상황이 답답하니까 할 수 없이….”
“쉬잇. 저쪽에 가서 이야기할까?”
카셀은 뒤따르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의 말을 막았다.
그가 전에 있었던 일을 죄다 말하지 않는 것처럼, 페이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엔 묵묵히 보아 넘겼던 광경도 시간이 지나 달라지니 말하고 싶어진 거겠지.
그러나 이건 밝혀지면 페이의 흠이 될 만한 일이다.
옛 셀피아 하우스가 있던 자리가 보이는, 조금 먼 곳의 정자에 앉은 남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말한 운디네를 본 적이 있다.”
“네? 정말로요?”
“하필 저곳이 작은 연못이 있던 장소라 떠돌이 정령인가 싶었지. 그냥 베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만뒀었다. 운디네가 훔쳐보려던 대상이 내 마음에 영 걸리던 사람이라 말이다.”
“와…!”
세상에, 운디네를 공작저로 보낸 건 그야말로 초기의 일인데!
카셀의 예리함에 페이는 입을 다물 길이 없었다.
그가 작정하고 페이를 밀어냈더라면 둘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다.
정말로.
“…나중엔 이런저런 일이 겹쳐서 운디네를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칼을 들고 왔었다. 그런데 이미 사라지고 없더구나. 겨울이 되어서 그런 줄 알았다.”
“저도 그땐 햇병아리 마법사라서요. 저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진 정령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가 없어서 소환이 해제되었어요.”
“그래, 그 귀여운 짓을 해서 얻은 소득이 있었니? 공작저로 하급 정령을 보내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구나.”
카셀의 가벼운 농담에, 페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진지하게 생각해서 행한 일인데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다. 무슨 배짱으로 수도의 공작저에 운디네를 당당하게 보낸 것인지…!
“조금의 희망은 얻었어요. 제가 살았던 삶과 다르게 흘러가는 양상이,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거든요.”
“사람이 살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한 번은 있겠지. 나는 네가 일으킨 기적이 정말이지 믿기 힘들 정도로 감사하구나.”
“…오라…버니.”
“이 평온한 일상을 모르고, 변방의 기사로만 살다가 돌아왔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일 거다.”
“오라버니!”
카셀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 애’가 수도에서 내쫓긴 뒤에도, 목숨이 거둬진 후에도 미사여구나 조롱 따위로 말을 늘리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는 루키우스 및 카셀에게는 편하게 이야기를 해 왔던 거다. 늘 올곧고 정도를 지키려는 사람이라서.
지금, 그의 진심을 듣는 순간이 감동적인 건 그간 겪어 온 일들 때문이지….
“다시는 이런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 나뿐만 아니라 너와 멀어졌던 다른 가족들도 네가 받아들여 줄 수 있다면 말이다.”
페이는 벤치에 앉아서 한참 후에야 겨우 대답했다.
“…저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나절이 아니라 최소한의 방문 단위를 하루로 만들고 싶어요.”
그건, 클라인 공작저로의 귀환을 천명한 거나 마찬가지의 대답이었다.
앞으로도 마탑에서 지낼 거라지만 공작저에도 일정한 날짜 이상은 기거하겠다는, 그런 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생각은 했었는데, 이 상황이 오니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와 버렸다.
마탑에서 그녀를 기다릴 루키우스에게 마음으로 사죄한 페이는 깜짝 놀랐다.
“아…!”
곁에 있던 카셀이 여동생의 손을 꼬옥 쥐며 되묻는 게 아닌가?
“정말이냐?”
“…네. 제가 이곳에 손님으로만 계속 드나들면 그것도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독립해서 떠나는 순간이 또 오더라도 정할 건 정해 놔야죠.”
독립 운운은 루키우스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나, 명확하게 표현하진 않았다. 나중에 이 모호한 언급 때문에 그가 얼마나 큰 고비를 겪을지, 페이는 이때는 알지 못했다.
“기뻐할 사람이 많겠구나.”
“에이, 몇 사람 안 되잖아요.”
“그런 말 말렴, 페이. 으음…. 너만 좋다면 본채에 널 위한 방을 만들어 두겠다. 의무로 오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킬 때 언제든지 와도 좋다. 누구든 너를 환영할 거란다.”
예전에 ‘그 여자’가 본채에서 쓰던 방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문을 뜯고 지금까지 달지 않은 상태였다.
내부만 수리해서 사용인들의 준비실 겸 쉼터로 만들어 버렸지.
당연한 이야기나, 거길 재활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셀은 셀피아 하우스가 한때 존재했던 터를 바라보았다.
기둥 하나는커녕 주춧돌도 안 남은 모습이 통쾌하다. 남은 흔적이라곤, 연못이 있던 물자리가 전부이지 않은가.
긴 침묵 끝에 저 하우스를 부수는 날이 왔는데, 그때 철거 명령을 받지 않은 사용인들이 우르르 나섰다.
이유는 단 하나. 제발 자기에게 하우스를 없애는 곡괭이질 한 번만 하게 해 달라고 비는 기현상이 벌어졌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이를 가는 대상으로 전락한 도트리샤 카리스!
가짜 공녀였다는 게 알려진 뒤라도 은혜를 입은 축에선 험한 실력 행사에 나서기 망설여질 텐데.
오히려, 측근인 시녀들이 내가 먼저 한 군데라도 부수겠다고 주장하고 난리였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