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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승리의 깃발은 누가 잡을 것인가 (123/148)

123화 승리의 깃발은 누가 잡을 것인가

“새벽녘에, 몸은 차갑게 식고 머리는 크게 다쳐서…. 그야말로 죽기 일보 직전에 구했는데 그보다 더 늦었으면 죽었겠지요. 제 동생은 나은 후로도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으흠.”

“루민트는 종종 도트리샤의 이름을 짧게 외다 말았지요. 전… 그날 도트리샤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갔기에, 루민트가 충격을 받아 방황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와 반대겠지.

카피아는 루민트의 추락이 도트리샤의 고의적인 소행 같다는 직감을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할 줄 아는 도펠 역시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입 바깥으로 선뜻 꺼내지 않을 뿐이지? 부모님이 졸도라도 하실까 봐.

됐어.

누군가가 의심을 품게 만든 뒤엔, 구태여 들쑤실 필요가 없다.

가만히 두고 신나게 부채질만 해 주면 그 의심이 자라나서, 들녘을 활활 불태우는 산불이 되는 거다.

카리스 자작가를 태웠던 성기사들의, 기름을 먹은 불씨처럼.

‘세 남매를 낳고 기른 부모라면 몰라도, 도펠은 막내 여동생의 만행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루민트는 집에 불이 났을 당시 죽었다고 알고 있으니…. 후후.’

아픈 남동생에 이어 자신은 물론, 부모님까지 가리지 않고 몰살하려고 든 악독함.

끝끝내 의심을 말로 하진 않았으나 카피아는 도펠이 도트리샤를 증오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오늘 직접 보여 주면 된다.

도트리샤 카리스가 공녀의 지위를 훔쳐서 살아왔다는 진실을!

‘절망한 도펠은 내 말을 철석같이 믿게 되겠지. 도트리샤를 짧고 굵게 압박해서 얻을 걸 얻어 내고 다 끝내자.’

클라인 공작 부인의 적대적인 태도만 어찌어찌 잘 돌려놓으면 될 거다.

모르가나는 내게 빚도 있고, 공작은 금화까지 건네줄 정도로 아직은 멍청한 호인이니.

‘으….’

드라칸.

끔찍하고 괴물처럼 생긴 그 녀석을 떠올리니 몸서리쳐졌다.

됐어, 모르가나도 생각이 있으면 차후엔 그 괴물 등에 더는 날 태우려 하지 않겠지.

난 그쪽의 진짜 지위를 찾아 준 은인이 될 거니까.

카피아는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면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지켜봐야 하는 처지라 그런지 어깨가 무겁다.

“…괜찮으십니까?”

카피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의를 줬다.

“쉿, 그렇네.”

등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성녀의 부름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슬로트 경이었다.

‘보기는 싫지만 객관적인 증인이 있어야 하니 할 수 없지.’

원래 카피아는 카리스네 자작가 가족들은 끝까지 안 보여 주고, 도트리샤만 꼬드겨 데려오려 했다.

슬로트 경을 설득해서 어렵게 동행한 것도 그 이유였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가짜란 사실만 폭로하게 만들면 될 거 아닌가.

주신전의 검증을 도트리샤가 조작했다는 거짓 증거는 이미 만들어 놨기에, 실행만 하면 된다.

가짜 공녀를 처분하고 모르가나를 다시 공녀로 되돌려 놓은 다음, 슬로트 경은 주신전에서 혁명을 일으켜 나중에 숙청하려고 했다.

루야의 등장으로 다투긴 하였으나 그간의 공로가 있으니, 목쯤은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 주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슬로트 경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자, 성녀는 급하게 속삭였다.

“쉬잇, 슬로트 경. 의아한 마음은 알겠으나 기다려 주게. 여기로 올 ‘그것’은 무척이나 교활한 자라고 주신께서 몇 번이나 내게 말씀하셨네. 이 이후론 내 이름도 부르지 말게.”

“…예.”

주신의 계시를 꿈에서 받았다는 말로 겨우 데려다 놓았으니…. 어서 와야 할 터인데.

카피아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굳게 닫힌 문만 계속 쏘아보고 있었다.

올 거다, 도트리샤는. 반드시 와야 해!

“…….”

카피아가 숨은 반대편에서도 숨죽인 채 깜빡이는 눈이 있었다.

정확히 세 쌍이었다.

카리스 자작 내외의 앞에 선 도펠에게, 뒤로 무르라는 손짓을 재차 한 카피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다, 정말.

슬로트 경이 낯선 저들을 경계하지 않도록 말을 잘해 두긴 했으나, 솔직히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카피아의 계획대로라면 안 왔어야 할 자들이거늘.

‘암흑 길드의 말도 일리가 있어.’

거기서 반대했기에 부득이하게 저들을 데려온 거였다.

암흑 길드에선, 교활한 도트리샤라면 보는 눈이 없는 줄 알아도 자기 입으로 가짜라는 폭로는 쉽게 안 하리라는 추궁을 해 왔다.

말할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짜 놓았거늘.

카피아는 처음엔 응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리가 있다고 여겨 결정을 바꿨다.

그전에 도트리샤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던 거야 루민트를 대놓고 보여 주는 짓을 했으니 이뤄진 일이고, 폐쇄된 구역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여기는…. 은폐되긴 했어도 길가라서 의심할 수도 있겠지.

‘참으로 끝까지 귀찮게 하는구나, 너는.’

루민트를 보여 줬을 당시 나를 경악하며 노려보던 그 밉살스러운 흰자위!

내게 굴복하기는커녕, 진짜 공녀를 죽이면 협상하겠다고 건방지게 나왔었지.

어디 두고 보자.

도트리샤의 간악함을 떠올린 입꼬리는 저절로 비틀어졌다.

루민트 패를 써 버린 이상, 암흑 길드의 지적대로 나머지 가족을 끌고 오는 일은 피하기 어려웠다.

카피아는 친절한 마리안으로 다시금 분해 도펠만 데려가려고 하였으나….

“안 됩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 도펠 도련님, 눈을 제대로 떠 주십시오. 나 마리안은 당신들의 편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놔두고는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지금도 밤에 잠을 수시로 깨고 힘겨워하는데, 저와 떨어지고 괜찮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펠은 늘 로브를 쓴 채, 숲에 오래 방치되어 썩은 등걸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 은자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삼 남매 중 부모님 곁에 남은 사람은 이제 그 혼자.

살아서 공녀 행세를 하는 도트리샤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믿기 어려웠다.

시오넬에 잘 있던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죽이려 한 자가 도트리샤였다면, 거기서 멀리 떨어진 주신전의 ‘누군가’들은 왜 그들을 구해 주려 하는가?

이토록 먼 거리에서 기가 막힌 시점에 찾아와서, 그들을 밀실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감금을 하고 말로만 보호하고 있지.

더군다나….

은자 마리안이란 사제는 항상 로브 차림에 눈도 보여 주지 않고, 언뜻 보이는 흑색의 머리카락은 가발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주신전의 사제 중 한 사람이라면 구태여 저렇게까지 가리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나?

카피아가 부채질한 의심은 다른 방향으로 튀어 온당한 의심을 빚어내고 있었다.

상대방에게 알려 주지 않는, 은밀한 꿍꿍이가 있는 사람은 카피아 혼자만이 아니었다.

도펠이 입을 꾹 다물자 카리스 자작이 나섰다.

“…은자시여, 저 또한 아들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카리스 자작.”

일부 화상을 입었으나 목숨에 지장이 없는 자작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저와 제 아내에게 세 아이들은 피붙이 그 이상, 목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도트리샤에 이어 루민트까지 잃은 지금, 도펠과 떨어져야 한다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허용할 수 없는 죽음이다.

카피아가 간절하게 바라는 바를 다 이룬 뒤에야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나 지금은 절대로 안 되는 일.

로브 속의 마리안은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암흑 길드의 의견도 수월하게 받아들인 터였다.

뭐, 난 몰라.

차후의 일은 알아서들 하라지.

카리스 자작가 역시 쓸모가 다하면 카피아가 뒷일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저들은 로브 속에 숨은 이가 은자 마리안이라고 생각하지, 성녀 카피아임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일이 끝나고 나서 마리안의 존재만 치워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황제가 진상을 알고 긍휼히 여기면 뭐, 외성벽을 수호하는 명예 기사직 하나쯤은 줄지도. 박봉의 연금을 받으며 제도에서 살면 시오넬보다는 출세한 삶이겠군.’

초라하고 낡은 무대는 준비가 되었고, 등장인물도 거의 다 왔다.

단 한 명, 간악한 도트리샤야.

왜 오지 않는 거냐….

끼이익-.

“……!!”

“왔군요….”

쉬잇, 쉬잇.

카피아는 뒤의 슬로트는 물론, 반대편의 도펠에게도 다시 한번 주의를 주고 구석을 향해 눈짓했다.

가짜 공녀의 토설을 끌어낼 부하 앙켈이 앞으로 냉큼 나섰다.

“오셨습니까.”

“아, 꺄악!”

빛이 거의 없는 내부를 둘러보던 도트리샤는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약속 장소에 오긴 했는데 인적이 너무 없어서 천천히 둘러보려고 하는 순간 말을 걸어오다니!

그녀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어서 오십시오, 가짜 공녀여.”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암흑 길드의 예상대로였다.

카피아는 그녀와 비슷하게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눌러쓴 도트리샤를 보며 조소를 날렸다.

드레스는 역시 어울리지 않아, 넌.

초라한 차림으로 돌아가서 사형수가 되어 죽을 날이나 기다리라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유로운 카피아와는 달리, 성녀 뒤편의 슬로트 경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주신의 계시라며?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은 어째 좀 묘하다.

꼭 함정을 파두고 누군가를 불러들이려고 하는 모양새 아닌가?

방금 들려온 목소리며 손짓을 보니, 여기에 온 이가 누군지는 간신히 알 법했다.

클라인 공녀 아닌가.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이런 외진 장소엔 왜 온 거지? 성녀님께선 계시를 받았다고, 놀라운 일이 벌어질 거라 하셨다. 그게 클라인 공녀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가짜란 말은 또 무슨 뜻이고.’

사실, 주신의 계시란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솔깃했다.

루야 성녀의 도래 이후 제국에서 주재하는 주신전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

주신전에서 앞으로 어쩔 거냐고 연이어 질책의 서신이 날아드는 지금.

성녀님이 뭔가를 해 준다면 한숨 돌리겠지.

그래서 왔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앙켈이 다시 한번 도트리샤의 자백을 끌어내려 했다.

“정녕 모르는 척하기입니까? 나는 주신전의 앙켈 사제입니다.”

“앙켈? 주신의 사제님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이름을 다 외우고 있으라는 거지? 주교님이라면 몰라도 난 그럴 시간 없어.”

“계속 발뺌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하!”

‘독하군.’

이 꼴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관람하는 클라인 공작의 생각이었다.

과연, 바로아의 말이 옳았다.

제도에서 멀지도 않은 여기서 일을 벌일 거라더니 그게 정말일 줄이야!

9서클의 마법사인 바로아는 완벽한 은신 마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이곳에서 벌어질 일과 올 사람이 누군지도 말해 주고 이 장면을 처음부터 다 보게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저 뻔뻔스러운 가짜까지 와서 저러고 있으니, 기가 막혀 입술을 자꾸 짓씹게 되었다.

저러니 남의 물건과 신분을 훔쳐서 여태 잘 살아온 거겠지만, 참으로 대단해.

그야말로 명배우가 따로 없다.

연극이 끝나고 이 위에 선 모두가 추락해 죽는 무대를 만들 수 있다면, 당장 올리고 싶을 정도로!

“정말…!”

앙켈의 추궁에 이상함을 느낀 도트리샤는 크게 소리쳤다.

“성녀님은 어디에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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