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내쫓기는 자
도트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해야 해, 꼭!’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작 부인의 침실에 들러 간청한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허락이었다.
잠시나마 자선 모임 따위와 멀어지게 된 나날을 기뻐하는 공녀가 나가자, 공작 부인이 중얼거렸다.
“한심하긴.”
“마님….”
친딸을 향해서라기엔 애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
최근은 물론, 그전 일을 쭉 돌이켜 보고 있던 베린스로선 예전의 그 추측이 옳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 걸까?
클라인 공작 부인이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며 말했다.
“베린스, 넌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을 잘하기에 믿는다.”
“네…?! 네…!”
“저 리그레아 후보가 선발전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제멋대로 돌아오지 않도록 뒷일을 잘 여며 놓으렴. 한번 손댄 일은 끝까지 해야지?”
베린스는 잠시 떨고 말았다.
우리 티아나, 라고 늘 불러 주었던 아가를 대하는 듯한 말투는 어느새 사라졌고. 차디차게 공녀, 라고 부르던 호칭도 사라졌다.
바로 지금, 그녀의 귓가에서.
설마 그 괴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맙소사…!’
그러나, 베린스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연유가 무엇이 되었든 공작 부인께서 명하시는 일은 무조건 따르는 게 순리. 생각은 나중에 이어서 해도 된다.
얼마 후, 클라인 공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황궁의 아카드니아 홀에 도착했다.
홀 안에는 아리따운 리그레아를 꿈꾸며 몰려온 귀족 여성들로 가득했다.
한 명 뽑는데 무슨 후보를 이리도 많이 뒀는지, 도트로선 혀를 차고 싶을 따름이었다.
‘흥. 우리 어머니께서 웃으면서 그러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나로 내정해 두셨겠지. 너희들은 짐 싸들고 떠나갈 준비나 해!’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시종이 외치자, 홀에 모인 영애 중 황궁에 처음으로 와 보는 이들이 흥분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와…!”
“저, 저분이 실라스 황태자 전하시라고요?”
“조각상 같아요!”
“조용, 정숙하세요! 어디서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함부로 떠들면 선발전에서 제외하겠습니다!”
황궁의 사제가 호통을 치자 도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금 당장 내쫓으라고. 봐줄 거 없다니까? 어디서 저런 교양 없는 것들이 나대는 거람. 실라스 전하는 내 거야. 나와 이듬해 봄에도 춤을 추고, 그때 약혼… 아니, 결혼을 발표할 거라고!’
행복한 앞날을 꿈꾸고 있자니, 장미향이 코끝으로 들어오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꽃향기는 나와 잘 어울리지.
도트가 느긋한 웃음을 짓고 막 뺨을 붉히려 할 때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 앞에서는 늘 침착을 고수하는 실라스가 입을 열었다.
“리그레아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 제국의 모든 여성 후보들께 경의를 표하는 바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하는 일은 아름다우니, 어떤 결과를 얻더라도 좌절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스스로를 지키기를 바라오.”
“아아….”
“멋져!”
사제가 그렇게 주의를 줘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작 몇 초 만에 찬란함을 머금은 황태자에게 반한 이들이 홀 안에서 속출했다.
어림도 없지, 고얀 것들!
도트는 눈을 새침하게 뜨며, 실라스가 그녀가 선 쪽을 향해 의미 있는 눈짓을 보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황태자 전하라면 당연하잖아? 이 나와 인연이 얼마나 많은 분인데.
이윽고 실라스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옅은 금빛이 화사하게 부서지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에 도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만 더, 시선이 이쪽으로 오면 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 있어…!
“왔군, 소개를 부탁하지.”
“네.”
…어?
도트는 짧고도 경쾌한 여성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방금까지 뜨고는 있되, 현실이 아니라 꿈을 헤매던 눈을.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큰 바구니를 들고 온 페이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리그레아 후보 여러분. 저는 황태자 전하의 부하이자 드라칸 라이더인 모건 르 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황태자궁의 파티시에가 특별히 구운 마들렌이니, 드시고 모두 힘내 주세요. 모든 과정을 수료한 리그레아가 오늘의 여러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정하면서도 간결한 소개와 격려가 끝나자, 홀 안에 박수 소리가 넘쳐흘렀다.
“와…. 멋져요.”
“황태자 전하의 부하는 과연 기품이 있네요.”
“우리도 노력하면 언젠가 저분처럼 황태자 전하의 곁에 설 수 있겠죠?”
특별히 새로운 말도 아닌데 왜들 감격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저것은, 모르가나는 황태자 전하의 연인이 아니란 말이야!
도트는 잔뜩 약이 올랐고, 바구니의 마들렌도 오기로 집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기분으로 시작한 선발전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사제가 시키는 경전 읽기도, 묵상도, 꽃 다듬기도 전부 최악의 평가를 받은 도트가 돌아갈 곳이란 한 군데였다.
선발전은커녕, 예선에서 조기 탈락한 도트가 힘없이 공작저로 돌아온 날.
살얼음과도 같은 표정을 지은 클라인 공작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리그레아 선발전에 참여한 모든 후보 중 첫 탈락자 중에서도, 네 평가가 최악이더구나.”
도트는 왼쪽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 너무 억울해요. 정말….”
“제도 어디를 가도 너에 대해 좋은 말 한마디가 들려오지 않는다. 대체 넌 뭘 하자는 작정이지?”
“어머니이….”
우는 것 이외에 가능한 일이라곤 없었다.
도트는 품위고 뭐고, 가져갔던 가방을 집어던지고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서럽다.
공녀인 자신이 가문의 품위와 위신을 조금 실추시켰기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감싸 줘야지! 그게 귀족 아니야? 이 마음에 안 드는 짐가방도…. 내가 아니라 시녀가 들어줘야 하는 거고!
부들부들 떨며 우는 도트를 향해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은 말이 쏟아졌다.
“내 큰아들 카셀은 데뷔탕트를 치르기 무섭게 기사가 되어 변방에까지 가 무수한 임무를 해냈다. 둘째 아들 모리스도, 나태한 옛일을 반성하고 마구간의 잠도 마다하지 않고 기사가 되었어. 너는 무엇이지?”
“어머니, 저는. 그게… 저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처럼 귀하디귀한 공녀에게 왜 남의 고생을 가져와서 들먹이냐고. 왜!
도트의 연하늘색 눈에 억울함을 넘어선 악독함이 들어찼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너란 아이는 정말로 답이 없구나. 마침 지방 영지에 네가 갈 만한 자리가 하나 있다. 가서, 인정받아라. 네 힘으로. 그전에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라. 마지막 기회란 것도 끝났으니 알아서 해!”
“네…?”
무섭다 못해 연을 잘라 버리는 매서운 말투에, 도트는 울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해도 억울해 미칠 지경인데 끝나긴 뭐가 끝나…?
“내일 새벽 마차로 떠나라. 사람이 인정이 있지, 밤길 마차는 위험하니 영 내키지 않는구나.”
“어… 어머니…?”
“가자꾸나.”
“…….”
이상하다. 모든 게, 돌아가는 일이 수상쩍다 못해 무서워. 어머니께서 내게 왜 이러시지? 왜…?
도트는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하녀들이 다가와 땅에 떨군 가방을 들고 그녀를 위로해 침실로 데려가는 통에 잠시 그 일을 잊어버렸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리그레아 선발전의 말도 안 되는 수업을 받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는데, 지방 영지로 냅다 떠나라니?
도트는 피곤에 지쳐 저녁에 잠이 들다 말고 생각이 나 놀라서 깼다.
“누구 있어? 누구 있냐고!”
“왜 그러셔요?”
침실 문을 열어 보니, 시녀들은 온데간데없고 에이프런에 달린 프릴이 유독 거슬리는 하녀 한 명만 있었다.
할 수 없나.
“클라인 지방 영지가 그… 퀘이사 백작령보다는 덜 위험한 곳 맞지?”
하녀는 무슨 말을 하냐는 투의 눈빛으로 훑어보다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위험이요? 글쎄요, 저는 제도에서 태어나서 제도에서만 살아서 잘 모릅니다. 거기를 오간 기사님들 말에 따르면 마물은 몰라도 큰 짐승은 많다고 해요. 그리고 원래 봉토가 넓어서 뭐든지 편차가 크다고도 했고요.”
도트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기억을 더듬었다.
클라인 지방 영지의 중심부는, 제도만은 못해도 문화며 교통이 괜찮다고 들었어.
거긴… 여기만큼 소문이 퍼지진 않았겠지. 여기보다는, 나보다는 다들 신분이 낮으니까 머리를 조아릴 거고. 나는….
“됐어….”
힘없이 문을 닫은 도트가 어렵사리 눈을 떴을 때는 놀랍게도, 침대 위가 아니라 덜컹대며 흔들리는 마차 위였다.
돌부리에 마차 바퀴가 걸렸는지 엉덩이가 욱신거리는 바람에 깬 도트는 경악했다.
“이, 이게 뭐야!”
처음엔 납치된 줄 알고 마차 창문을 연신 탕탕거렸으나, 마부는 곧 멈추고 창을 통해 말을 해 주었다.
“공녀님! 우린 클라인 지방 영지로 가는 중이고 갈 길이 멉니다. 말을 바꾸는 중간 지점까지 못 가면 노숙을 해야 하는 신세니 서둘러 가겠습니다. 그럼, 위험하니 안의 손잡이를 꼭 잡으십시오!”
그게 아니야…!
‘이 나를, 공녀인 나를 어떻게, 자고 있었던 나를 짐짝처럼 들어서 마차에 옮길 수 있어? 내 옷은, 패물은, 리본은 제대로 챙겨서 가져온 건지도 몰라. 난 어제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고 있었단 말이야!’
하녀에게 지방 영지의 사정을 묻고 잠들 때만 해도, 도트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아무 준비도 못 하고 지쳐서 잠든 가엾은 딸을 보면 클라인 공작 부인이 용서해 줄 거라고.
그간 아내의 패악을 지켜보고 있던 공작이 와서, 우리 티아나가 너무 지쳤을 테니 좀 쉬게 해 주자고.
그 꿈이,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광속으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차라리 뛰어내릴까?
마차의 문은, 안의 잠금쇠를 도트가 직접 닫고 걸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만 풀면 문을 열기도 식은 죽 먹기였다.
도트는 창으로 다가가 두 손을 걸치고 바깥을 내다보았다가 기겁했다.
“히익…!”
하필, 낭떠러지를 옆에 바짝 둔 길로 달리고 있다니! 내렸다간 곧바로 나가떨어질 게 뻔하잖아?!
마부에게 고함을 칠 겨를도 없어서, 도트는 떨리는 손으로 쿠션을 잡아 얼굴을 파묻고 가는 경련을 참아 내기 바빴다.
두렵고 지치고 울화가 치밀어도 시간은 흘렀고, 지친 도트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클라인 지방 영지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강 정리한 그녀는 내리기 전에 결심했다.
‘여기서만큼은 공녀로 보이겠어. 좋아…!’
그리고 도트의 결심은 눈앞에 보이는 허름한 건물을 보자마자 또 부서졌다.
멀뚱하게 선 그녀를 향해, 마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