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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마지막 목격자 (125/148)

125화 마지막 목격자

카셀에 이어 크로우 기사단장이 추궁하자, 슬로트는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이쯤 해서 저들이 순순히 물러나 주면 좋으련만 쉬워 보이지 않는다.

눈치를 보니, 바깥의 성기사들도 최소한 대치는 하고 있을 듯한데.

그의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서 이상한 칼부림과 대화가 오간 건 사실이나 무슨 소린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소. 더군다나 이분은 사제가 아니오!”

“성녀님?”

낮이라도 이 안이 어두운지라, 등불을 들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보다가 중얼거렸다.

성녀 카피아.

그 정체가 발각당하자, 카피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꿈에서 주신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니 그만해 주십시오. 나를… 나를, 핍박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찾았습니다, 기사단장님. 암흑 길드의 표식입니다. 전달에 새로 바꿨다는 첩보를 입수한 전적이 있습니다.”

“…암흑 길드라.”

크로우 기사단장의 신발이, 썩어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가볍게 쳤다.

그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은 퍽 가까웠다.

“이 안에 있는 모두를 압송해야겠습니다.”

“이보오!”

“…맙소사. 이분은… 클라인 공녀가 아닙니까?”

카셀이 맡긴 로브 차림의 여인을 확인한 기사가 경악했다.

그러나, 공녀와 혈육인 카셀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아칸 제국은 법치주의 국가다. 그 누구든 법률에 위배하는 언행을 한다면 그에 따른 처우와 절차를 감당해야지. 같이 압송하되 붙잡은 자들 간의 거리를 떨어트려 놓도록.”

“예!”

“…흠, 알겠소. 가서 정리가 되는 대로 조사를 시작하지.”

크로우 기사단장은 카셀의 엄격함에 놀라면서도, 이래야 기사지 하는 눈으로 보고 감탄했다.

과연 발리엣 경이 찬탄하면서 앞으로는 서로 적극 협조하라는 이유가 있다.

세상에 자기 여동생의 수상함을 보고 감싸기는커녕 단호함을 유지하기가 어디 쉽겠나? 어렵지.

“감히! 나를! 놓지 못해!”

“이거 놔라!”

카피아와 슬로트 경의 저항은 거셌으나 별로 소용은 없었다.

그 와중에 카셀은 지나가는 슬로트에게 말했다.

“참, 바깥에서 이 폐가를 포위하는데 주신전의 성기사들이 상당히 배치되어 있었더군. 무슨 의도였는지 낱낱이 알아내겠소.”

“뭐라!”

재갈을 물지 않은 암흑 길드 측의 한 명이, 성기사란 단어로 성녀의 배신을 깨닫고는 소리를 질렀다.

“기다리시오! 제길, 다 말하겠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겠단 말이오! 우린 암흑 길드고 의뢰를….”

“안 돼!”

도트리샤는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우리는 성녀의 의뢰를 받았소! 성녀 카피아는 카리스 자작가의 사람들을 데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소. 주신전에서 시오넬 영지까지 이동한 흔적과 증거도 가지고 있소!”

그 절박한 폭로마저도 암흑 길드 측에선 계산적이기 짝이 없었다.

위기에 빠진 지경에서도 성녀를 몰매 맞을 대상으로 내놓고, 가짜 공녀는 뒤로 쑥 빼놓는 이유는 자명했다. 이런 식으로 매듭을 지어 놔야, 차후에 이득을 받아 챙길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누가 보더라도 끝났다.

“뭐라?”

“…블루 로즈 단장, 이거 사건이 하나뿐이 아닌 듯싶소.”

크로우 기사단장의 말에 카셀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철저한 조사가 필요한 일이오.”

핏빛으로 물든 연리지와도 같은 꼴을 보던 클라인 공작이 바로아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의 은신 마법은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어, 기사들이 폐가를 뒤질 때도 들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어떻게 될 느낌이오?”

“지켜보시죠. 성녀든 가짜 공녀든 둘 중 하나가 자신의 끝이 왔다고 여기면, 억울해서라도 나머지의 치부를 죄다 고발하게 되겠지.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거요.”

네 생각도 그렇지, 페이야?

드디어 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었구나.

보고 있진 않더라도 내 마음을 알아다오.

클라인 공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무것도 없는 옆을 보았다.

마탑에서 기다릴 때, 한 마법사가 다가와서 그랬었지.

페이는 정말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사라고.

공작이라도 일반인인 당신은 영원토록 못 보겠으나, 흐릿한 정령의 형체를 휘감은 페이는 천사처럼 아름답다고.

홀트데인이 신나게 떠들고 간 주접이, 공작의 그리움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성녀와 가짜 공녀를 포박한 소식이 네 귀에 빨리 들어갔으면 좋겠구나. 네가 날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염치없게도 너를 보고 싶다.’

그렇게 카피아와 슬로트, 클라인 공녀는 물론 암흑 길드의 암살자들과 폐가 바깥에 있던 성기사들마저 대거 잡혀간 뒤.

실내는 적막에 휩싸였다.

이제 은신 마법은 더는 필요치 않았다.

바로아가 가볍게 마법을 풀고 앞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는데, 클라인 공작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는 듯 그도 뒤를 보았다.

거기엔 맨 뒤편에 덩그러니 선 여인 한 명이 있었다.

클라인 공작 부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다문 채로 있던 그녀의 신형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여보!”

공작은 아내를 급히 부축했으나, 드디어 열린 공작 부인의 입술은 두서없는 말을 뱉어 냈다.

“나… 나는… 나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본 그대로요. 모두 속았어. 참 어리석게도 말이지.”

소피아 클라인은 너무 기가 막혀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 티아나가 왜 여기에 있죠? 우리 티아나는… 리본을 사고 디저트를 구경하러 시가지로 간다고, 했단 말이에요. 내 몸 걱정을 해 주며 나는 집에서 푹 쉬라고…. 오… 그래서….”

“진정하오.”

공작이 달려들어 등을 토닥여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둑이 터져 흐르는 물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티아… 티아나는, 나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 착한 아이예요! 그래서 난… 난… 당신과 보자는 약속은 오후였으니까,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미쥬앙 호텔에서 기다렸는데….”

미쥬앙 호텔이란 단어가 나오자, 바로아와 공작의 눈매가 동시에 가늘어졌다.

사람의 본능이란 참으로 무섭지.

많고 많은 곳 중 오늘 같은 날에 거기를 고르다니?

“미쥬앙 호텔에 갔었소?”

“뜻밖에도… 그… 1층에서 레이디 모르가나를 봤는데… 지배인이 운세 쿠키를 주길래 쪼갰더니 나더러… 내가 눈앞의 행복을 놓친다고 해서, 우리 티아나한테 내가 너무 못 해 주나 싶었죠…. 그런… 그런데….”

더듬거리던 말이 어느 구간에서 딱 끊겼다.

내가 모르는, 초라한 차림의 귀족 부인.

카리스 자작 부인이라고 했나?

그녀가 그랬어.

나의, 우리 티아나를 보고 울먹이면서 도트리샤라고 불렀다고.

왜…?

안 들은 셈 치고 싶었다.

티아나가 로브를 입고 있었던 터라 표정은 못 봤으나, 도트리샤라고 부를 때 미약하게 움찔거리던 어깨.

모르는 사람이 잘못 부르는 이름이라면 사람의 반응이 그토록 즉각적일 순 없지.

그 장면을 안 본 셈 치고 다 잊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지성을 모두 버리고 새끼를 품은 동물로서만 살아가도 괜찮다면.

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 티아나가….

“도트리샤라니… 그게 누군데요….”

“부인.”

클라인 공작은 부인을 너무나도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왜 이러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그도 처음엔 진실을 바라보기를 외면하고, 또 거부했으니까.

“네 오라버니라니! 여보, 우리 티아나의 오라비는 카셀하고 모리스잖아요? 왜… 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서 우리 티아나더러 아는 척을 한 거죠? 미친 사람들인가요?”

현실을 부정하는 소피아는 자신이 미쳐 간다고 생각했다.

두 기사단에서, 뭣보다 카셀이 동행했으니 진실은 여지없이 밝혀질 거다.

클라인 공작과는 달리, 일선 정치엔 안 나서고 사교계 활동만 하는 공작 부인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은.

지금껏 알았던 그… 연갈색 머리칼에 자신의 푸른 눈빛을 닮은 소녀가 아니라고.

공작은 단단히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부인, 알고 싶지 않겠으나 잘 들으오. 지금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었던 클라인 공녀의 이름은 도로테아도, 티아나도 아니오. 시오넬 영지에서 온 도트리샤 카리스로,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진짜 우리 딸의 물건을 훔쳤소.”

“…….”

클라인 공작 부인의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딸은 주신전에서 준 값비싼 루비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녔다오. 거기에 흥미를 느끼고 정보를 캐낸 거지. 이후로는 이야기가 좀 길고…. 오늘의 이야기를 할까.”

“어떤… 거요…?”

그렇게 되묻는 입술은 어느새 겨울에 얼어붙은 땅만큼 거칠어져 있었다.

파국이다.

“우리 딸을 사칭한 자는 암흑 길드와 결탁했소. 이유는, 자기 진짜 가족을 이 자리에 불러내 사살하기 위해….”

“그만! 그만! 그만…. 흐… 으흐흑… 흐으…으윽….”

공작 부인은 발작하듯 소리치더니, 차갑게 식은 폐가의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간 이해하기 힘들었던 가족들의 행태.

그게 비로소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완성되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렵게 찾은 여동생에게 매정하게 굴었던 카셀,

몇 마디 다투지도 않고 집을 나가 버렸던 모리스,

제도 내에 하우스를 보러 다니다가 다친 내게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둔 남편….

아아, 나는 어떻게 이리도 무정하고 끔찍한 어미로 살아온 거지?

아무리 딸이 그립다고 해도 전혀 다른 존재를 내 새끼로 품고 잘났다고 살아오다니!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우리 티아나, 아니…. 그… 그 존재의 이상한 눈빛, 몇 차례나 보고도 잊기를 택했었지.

가끔 내 레이디스 메이드나 시녀장과 의견이 충돌할 때 보이던…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재규어와도 같은 노려봄….

함께 잡혀간 성녀 카피아와의 관계도 이상하다.

대체… 왜 가짜 공녀니 하는 말이 주신전의 사제 입에서 나와…?

당신들이 증명해 줬잖아!

에이나로 왔던 도로테아가 티아나가 맞다고.

그런데 왜….

클라인 공작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무척 뜨겁다. 살갗도, 그 아래에서 맹렬하게 돌고 있는 피의 흐름도.

주신전에서 받아 온 검증이 가짜란 소리야?

그래서 가짜 공녀란 해괴한 말을…!

“부인! 부인, 정신 차리시오. 힘들어도 견뎌 내야 해!”

공작이 붙든 아내의 몸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지고 있었다.

그런 이성적인 말은 귀에 들려오지도 않는다.

공작 부인의 생각은 이미 오래전으로 날아가 버렸다.

작년, 딸을 되찾고 감격하여 주신전에서 끌어안던 그 순간으로.

‘너는 대체 누구니? 내 딸… 내 딸은 내 품에 있어야 하는데 왜 네가 아닌 거야? 그러고 보니… 실크 로브를 내밀었을 때 왜 얼굴은 잿빛이 되었었지? 그냥 네 거라고 말하면 되잖아. 너는… 누구냐고.’

“부인!!”

소피아 클라인은 결국, 의식을 완전히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공작, 진정하시오. 큐어.”

언젠가 클라인 공작 부인의 다리에 스며든 마력보다 더 강한 물빛의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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