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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어느 어머니의 결심 (127/148)

127화 어느 어머니의 결심

“…네?!”

페이는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주신전 내에 평생 구금하겠다, 이거야 예상 가능한 범주기는 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벌을 주겠다는 거니, 마음으로는 분해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폐성녀…?! 재판부에 성녀의 처분을 맡기겠다?!

생각보다 처벌의 수위가 강력한 편이잖아.

잠자코 있던 카셀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주신전에서 폐성녀 쪽으로 힘이 실렸으면 합니다, 아버지. 재판부로 넘어오면 주신전과의 관계를 생각하느라 감형이 될 겁니다.”

“폐성녀가 쉬운 일은 아니나, 최근 루야 성녀가 위로의 뜻으로 새 신성의 돌을 보내왔다는구나. 그걸 받고 주신전에서 방향을 튼 듯싶다. 카피아를 버리겠다는 의지는 분명하지.”

‘신성의 돌….’

그게 무슨 물건인지 루키우스에게 간단히 들었다.

주신이 위급할 때 쓰라던 물건을, 성녀가 뭘 했는지 신성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자기 몸에다 대고 썼다지?

없어진 신성의 돌을, 넘치는 주신의 은총으로 만들어 여기에 보내 준 루야….

그 작고 어린, 잠깐 만나고 헤어진 귀여운 얼굴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성녀에 대한 근황을 말한 공작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그쪽은 그렇게 되었고, 네… 자리를 강탈한 그것은, 조사만 단행하고 공표는 미룬 채로 공작저에 있다. 본채에 있는 건 당연히 아니고 전에 있던 셀피아 하우스에 구금된 상태다.”

셀피아 하우스.

나를 대신해 그곳에서 에이나 공부를 하며 포셰트 학자님께 늘 혼이 났다지?

진짜 공녀가 되려고 온갖 흉계를 꾸몄는데, 결국에는 처음에 온 거기로 돌아간 기분이 어떨까.

‘도트리샤, 너는 시간이 돌려지는 황금 같은 기회를 이렇게 썼구나.’

페이는 카피아의 일로 언제 놀랐냐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께 물어봐서 처결하세요.”

“누구…에게?”

“클라인 공작 부인께요. 공녀를 지극히 사랑했던 만큼 배신감도 크겠죠? 저는… 저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끝을 직접 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피아의 몰락은 확실해졌다.

실은, 오늘보다 더 이전에.

루야 성녀를 히논 왕국으로 모셔서, 전 대륙에 새 성녀가 탄생했음을 선포한 게 가장 큰 복수였잖아.

그러나 클라인 공녀는?

암흑 길드 등과 결탁해 자기 진짜 가족을 죽이려 했다지만, 실은 신분 사칭죄 등이 더 크게 와닿는 게 제국의 이치지.

영지를 가진 고위 귀족의 사건은 반역이나 살인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보통 집안에서 알아서 처결하라고 넘겨준다.

실제로 도트리샤가 움직여서 죽은 사람은 없으니 신변이 넘어올 거다.

클라인 공작가로.

한스러움과 진짜 딸을 향한 애정을 꾹꾹 눌러 참던 공작이 감정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 네 앞에선 중요하지도 않다. 티아나야… 나는 그 둘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음이다! 세상에 끔찍한 것들!”

클라인 공작이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에, 페이는 비 오는 섬에 홀로 갇힌 듯 막막함을 느꼈다.

아니, 실상 그 기분은 눈앞의 공작이… 나의 아버지가 생생하게 느끼고 있겠지.

‘난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누리면서, 이날이 오기를 오히려 늦추면서 살아왔어. 이게 옳은 건가?’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루비 펜던트를 마구 부쉈던 그날이 떠오른다.

복수는 성공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페이는 예전에 내려 뒀던 결정을 다시금 돌아보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클라인 공작가와 연을 끊은 채 살아가면, 도트가 원하는 대로의 삶이 아닐까?

클라인 공작저의 ‘공녀’는 가짜든 진짜든 도트리샤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어둑하게 남겨지겠지.

카셀 오라버니가 후에 결혼해서 딸을 얻을 때까지 말이야.

그건 싫었다.

“아버지,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남은 일을 수습하고 마무리 지을 때입니다.”

“그래…. 그래, 난 무너지지 않는다. 절대로…. 그건 믿어 다오….”

페이가 본, 클라인 공작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공작의 곁으로 다가가 따스한 손으로 어깨를 짚으며 위로했다.

“진정하세요.”

“티아나야…!”

“전… 슬픔을 삼키고 묵묵히 살아가는 법을 배웠어요. 그게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는 예전과 달라졌어요. 도트리샤가 절 공녀 자리에서 내몰았다고 해서 그 일로 평생 괴로워하며 살지는 않아요.”

카피아의 죄목은 캐면 캘수록 더 나올 거다.

구태여, 클라인 공작가의 진짜 공녀를 숨기고 가짜 공녀를 내세운 끔찍한 사건을 반드시 밝히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마지막 결정으로 도트리샤 카리스를 어떤 식으로 단죄할지 고를 수는 있지.

클라인 공작은 딸의 담담한 말을 견디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았다.

“엇….”

눈물에 젖어 축축해진 뺨이 머리칼에 와닿는 느낌이 어색하다.

페이가 눈을 깜빡이는 찰나, 옆으로 보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연핑크빛에서 연한 금빛으로 바뀌어 보였다.

카셀이 활짝 열어 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서.

자신의 슬픔을 드디어 극복한 페이는, 이제 막 고통스러운 삶의 초입으로 들어선 공작을 살뜰하게 위로했다.

“무슨 선택을 한다고 해도 도트리샤는, 한때 제 친구였던 그 아이는 이미 벌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원하던 화려한 삶과는 영원히 멀어졌고, 흠모했던 황태자 전하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겠죠.”

“티아나… 오오… 모르가나야….”

공작은 그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와중에도, 딸의 성장을 인지했다.

사람이 이토록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다니….

나는 이 아이를 딸로서 품을 자격이 있는가.

페이의 위로를 받은 공작은, 카셀더러 배웅을 부탁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공작저에 들어섰다.

멀쩡한 여름날인데도 분위기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대도, 사용인들도 다 눈치껏 알고 있는 거다.

클라인 공녀가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질러서 셀피아 하우스에 무기한으로 가둬져 있고, 겨우 나아 돌아다니던 공작 부인은 갑자기 쓰러져 며칠씩 깨어나지 않고 있지.

그러니….

“부… 부인?!”

버릇처럼 공작 부인이 잠들었을 내실부터 들른 공작은 깜짝 놀랐다.

그의 아내가 멀쩡하게 깨어 거울 앞에서 치장하고 있지 않은가!

“실례예요, 여보. 노크도 없이 문을 열다뇨?”

소피아는 새침하게 남편을 타이르기까지 했다.

“집사는 아무 말도 없던-”

“내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클라인 공작의 눈이 몹시 떨렸다.

장미 문양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거울을 보며 귀걸이를 다는 아내의 어깨는 반듯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 폐가에서의 일은 혼절 때문에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말해도… 되려나…?

“부인….”

남편의 길고 긴 신음에, 그녀는 연지통을 내려놓고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 당신을 심려하게 만들었네요.”

“부인! 그렇지 않소. 나는….”

“말씀드리렴.”

“예, 마님께선 세 시간쯤 전에 깨셔서 저를 비롯하여 시녀장과 레이디스 메이드, 집사, 오늘 당직인 기사 몇몇을 불러 그간의 일을 물어보셨습니다.”

침대맡에 있던 베린스가 야무지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설마…!

공작은 자기 어깨를 다독이던 페이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와는 비교하기도 힘든 작고 여린 손이 토닥이며 건네주던 위로를, 당신은… 못 받을 수도 있다고, 그 순간이 오더라도 아주 먼 나중일 거라고….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겠나?

“공녀 말이에요.”

“……!!”

클라인 공작은 깜짝 놀라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공작 부인은 무척이나 여상하게 말했다.

“여기에 있더군요?”

“으음….”

우리 티아나, 우리 티아나를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던 아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꺼낸 호칭.

공녀.

마치 남의 집 딸을 대하듯이 부르는 호칭이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잘하셨어요, 참으로요. 그리고 당신께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괜찮은가요? 외출하고 돌아오셔서 피곤하실 텐데요.”

“난 당연히 괜찮소. 다만 당신이… 뭐라도 좀 먹어야지.”

공작 부인은 미처 못 단 왼쪽 귀걸이를 마저 달고는 돌아보며 웃었다. 유독 반짝거리는 핑크 사파이어의 색감이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같이 먹어요, 그럼.”

클라인 공작 내외는 그날 밤을 새워 가며 깊고도 오랜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속사정을 다 공유할 수는 없었다.

바로아의 말마따나, 과거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대상에게 그 옛적 이야기부터 다 꺼내서 보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 일어난 일만 가지고도 그 둘을 엮어서 지옥으로 보내기는 충분하니.

마침내 대화가 끝났을 무렵은, 하늘에 벌써 푸른빛 밑으로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스스로 일어나 허리에 손을 받치며 말했다.

“죄송해요. 당신도 쉬어야 하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무슨…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소피아, 당신의 일이 곧 내 일이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당신을 위한 거요.”

“…네. 알아요. 조금 잘까요?”

“쉬시오.”

최근의 일과 건강을 생각한다면 그보다는 공작 부인이 더 빨리, 많이 쉬어야 한다.

“아뇨, 같이요.”

공작 부인의 손이 공작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들이 청년이었던 시절에도 좀처럼 하지 않았던 끈적한 행동.

놀고 있던 공작의 손은 자연스럽게, 아내의 허리로 향했다.

“좋소.”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몇 시간 정도 잔 후, 정오 즈음에 나란히 일어났다.

앞으로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신기하게도 둘 다 약간의 개운함을 얻은 얼굴이었다.

시간이 흘러 말끔한 모습으로 셀피아 하우스를 향해 가는 인영은….

하나였다.

클라인 공작 부인.

“열어라.”

“예!”

“……!!”

다른 문은 바깥 걸쇠로 다 잠기고, 작은 정원이 있는 가장 큰 문 바깥엔 늘 병사들이 대기해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지.

그 문 근처에 있던 도트리샤는 밖에서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요 며칠간, 너무 두려웠다.

끌려가던 도중 뭐가 어떻게 됐는지 공작저로 돌아오긴 했는데 그 후로 이 셀피아 하우스에 도로 갇혀 버리고 말았지.

하루에 두 번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시녀도 아닌 기사가 가져오고 치웠다.

테이블 위에 차려서 먹는 것도 스스로, 접시를 도로 올려놓는 행위도 혼자서 다 해야만 했다.

카피아의 주장이 기어코 받아들여졌나, 난 이제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무서웠는데, 정작 트레이에 실려서 온 음식은 평소처럼 훌륭했고 먹고 나서 배탈도 나지 않았다.

뭐야… 나….

어떻게 되는 거냐고.

이 지경이 되어도 도트로선 자결한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끼이익-

힘겹게 버티던 가짜 공녀는 오랜만에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오래오래 기다렸되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아….”

“괜찮니?”

무척 다정한 목소리.

클라인 공작 부인!

내… 내… 내 어머니! 나를 살려 줄 사람!

도트는 벌벌 떨다가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공작 부인께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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