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집으로
이 년 후, 평화로워진 제도.
봄은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이 당연하게 찾아왔다.
작년 늦여름에 무시무시한 마룡이 클라인 공작저 하늘을 뒤덮는 일도 없었고, 황궁을 포함하여 마탑, 제도 일대는 늘 고만고만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참 좋은 나날들.
그 볕 좋은 오후에, 창가에 앉아 한숨을 쉬는 여인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일정이 없는 날에는 공작저 본채에서도 정문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끄트머리의 빈방, 이곳으로 와서 누군가의 방문을 멍하니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되고 말았다.
엉덩이 밑의 방석이 뜨거워질 정도로 앉아 있건만 조용하다.
“하아….”
“마님. 그만 쉬셔요, 이 시간 이후로 그분께서 들른 적은 없습니다. 조만간 다른 경로를 통해 초청을 타진해 보겠습니다.”
베린스가 눈치 빠르게 달랬으나, 클라인 공작 부인은 그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 더 기다려 주면 약속이 없는 날인 오늘에 변덕을 부려서 와 주지 않을까.
지금껏 일어난 적 없던 기적을 바라는 건 욕심이려나.
기다리다 지친 공작 부인이 힘없이 자리를 떴을 때는, 노을 진 저녁 하늘을 지나 깜깜한 밤.
식사 시간을 한참 넘긴 때였다.
한편 그 시각.
황태자 실라스는 끝없이 밀려드는 초대장 때문에 난처한 지경이었다.
“또 왔는가?”
“송구합니다.”
초대장의 내용들이란 뻔했다.
그의 곁에 누구를 들일지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마지막 기회를 노리려는 수작들이겠지.
“하아….”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공식 석상에 복귀한 뒤로 온갖 음모를 파헤칠 때보다 지금이 더 버겁다면, 배가 부른 투정일까.
그는 자기의 거취를 올해 안으로는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늘 마음을 다져 놓고는 있었으나, 요즈음 자꾸 떠오르는 인물이 있긴 했다.
일전에 허무하게 떠나보냈던 그녀를.
“…전하?”
그러나, 실라스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한 색깔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사사로이 불러들이게 되면 세간의 입방아에 또 다칠까. 그대로 놔뒀다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을까.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고 같은 일을 반복하려 들면 안 될 일.
뭔가 뾰족한 수가 없을지 생각하는 와중에 떠올린 사람은, 또 한 명의 공녀였다.
끝없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영리하게 살아남은 그 공녀가 이번에도 답을 내주지 않으려나?
때마침, 그 공녀의 지위를 슬슬 공식화하자는 여론도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결심 없이는 추진하지 않으려는 게 실라스의 생각이었다.
본인의 의향을 먼저 아는 게 순서겠지.
‘조만간 불러서 의중을 물어봐야겠군. 그리고, 나의 그 고민도 맡겨 봐야겠어…. 제국의 큰 기둥이 된 새로운 공녀에게 말이야.’
어느새 실라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튿날.
마탑으로 드디어 놀러 온 라파엘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부산을 떨어 댔다.
“오, 선대 마탑주 바로아의 방은 과연 다릅니다.”
“보면 알기는 하냐?”
라파엘은 왜 루키우스가 툴툴대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뭔가를 불쑥 집어 들었다.
“이건 또 뭡니까? 안에 뭐가 꿈틀대는 느낌인데요?”
“아니… 야! 멈춰, 내려놔!”
있는 줄도 몰랐던 시험관 안의 용액이 출렁거리자, 루키우스는 당황하다 못해 고함을 질렀다.
위험한 느낌은 없으나 다른 존재도 아니고 그의 사념체가 만들어 놨던 물건.
잘못 건드리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더 곤란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라파엘은 눈썹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예민합니까, 루키우스? 선대 마탑주는 또 쪽지를 남기고 방랑을 갔다면서요. 당신이 이 방 관리자라도 됩니까?”
“내려놓으라고 했다!”
“마탑의 3인자에서 2인자로 올라갔으면 기뻐해야지 성질을 내는 이유가 뭡니까?”
열어 둔 문이 살짝 밀리면서 페이가 들어왔다.
“또 싸워요? 하여튼 둘만 붙여 놓으면 늘 그림이 똑같네요. 죄송해요, 못난 꼴을 보였어요.”
“아니에요. 재밌는걸요?”
새로운 동행, 랏셀 공녀이자 마뉴엘라가 빙긋이 웃었다.
호기심 많은 어린 마법사들이 제국의 공녀님을 보고 싶다길래 부탁했더니, 마뉴엘라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수락하고 거길 돌고 와 주었다.
특별한 선물, 초콜릿을 묻힌 과자까지 함께.
페이는 미리 닦아 둔 의자를 끌어 당겨 주고 같이 앉으며 입을 열었다.
“여긴 선대 마탑주, 바로아 님의 방이에요. 갑자기 떠나시고 나서 현 마탑주 님도 그렇고, 많이들 아쉬워했더라고요.”
“신기하네요.”
마뉴엘라는 마법사의 방이 처음인지 이곳저곳 살펴보기 바빴다.
“참, 아까 동료들한테 과자 나눠 주셔서 고마워요? 역시 공녀님은 다르다니까요. 다들 공녀님 손을 잡아 봤다고 호들갑 떠는 모습이 웃겼어요.”
라파엘이 슬그머니 둘 사이에 서서 우쭐거렸다.
“아름다운 공녀님을 눈앞에 두고도 다른 공녀님을 또 찾다니, 마법사들도 은근히 바보입니다.”
“…….”
페이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녀-
모건 르 페이, 과거의 이름은 모르가나. 지금은 레이디 모르가나이기도 한 그녀가 진정으로 누군지 많은 이가 알고 있었다.
시간은 무엇이 진실이고 주목해야 할 일인지를 제도 내에 널리 퍼트렸다.
개중에는 그녀가 황궁을 나다닐 때, 어느 부티크에 예약한 물건을 찾으러 갈 때, 일부러 기다렸다가 노골적으로 쳐다보거나 우연인 척 친분을 맺으려 하기도 했다.
당연히 페이의 진짜 신분이 무언지 대놓고 떠보려고 하는 자도 있고.
괜찮았다.
클라인 공녀로 돌아가진 않았으나 제도 내 유력 가문에선 가짜 공녀 사건을 꽤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지난겨울, 그- 평생토록 언급하고 싶지 않은,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은 사건 뒤로 말이 더 심하게 나돌았댔지.
페이는 가십거리에 미친 그들을 탓하거나 꾸짖기는 원치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들 중, 특히 여기에 있는 페이의 친구들은 열렬히 환영해 줄 거다.
클라인 공녀의 늦은 귀환을.
‘근데 확실히 어린 영애들이 귀엽기는 해. 가끔 황궁에 가면 날 보고 입술을 뻐끔거릴 때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다니깐. 이래서 데뷔탕트가 매년 열리나?’
“하… 허어… 다행이네. 겨우 처리 끝났다.”
“루키우스? 그거 뭐예요?”
루키우스는 라파엘이 들고 있던 시험관 안을 다 비우고는 투덜댔다.
“끔찍한 거였어.”
“네?”
“…그만두자.”
억울함을 참고 있던 라파엘은 냅다 고자질했다.
“어이가 없습니다, 페이. 자기도 여기선 남이면서 남의 물건을 만졌다고 나더러 버럭버럭 성질을 부리지 뭡니까?”
“아하하, 그랬어요?”
뭐가 있었나?
루키우스가 바로아와 동일 인물이란 사실, 지금까지 안 들켰…겠지? 응.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는 하나, 세월이 지나가면 최소 두셋 정도는 알지 싶었다.
몰라, 그때 가 보고 결정하자!
페이는 여전히 그녀의 곁에 있는 루키우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온 비둘기가 뭐래요?”
라파엘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 말하는 겁니까?”
“까마귀가 언제부터 비둘기였어요?”
그는 바로아의 책상에서 깃털 펜 하나를 꺼내 팔랑거리는 시늉을 했다.
“페이, 당신은 모릅니다. 기사들끼리 신경전이 얼마나 심한 줄 압니까?”
“네?”
그의 엄청난 수다를, 페이는 부주의로 허락하고 말았다.
“전에 한 종자가 실수로 숯이 가득 든 자루를 성벽 위에서 떨구는 바람에 연무장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필 그때 협력 요청으로 왔던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여기에 있으면 비둘기도 까마귀가 되겠다고 아주 그냥….”
“그만, 그만. 정신 사나워.”
루키우스가 끊어 주는 통에 페이는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어!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네요? 랏셀 공녀님, 우리 카페테리아 갈까요? 황궁만은 못해도요, 여기 커스터드푸딩 진짜 맛있어요!”
마뉴엘라는 빙긋이 웃으며, 페이의 빈 왼쪽 팔을 자기 손에 살짝 걸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기회가 올 때 놓치면 곤란하다.
“좋아요.”
“아니… 잠깐. 왜 셋이서만 화기애애하고 나한테는 아무도 권유를 안 합니까!”
“심심하면 아스테인 황자님 모셔 오지 그랬어요. 자, 가요.”
“페이! 라… 랏셀 공녀님! 이러시기입니까!”
다정하게 뭉친 셋이 복도를 차지하며 걸어가자 라파엘은 끼어들지도, 앞질러 가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바로아의 방을 빠져나왔다.
탁.
저절로 닫힌 바로아의 방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통.
루키우스가 방금 버린 검은 용액이, 스멀스멀 대기로 빠져나와 어떠한 형상을 그리고는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은 드래곤과 퍽 닮았으나 정확하게는 어느 드라칸의 머리와 얼굴 생김새를 완벽하게 흉내 낸 모습이었다.
마탑의 어디선가 쿨쿨 자고 있을, 그 녀석을.
“흐응….”
라파엘과 마뉴엘라가 돌아간 다음 날, 페이는 일기를 쓰고 있었다.
전에는 없던 새로운 변화였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을 거리는 상당했다. 심지어 마뉴엘라가 마법사들에게 나눠 줬던 과자 모습까지 묘사하는 와중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인데도 방금 겪은 듯이 생생하다.
다음에도 또 초대해야지.
「주인님, 그분이.」
실피드가 재빠르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 응.”
펜을 놓고 일어서자마자, 루키우스가 노크하더니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손님 둘이 오느라 미처 꺼내지 못한 서신이 들려 있었다.
봄.
어느새 바뀐, 화려하고 두근거리는 데뷔탕트의 계절-
루키우스는 페이의 새싹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 예상대로일 거야, 페이. 봄의 데뷔탕트에 왔으면 한다는데….”
“…데요?”
“좀 특이하네. 서신에 네 이름이 적히진 않았어. 그냥 황궁의 아카드니아 홀에서 열리는 데뷔탕트에 와 달라는 문구만 있어.”
황실에서 보내는 서신에 실수가 덧붙여질 리가 없다. 몇 사람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보내지는 거니까.
서신을 조용히 받아 든 페이는, 그의 말대로 이름 대신 대명사만 써진 내용을 훑고는 웃었다.
“정말 귀신같은 분이라니까. 내가 ‘이때쯤으로 할까’라고 생각한 걸 어떻게 아셨담?”
“마음을 정한 거야?”
그녀는 서신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간, 죄인처럼 구는 클라인 공작 부인을 몇 번이나 만났다. 공작과 함께였을 때도 있었고, 단둘이서만 보았을 때도 있었다.
공작 부인과 모리스의 과거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루키우스의 예언도 적중했다. 지금까지는.
뭐… 그편이 낫지, 난 괜찮아.
그녀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나날들.
‘내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모르고, 마법에만 매달린 시간도… 소중했어.’
작년이 유독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했을 따름이었다.
재작년의 끝은 겨울임에도, 여름까지 일어나고 휘몰아쳤던 일들을 생각하면 가을과 겨울이 참 짧게 느껴졌다.
그보다 더 신기한 일….
‘나, 잊고 있어. 어제보다 오늘, 아마도 어제보다 그 전날에 더 훤하게 알았을 얼굴이… 날 그토록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을 네 얼굴을 잊고 있어. 네가 내게 던졌던 말들도. 너와의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어….’
페이도 사람인지라, 클라인 공작 부인이 특유의 어떤 표정을 지으면 가끔 도트리샤를 떠올리고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실은 둘이 그다지 닮지 않은 남남임을 알면서도-
그런 일도 이젠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팠던 과거를 통째로 도려내려고 발버둥 친 시간이, 너무나도 희미한 옛일로 바뀌었다. 심지어는 혼자만의 환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난… 이러다 어느 날, 정말로 너를 잊게 될 것 같아. 길고 긴 시간이 흐르면 나도 어떤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한 적이 있다고 떠올리게 될까?’
생각이 끝나고 가고 싶은 곳이 떠올랐다.
“가 볼까요….”
“응?”
눈을 뜬 페이는 퍽 명랑하게 말을 붙였다.
“봄이잖아요. 루키우스, 우리 외출해요. 어디든지요.”
“좋아!”
그와 그녀는 나란히 손을 잡고 마탑을 나서서 봄의 기운을 만끽했다.
그 나들이의 끝은, 익숙하되 꽤 오랜만의 방문지였다.
그녀가 태어났으되, 여섯 살의 작은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집으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