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일망타진
“무슨 소립니까?”
‘이런!’
잘 숨어 지켜보던 카피아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큰일이다.
루야 성녀의 존재가 있다고는 하나, 제국에서 ‘성녀’를 언급하면 카피아의 이름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게 순리.
슬로트 경의 입은 어찌어찌 막는다고 해도 저 반대편의 카리스네는 어쩐단 말인가?
안 그래도 도펠은 생각 외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는데.
“성녀님을 불러 줘요, 그전엔 무슨 대화도 할 수 없어요.”
“당신, 가짜 공녀면서 어디서 거짓말을…!”
앙켈이 진실을 폭로하며 입을 막으려 했으나 도트리샤의 목청은 무척 컸다.
“성녀님! 제국의 성녀 카피아 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신을 모신 카피아 성녀님! 어서 모습을 드러내 주셔요.”
“이봐!”
“저를 끝까지 외면한다면 나가겠습니다. 주신의 충실한 신도를 이렇게 농락하지 말아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낭패다.
‘할 수 없나.’
로브와 가발로 정체를 숨겼다고는 해도, 언젠가는 은자 마리안이 성녀 카피아임을 드러낼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차선책을 쓰는 수밖에.
카피아가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흔들자, 반대편에 있던 커튼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삐이걱-.
마룻바닥의, 불길한 삐걱거림에 도트리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는 사람.
전부, 다.
하나, 둘, 셋. 세 명이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들이 누군지 파악한 도트의 입술이 개암 열매 크기만큼 작게 열렸다.
“하…?”
맨 앞에 선 도펠은 그녀를 노려보았고, 뒤에 선 카리스 자작 내외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성녀가 죽이지 않고 숨겨 두고 있었군!’
도트리샤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 언제든 달아날 수 있도록 채비를 한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윽고 자작 부인이 흐느꼈다.
“오, 도트리샤야…. 흐흑. 네 오라버니가… 루민트가… 얼마 전에 우리가 살던 그 집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죽었단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트리샤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성녀가 이들에게도 거짓말을 한 건가?
하긴, 주신전에서 내 의뢰 내용을 가로채 선수를 치고 나갔으니 날 흑막으로 내세워야 변명할 거리가 생기겠지.
하지만 난 거기선 떳떳해.
죄가 없어!
도트리샤가 자기 합리화를 하며 눈을 치뜨는 사이, 카피아가 슬로트 경에게 속삭였다.
“경, 보셨습니까? 우리가 아는 클라인 공녀는 가짜입니다. 진짜 가족은 저기에 있고 무언가 끔찍한 일을 당한 눈칩니다.”
슬로트 경도 눈으로 직접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중년의 자작 부인이 하는 말투, 친근하고 슬픈 인사는 꾸며 내서 나오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 가짜란 말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인정해선 안 되는 사항이었다.
친자 검증을 주신전에서 했는데, 그 결과를 잘못되었다고 이쪽에서 먼저 뒤집으라고?
곤란하지.
현실적인 어려움을 직감한 슬로트 경이 침묵하자, 카피아는 답답한 듯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주신전에서 이뤄진 친자 검증, 그건 저쪽이 사용인을 매수해서 조작한 게 뻔합니다! 저 교활한 가짜의 연막에 우리 모두 속은 거니 죄가 없어요, 원래대로 되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주신께서 주신 계시를 이대로 날릴 겁니까?”
슬로트 경은 갑자기 그와 성녀를 묶는 말에, 이질감을 확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건데 왜 내 책임으로 돌아온단 말인가?
그리고 성녀님의 말씀은, 이 혼란한 상황이 어떻게 엮였는지 사전에 다 알았다는 듯이 느껴진다.
만에 하나 내가 모르는 꿍꿍이가 숨어 있다면-
신중해야 해.
“도트리샤아….”
카리스 자작 부인이 눈물을 마룻바닥에 툭 떨구며, 도펠의 앞으로 나와 팔을 내밀 때였다.
서늘한 공기 사이로, 말로 형용하기 힘든 살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한 순간!
휙!
정말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안 보이던 구석에서 몇몇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검게 물들인 칼이 휘둘러지는 대상은 다름 아닌 카리스 자작가의 사람들 쪽이었다.
“꺄, 꺄악!”
문가에 있던 도트리샤는 고함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더니, 덜 닫은 문을 통해서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통 이런 상황을 당하면 놀라 굳어 버리는 일반 사람들과는 천지 차이의 태도였다.
‘이, 이 무슨!’
카피아는 무척 당황했다.
저들이 왜!
만에 하나 일이 어그러질 경우를 대비해 부른 암흑 길드 측에서 왜 이런단 말인가?!
여기서 달아나려는 도트리샤를 잡아야지!
성녀의 혼란과는 달리, 암흑 길드에선 처음부터 다른 판단을 했었다.
의뢰 자체는 클라인 공녀 측이 넣은 게 먼저였고, ‘의뢰는 의뢰다’는 명목으로 성녀가 숨긴 카리스 자작가의 가족들을 이 자리에서 죽여 빼돌리겠다는 심보였다.
물론, 노회한 성녀보다 허술한 구석과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가짜 공녀를 이용하는 편이 이득이기도 하다.
이 또한 카피아가 암흑 길드에 위험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다각도로 판단이 가능해졌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카앙!
“아니?”
그러나, 암흑 길드에선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카리스 자작 부인은 몸을 돌려 도펠의 몸을 감쌌는데, 암살자들은 둘 다를 죽이기는커녕 갑자기 형성된 보호막에 칼날이 막히고 말았다.
클라인 공작의 곁에 있던 바로아가 쓴 보호 마법 때문이었다.
“…….”
“경, 경, 어서 도와주세요.”
카피아는 슬로트 경의 소매를 급하게 흔들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대로는…!”
“안 됩니다. 성녀님, 우선 나가시죠.”
왜 이 자리에 클라인 공녀며 주신전의 앙켈, 수상한 암살자들이 나왔는지는 나중에 차근차근 알아보면 될 일.
슬로트 경은 방금 본 장면에는 무척 구린 음모가 있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들이 숨은 뒤편에는 작은 쪽문이 있다.
열면 햇빛이 곧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낡은 차양을 친 구석임을 확인해 뒀으니, 몰래 빠져나가도 안 들키겠지.
일단 이 자리에서 나가는 편이 상책이다.
“하앗!”
그사이, 암살자는 정체불명의 마법을 깨기 위해 칼을 도로 휘둘렀으나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콰앙!
도트리샤가 달아난 뒤 끼익거리며 반쯤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니!’
슬로트 경은 그새 당황하고 있었다.
그전에 밀면 밀렸던 뒤편의 쪽문이 움직이지 않아! 만에 하나 수상한 사태가 생기면 이곳으로 도주하려 했는데….
“모두 멈추시오!”
“에잇!”
폐가로 들이닥친 이들은 블루 로즈 기사단과 크로우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제일 먼저 칼을 휘두르는 암살자를 순식간에 포박한 그들은 폐가 내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
슬로트 경은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저들이 왔다면, 바깥에 데려온 주신전의 성기사들도 발견하지 않았겠나…!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성녀님과 루야 성녀의 일로 다투긴 하였으나, 성기사 단장인 그와 적대적인 관계로 공연히 돌아설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건 성녀님도 모르는 일일 터.
“그쪽, 끌어내기 전에 스스로 나오시오.”
“당장 물러서라! 다가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예상대로 구석에 숨었던 슬로트 경과 카피아는 끝내 발각되고 말았다.
암흑 길드의 암살자들을 무릎 꿇린 크로우 기사단장이 명령하자, 슬로트는 거의 으르렁댔으나 그 말에 힘은 없었다.
“스스로 나오지 않겠다면 둘 다 저들처럼 묶어서 압송하는 수밖에 없소. 아니…? 잠깐, 당신은 슬로트 경이 아니오?”
성녀와는 달리 가벼운 헬멧만 쓴 슬로트는 정체가 들통나고 말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수상한 자들이 모여 수상한 짓을 하는 장소에서 잠복한 사실을 들키다니.
“설마 뒤에 계신 분은….”
“…….”
“그만! 더는 무례를 끼치지 마시오.”
카피아는 속으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저들이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
설마, 가짜 공녀가 한 짓? 그렇다기에는 말이 안 된다.
여기에 온 카리스 자작 내외와 도펠이 입을 열기라도 하면 위험해지는데 왜?
“단장님! 이걸 저들의 옷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음?”
그새 정체를 감춘 암살자들의 품을 뒤지던 기사 한 명이 무언가를 들고 왔다.
알아보기 힘든 암호가 가득히 써진 수상한 종이.
의뢰서였다.
저걸 해독하면 암흑 길드가 이 일과 관련되어 있음이 금세 드러날 거다.
“크로우 기사단장, 이 근처에서 도보로 달아나던 사람이 있어 데려왔습니다.”
“잘했소이다.”
“시… 싫어… 싫….”
‘도트리샤?!’
바깥에 있던 카셀이 로브 차림의 누군가를 거의 억지로 잡아서 데려왔다.
아직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건가?
카피아는 핑핑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급박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제길…. 제길…. 어떻게 해야….’
도트리샤가 몸부림치는 사이, 포박은 아니나 기사들 사이에 붙들린 도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시오넬 영지에서 온 카리스 자작가의 첫째, 도펠 카리스요.”
“시오넬?”
“카리스 자작가라면…!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공표하신 그 일…!”
“이쪽은 우리 부모님입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저도 잘 모르겠으나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사들이 놀라 술렁이는 사이, 도펠의 부들거리는 손가락이 슬로트 경의 뒤에 숨은 카피아를 가리켰다.
“저 여자…. 저 여자가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소. 자신을 두고 주신전에 은거하는 사제 마리안이라고 하더군.”
‘마리안?’
도트는 하필 자기를 붙잡은 카셀에게 티아나라고 말할 겨를도 없었으나, 이상한 말은 금세 알아들었다.
마리안이라니…. 그거.
내 중간 이름과 비슷하잖아.
설마 날 죽일 듯이 굴었던 이유가 그건가? 질투?
곤란에 빠진 카피아를 향해, 카리스 자작도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를 만날 때와는 다른 로브를 입었으나 체형을 보아 틀림없습니다.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숨길 수가 없지요.”
‘크윽…!’
“…….”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여기서 달아난 도트리샤는 외면했다.
앙켈이란 사제가 떠들었고 서로 얼굴을 봤는데도 모르는 척을 해…?
내가, 저들의 식구임을 부정하는 건가?
도트가 묘한 기분에 휩싸이는 사이.
카셀이 도트를 다른 기사에게 넘기고 슬로트 경의 앞에 섰다.
“슬로트 경,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뭔가?”
“주신전의 권능으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슬로트는 죽으나 사나 성녀를 지켜야 하는 몸.
그리고, 카셀은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이자 소공작이었다.
“아칸 제국에 거주하는 자는 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법과 제도의 규율을 지켜야 하오. 이 수상한 칼잡이들과 연관이 있소?”
“…제길, 더는 묻지 마시오! 난 성녀님이 계시를 받았다길래 온 거고 더는 아는 바도 없소.”
“계시?”
슬로트 경은 영 켕기는 가짜 공녀 이야기는 쏙 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게 고지식한 기사들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무슨 계시를 말하는 건지 자세히 설명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