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가족을 외면하는 이유
그래, 이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 주고 버리지 않고 보듬어 줄 나의 어머니!
클라인 공작 부인은 공녀를 상냥하게 안아 주며 달랬다.
“네 말을 진작에 들을 걸 그랬다.”
“네…?”
“내가 외출을 했다가 몸이 나빠져서 그만 며칠 혼절하고 말았다는구나.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면 네가 많이 놀랄까 봐 목욕도 하고, 머리도 빗고 오는 길이란다.”
기절을 했다고?
그… 그럼, 성녀가 잡힌 일에 대해선 어디까지 아는 거지?
도트는 공작저로 돌아오고 나서 쭉 고립된 상태라, 그 뒤의 정보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기사는 인사조차 없이 늘 트레이를 나르기만 했었고.
“어… 어머니….”
도트는 없는 용기를 짜내어 공작 부인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자, 전에는 통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샛노란 카네이션 생화를 오른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청회색의 드레스와는 묘한 느낌으로 어울려, 웬 꽃장식일까 하고 생각하는 와중에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몸이 허해서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다는구나.”
“네…?”
“우선 가서 앉자. 베린스? 차를 끓여라.”
“네, 마님.”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셀피아 하우스에서 나가고 싶은데.
상황을 모르는 도트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공작 부인이 앉은 소파 옆자리로 가서 기다리는 것뿐.
차 끓이는 시간은 왜 이리도 더딘지!
고개를 돌려서 본 광경은 가관이었다.
포트에 올린 물에 찻잎을 느릿느릿한 손길로 우려내는 베린스의 모습. 왜 서두르지 않는 건지, 할 수만 있다면 뒤통수를 주전자로 휘갈기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저게 진짜 눈치 없이…!’
그새를 못 참고 발끈하는 도트를 향해,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직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못해 진위는 모르나, 언뜻 들리는 말로는 큰일이 났다는구나.”
“네…?”
“황궁에 다녀온 기사단장의 말로는 카피아 성녀를 폐할 수도 있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잠든 사이 폭풍이 휘몰아쳤나 보구나.”
‘모르겠다’는 공작 부인의 말이, 도트리샤에겐 구원의 열쇠와도 같았다.
잠시 침묵을 지킨 그녀는 거의 펄쩍 뛰며 공작 부인의 목에 매달렸다.
“…세, 세상에, 세상에! 어머니, 진짜인가요? 오…! 무슨 일이 이… 있었길래!”
“나도 모르지. 성녀가 온갖 말이며 그간 친분을 맺은 귀족들의 치부를 이것저것 다 드러낸다는데 죄다 허위라는구나.”
“네, 네네…!”
벼랑 끝에서 간신히 희망을 찾은 도트는 그러나, 암흑 길드의 암살자들이 미처 죽이지 못한 자기 가족들을 떠올렸다.
체포될 당시에는 내가 그들의 가족이라 말하지 않았지.
만약…. 그사이에 생각이 바뀌었다면?
‘나, 나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게 해 온갖 고생을 시켜 놓고서 죽이려고 드는 건 안 되지! 그렇잖아?! 난 출세하려고 노력을 했을 뿐이야.’
도트는 자기 생각에 푹 빠진 나머지, 자기가 껴안은 클라인 공작 부인의 몸이 평소와는 달리 대단히 뻣뻣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도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주신전이 협력한 조사는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성기사 단장인 슬로트 경에 이어 주신전의 사제들, 황궁의 주교까지 차례로 외면한 카피아.
주신전에서 성녀의 계획에 가담한 성기사들과 일부 사제들은 자백 혹은 축출 수순을 밟고 있었다.
조사 중에는 오를레앙 공작가와 결탁한 장부와 서신 일부도 추가로 발각이 되었다.
무슨 말로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을 꾸민 원인이, 성녀가 자기 세력으로 주신전을 가득히 채우기 위해서라는 결론이 기어코 내려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칩거 중이었던 오를레앙 공작가는 지원만 했을 뿐 모르는 일이라곤 하나, 어쨌든 사죄를 청해 왔다.
오래도록 준비한 카피아의 모든 계획이 바닷물에 휩쓸린 모래성과도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근에 신성을 얻은 루야 성녀를 친필로 저주한 흔적.
주신전에 반드시 보고하고 써야 하는 신성의 돌을 자기한테 쓴 죄.
무엇보다… 신성의 돌이 준 영향력을 제외하면 신성력을 다 잃은 상태라니!
역대 성녀 중 이런 전적을 가진 이가 없었기에 주신전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더는 성녀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강경파와, 그래도 마지막 예우는 해 주고 벌을 진행하자는 부류.
“들어 보십시오! 하아, 어째서 안 믿는 겁니까. 당신들이 가서 직접 검증을! 아니, 황궁의 주교에게 부탁만 해 봐도 알 거 아닙니까!”
“또 그 소리요?”
조사관은 성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존재를 괴물처럼 흘겨보았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에선 형형한 분노가 들어찬 카피아.
참으로 끔찍한 사람이다.
“클라인 공녀는 카리스 자작가의 막내딸이란 말입니다! 왜 나만 잡아 가두고 그 가짜 공녀는 보이지도 않는 거야!”
조사 과정에서 카피아는 꾸준하게 카리스 자작가의 도트리샤, 일명 트리샤 카리스의 신분 강탈을 주장했다.
그레이스 수도원으로 흘러 들어와서 모르가나란 소녀의 물건을 훔쳐 공녀 행세를 했다면서.
자기 진짜 가족이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알고 증언할까 봐 그들을 멸하는 의뢰도 해 놨다고.
이 일은 성기사 단장은 물론, 오를레앙 공작 부인과 누구보다 카리스 자작가의 그들이 알 거라고!
그러나 그 누구도 카피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슬로트 경은 성녀를 잘못 모신 죄를 빌겠다면서 갑옷을 벗고 금식 기도에 들어가 있었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 역시 이전의 광산 건으로 인해 칩거하느라 사교계에 나오지 않는 데다가….
무엇보다 카피아가 지목한 의뢰를 수행했다는, 바른 일꾼 길드에서 펄쩍 뛰었다.
“우리 길드는 창설 이후로 사람을 해치거나 납치하는 의뢰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주신이 알고 온 제국 사람들이 다 압니다. 떳떳하니 조사에 응하지요! 진실 판독 마법을 받겠습니다!”
그리하여 황궁의 주교가 나서서 검증했는데,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카피아의 해괴한 주장이 물 위로 떠오를 뻔했다가 파묻혀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수없이 사기를 친 자가 뭐라 말하든 누가 믿어 주겠는가?
오히려, 주신전 어딘가에 갇혔던 카리스 자작가의 큰아들인 도펠이 한 장소를 지목하며, 여기서 감금당했다고 하자 난리가 났다.
이들을 이용해 성녀의 이름으로 계시를 조작하려 했다는 풍문이, 황궁을 중심으로 가득히 떠도는 이유였다.
“고생이 많았군.”
“…황공합니다.”
실라스는 카리스 자작가의 세 귀족을 차례로 보았다.
“제국의 황족으로서 나는 그대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다만 시기가 너무 늦은 듯하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닙니다. 이렇게… 제 동생을 찾아서 보호해 주셨으니 더 바라는 바는 없습니다.”
도펠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휠체어에 타 고개를 든 루민트를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기적처럼 만나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참으로….
흐릿해진 의식은 지금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자를 발견해 보호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클라인 공작과 그 아들인 카셀 대공자다.”
움찔.
클라인 공작이라는 말에 잠시 도펠의 눈이 흔들렸다.
누군가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죄가 없지.
오히려 이쪽에서 잘못 가르친 사람 한 명 때문에 극도로 폐를 끼쳤다.
도펠은 무척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
“공작 각하는 뵙지 못했고 카셀 대공자와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시오넬로 돌아가겠는가?”
“예. 그간의 보호와 진상 규명에는 감사드리나 제도에 있는 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저희 부모님도 귀환을 원합니다. 루민트도… 그럴 겁니다.”
“그렇군.”
실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홀과 명령서를 가져오게 했다.
카피아의 농간으로 납치되어 온갖 고생을 한 자들.
황제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 영주 자격이 없는 스테파노 시오넬의 작위를 몰수하고 이들에게 새로 부여하게 했다.
마누스라는 새 성과 백작위와 충성스러운 기사들도 함께.
도펠 마누스가 된 그는 황태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다시 뵐 수 있을지는 모르나 평생토록 이 호의와 보호를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시오넬에서 그 누구도 소외받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지친 그의 아버지는 일선에서 물러나 어머니와 루민트를 돌보는 데 힘쓸 거다.
앞으로 시오넬 영지를 돌보는 업무는 한창 나이인 도펠이 해야 할 일로 주어졌다.
황태자는 더는 무기력해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신임 영주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러한 것이지. 건강하게.”
“예,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잘 돌아가게.”
조금 후면 시오넬로 돌아가게 된다.
부모님과 루민트의 휠체어를 밀어 플라타너스 그늘에 둔 도펠은 눈을 감았다.
돌아가게 되면,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반드시 이렇게… 가족들과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거다.
미풍이 그의 까슬해진 뺨과 입술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모릅니다.”
“정말입니까?”
“도트리샤 카리스란 사람이 저희의 여동생이긴 하였으나, 실종되고 흔적을 찾은 적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선 모릅니다. 그 공녀께서 무언가 죄를 지었다면 따로 조사하여 처결하십시오.”
암흑 길드의 암살자들이 휘두르던 무시무시한 칼날.
아니, 그전에 어머니께서 흐느끼며 불러도 미동도 없이 눈만 크게 뜨던 너. 표정도 언행도 너무나도 어색했지? 꼭 연기하는 것처럼….
네가 무엇 때문에, 왜 그랬는지 더는 물을 힘도 없다.
슬프고 아팠던 시간은 다 잊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구나.
나는… 끝없는 증오를 가슴에 품고 미쳐 버리는 존재가 되기는 싫다.
우린, 여기서 작별하자.
다시 눈을 뜬 도펠은 루민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루민트, 알고 있니? 도트리샤는 죽었단다. 아주 오래전에, 네가 절벽에서 떨어지던 날에. 그 아이의 영혼은 우리가 있는 지상을 영영 떠났어.”
“…….”
“더는 마음 아파하지 말고 다 잊자, 돌아가자. 시오넬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널 혼자 버려두지 않고 평생 지켜 줄게.”
휠체어 옆의 벤치에 앉아 있던 마누스 백작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시오넬 영지로 향하는 길.
책에서만 보았던, 거대한 드라칸이란 존재의 안장에 타고 가는 내내 도펠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공중을 나는 이질적인 존재라니!
“감사합니다. 드라칸 라이더. 아… 레이디 모르가나라고 하셨습니까?”
“예.”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 그분의 목소리는 낭랑하기 짝이 없었다.
“먼 길인데 나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재차 건네지는 인사에, 페이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인간으로서 도리입니다.”
짧고도 단호한 말이나 울림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