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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어렴풋이 눈치를 챘어도 알고 싶지 않은 기분 (131/148)

131화 어렴풋이 눈치를 챘어도 알고 싶지 않은 기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무 막대와 통이 도트의 눈앞에 놓였다. 슬쩍 보니, 통 안에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수건과 걸레가 들어 있었다.

왜 이 더러운 것들을 내 코앞에 두라고 하신 걸까? 난 싫어, 싫단 말이야.

“네 명예는 네 손으로 직접 복구하렴.”

“어… 어머니?”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리그렛 하우스에서 청소하도록 해. 사용인들이 같이 가 줄 테지만, 네 일을 대신해 주는 일은 없을 거다. 네가 철저히 벌을 받고 반성했음을 공작저 내의 모든 사용인이 알아야 이 어미의 위신도 서겠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공녀인 내가 사용인들이 쓰는 하우스를 청소하라고 하시다니? 거기에, 하필이면 루민트가 머물렀던 장소를…!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엄한 얼굴을 한 채로 일어서서 가 버렸고, 남은 거라고는 주어진 숙제였다.

도트는 거의 내몰리듯 편안한 침실에서 나와 리그렛 하우스 앞에 섰다.

‘커… 커도 너무 크잖아!’

몇 번 이 근처를 산책했을 때는 눈여겨볼 이유도 없었는데, 여기 전체를 청소하라고?

일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못된 꾀부터 머리카락을 삐죽삐죽 뚫고 자라나려고 했다.

어머니께서 내게 청소하라는 벌을 주신 건, 결국엔 반성하고 참회하라는 뜻이잖아.

그거야 기도쯤으로 갈음할 수 있으니까 나 말고 다른 하녀들이….

“그럼 저희는 세 시간 후에 오겠습니다.”

“청소할 때 쓰는 물과 용액은 설명서와 함께 안에 두고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들!”

머릿수건을 쓴 메이드들은 공녀 뒤편으로 우르르 빠지면서 자기들끼리 쑥덕댔다.

“저기 남자 사용인들 숙소인데 냄새 괜찮으려나?”

“으으, 몰라. 난 들어가기 싫어. 청소는 절대로 돕지 말라고 했으니까 우린 가자.”

“그래. 우린 주인마님과 마님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잖아.”

저것들이…! 감히 클라인 공녀인 나를 두고 입을 놀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도트는 막대고 통이고 다 내던지고 싶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난 지금 수세에 몰려 있다.

본능적으로 느낀 그 감각이, 지금 반항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리란 예감을 가져다줬어….

도트는 리그렛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그 넓음과, 엉망진창으로 놔두고 간 침구 등을 보며 울화를 터트리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 내가,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 사용인들이 해야 하는 청소를 대신하는 구박데기로 전락하다니!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 통 안의 수건과 걸레를 휙휙 던지고, 통에 물을 담아서 굴욕적으로 청소하고 있자니 눈물이 나왔다.

“흑….”

이게 뭐야.

봄의 데뷔탕트 때, 황태자 전하의 청혼을 곧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짧은 기쁨의 순간이 떠올랐다.

도트는 훌쩍거리면서 하기 싫은 청소를 간신히 다 마쳤다. 두 시간 만에.

물은 바닥에서 질척거리고, 닦지 않은 곳은 먼지가 하얗게 쌓여 엉망진창이었으나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막대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구석에 쭈그려 앉은 도트를 다른 하녀가 찾으러 왔을 때는, 약속한 세 시간이 아니라 다섯 시간이 훌쩍 흐른 후였다.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눈물이 흐른 자국을 그대로 놔두고 불려간 도트는, 공작 부인을 마주하기 전에 살짝 겁에 질렸다.

‘내가 청소한 걸 부르러 온 하녀들이 죄다 봤을 거 아니야. 엉망진창이라고 또 벌을 주면 다른 하우스를 치우라고 하시지 않을까? 아… 하지만 나, 청소 같은 거 할 줄 모른다고…!’

“네가 청소를 아주 잘했다고 하더구나.”

“네?”

클라인 공작 부인은 예상과는 다르게 무척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양초를 환하게 켜 두어서 방은 마치 한낮과도 같았다.

그녀는 얼굴에 뭔가 말라붙은 자국이 덕지덕지 남은 도트의 안색은 괘념치도 않고 입을 열었다.

“역시 클라인 공녀답게 뭐든 잘해, 당연히 그래야지.”

고생했다든지, 팔이 아프진 않냐든지, 뭔가 더 하실 말씀이 있어야 하는데….

“어… 어머니. 저요….”

“내일부터는 봉사 활동과 자선 모임에 매진하렴. 나는 우리 딸, 티아나를 믿는다.”

봉사 활동에 자선 모임이라니!

듣기만 해도 기운이 쭉 빠졌다.

봉사 활동은 지금까지 권유를 받은 적도 없거니와 할 생각조차 없었다.

자선 모임? 그거, 할 일 없고 착한 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럴듯한 말로 남들 주머니를 터는 행사잖아!

도트는 그날부터 지옥 같은 삶의 구석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자선 모임에 오는 귀부인과 영애들은 하나같이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도트처럼 억지로 얼굴을 내민 경우엔 지루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크리샤 에솔트…!’

썩 좋아하지도, 친하지도 않았으나 이 홀 안에선 그나마 격이 맞는 존재가 눈에 띄었다.

가서 말이라도 좀 붙여 볼까?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가려던 도트는 그러나,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요, 그 소문 사실인가요?”

“네?”

“폐성녀가 죽기 전에 가짜 공녀가 있다고 그렇게 주장했다면서요?”

“어머나 세상에. 부인께서도 그 이야길 들으셨나요?”

“폐성녀가 지목한 그… 가짜 공녀의 진짜 가족이라는 마누스 백작가에선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호호, 죽기 전에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마누스 백작가?

제도 근황에 어두운 도트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적당히 다가선 도트는 귀를 쫑긋거리고 남의 대화를 엿듣는 데 집중했다.

“그나저나 마누스 백작가는 좋겠어요. 고생이야 했다지만 죽은 줄 알았던 둘째를 찾고 작위도 올려 받았다면서요? 영주관도 깨끗하게 수리했고 황실에서 영주성도 새로 쌓아 준다니, 시오넬도 이제 사람 살 만한 영지가 되려나 봐요.”

“네에, 변방이니까 그 정도 챙겨 주는 거야 다들 환영이죠.”

뭐? 그들이, 내가 버린 가족들이 이젠 시오넬 영주가 되었다고?

도트는 자못 놀라면서도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됐어. 난 죽어도 그 시골에 발 들일 일 없으니까.’

지금까지 엿들은 바로는, 카피아가 사망 직전까지 가짜 공녀 주장은 하였으나 다들 헛소문으로 치부하는 듯싶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 소릴 믿기는 왜 믿어? 말도 안 돼.

예전처럼 어깨를 펴고 당당해진 도트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흐음, 크흠. 오랜만이네요? 에솔트 백작 영애.”

“어머… 안녕하셨어요.”

“안녕하셔요.”

“네.”

크리샤는 어여쁜 눈을 살짝 내리깔며 단답형의 인사를 하고는, 부채를 펴고 분홍빛 입술을 감췄다.

쫑긋거리는 입술이 소리 없이 뭔가의 말을 옆의 귀부인에게 속삭이는 모습이 무척 보기 싫었다.

예전 같으면 비꼬아서 사과라도 받아 냈을 텐데, 지금은 그럴 기운도 힘도 나지 않았다.

도트의 요즘 일과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에 해가 뜨기도 전에 자선 모임에 갈 준비를 하고, 점심이라고 나오는 것들은 죄다 입맛을 뚝 떨어지게 하는 메뉴뿐이지. 새 모이만큼 겨우 먹고 나서 이런 장소에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웃고 있으려면 사람이 녹초가 된다.

이 생활을 대체 언제까지 하라는 거지, 어머니는?

“호호호.”

“그래서요, 랏셀 공녀님께서 요즘 빈민가에 나눠 달라고 빵과 치즈를 기탁했다면서요?”

오랜만에 들린, 공녀라는 단어.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도 나를 티아나라고 거의 안 부르고, 짧게 공녀라고만 하셨지. 여기 들어온 나를 두고 공녀라고 부른 사람이 있기는 한가?

도트의 눈빛이 떨떠름해졌다.

기억에 없는걸?

클라인 공녀인 나를 두고 공녀라고 칭해 주지 않는다.

다들, 애매하게 호칭만 쏙쏙 피해 가.

가짜 공녀, 가짜 공녀 하면서 그 말도 안 되는 사건만 가지고 신나게 떠들어 놓고선.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면서도 도트는 어떻게든 힘을 내려고 했다.

‘그들은 시오넬로 가 버렸고, 성녀는 죽었어. 멍청이 모르가나는 자기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난 여전히 공작저의 공녀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 거야?’

내가 마지막으로 행복을 느꼈을 때가 언제지?

모르겠어….

도트는 마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불현듯 어떤 생각이 났다.

공작저에 도착한 도트는 다소 밝은 얼굴을 한 채, 마침 지나가던 베린스를 덜컥 붙잡았다.

“너!”

“…예, 공녀님.”

베린스의 표정은 웃음 한 줄기도 없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으나, 도트는 자기 말을 꺼내 놓기 바빴다.

“전에 어머니가 날 위해서, 제도에 하우스를 한 채 사신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에라도 도망쳐서 좀 숨고 싶었다.

공녀라고 불리나 모두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공작저에서, 시시하고 퀴퀴한 드레스를 입고 다들 쓸데없는 소리나 떠드는 자선 모임에서, 나를 흘겨보는 자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

베린스는 얼른 대꾸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이 조심성 없고 경박한 딸을 찾아 공녀로 만든 이후, 얼마나 심려하고 또 고생하셨는가.

뭣보다 그 하우스를 살피다가 두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목격했던 일은 베린스에게도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사용인을 그만두고 쉴까 생각까지 했던 베린스는, 눈앞의 공녀가 공녀가 아니라면 꿀밤을 한 대 야무지게 쥐어박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른 시녀보다도 지위와 신임을 더 받는지라, 공녀를 두고 떠도는 묘한 이야기도 알고 있으니 더.

솔직히 말해서, 느낌이 이상하다.

지금까지 알아 왔던 클라인 공작가는 그런 흉흉한 소문이 함부로 나돌게 두지도 않고, 그렇게 되었을 때의 뒷수습도 못 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들 계시는 걸까? 설마….

“뭐해? 내가 물었잖아. 아는지 모르는지 어서 대답해.”

이 와중에 공녀는 눈치 없이 대답을 보채기나 했다.

“…예. 하우스 구매를 진지하게 고려한 건 사실이나 성사되진 않았습니다.”

“뭐? 하아, 알았어. 정말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투덜대면서 가 버리는 공녀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미워서, 베린스는 자기 스커트 자락을 꽉 붙잡아야만 했다.

저 밉고도 미운 뒤통수에 대고 날아갈 매서운 욕을 어떻게든 꾹 참느라고.

* * *

타타닷!

오늘은 물론, 요 며칠 사이 자선 모임에서 신기한 말을 연달아 들은 도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게 내가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틀림없어, 이건 황궁에서도 나온 이야기라고 했다.

“들으셨어요? 히논 왕국을 계승한 새 성녀와, 폐성녀 때문에 주신전 처지가 궁색해졌잖아요. 그래서 주신전에서 새 제안을 했대요.”

“뭔데요?”

“고대에는 성녀 말고도 리그레아란 존재가 있었대요. 제도 내의 귀족 여성을 선발해서 신성력이 없는 여성 사제로 키우고 우대하겠다는데요?”

“어머! 성녀님 대신으로요?”

“바로 그거죠. 주신전에서 주관하기 뭐하다고, 황궁의 주신전으로 권한을 넘겼대요.”

“음…. 저는 결혼했으니, 혹시 우리 막내는 후보로 받아 주려나 모르겠네요…? 에이나보다 더 좋잖아요. 성녀는 아니라도 성녀나 다름없는 존재로 격상한다면 못 할 것도 없죠.”

“잘만 하면 정기적으로 황궁에 드나들며 황태자 전하며, 라냐 황비님과 대면도 가능하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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