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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세 기사단의 화해 (120/148)

120화 세 기사단의 화해

“그아아아아아!”

“으헉!”

“으으윽!”

“뭣들 하는 거냐!”

결국, 뒤에서 제3군이 더 다가오기도 전에 드라칸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땅이 진동할 만큼 꼬리로 바닥을 철썩철썩 갈기자, 흙과 돌과 풀뿌리 등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이 엄청나게 튀었고 3군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대열은 순식간에 또 무너졌고, 어디선가 날아온 큰 돌에 해밀턴 경이 헬멧을 강타당하고 넘어졌다.

충격이 상당했는지 축 늘어지는 몸.

할 수 없나!

카셀은 그를 부축해 곁의 기사에게 넘기고 고함을 질렀다.

“제3군! 당장 뒤로 물러서서 차분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하라!”

드라칸 한 마리를 상대하는 모의 전투가 이렇게나 어려웠을 줄이야.

결국, 그날 카셀은 제압전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해밀턴을 대신해 3군 모두를 이끌고….

지친 드라칸을 정해진 선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기사들이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날개를 찢거나 타격을 주진 못하였으나,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지능이 높은 드라칸은 다친 곳도 없으면서 눈치껏 픽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척했다.

“와아아아!”

“이겼다!”

“하…. 모자란 놈들.”

흙투성이에, 갑옷이 엉망진창이 된 세 기사단의 기사들이 한데 뒤엉킨 모습을 보고 발리엣이 혀를 찼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황실 기사단의 위엄을 드러내기는커녕, 해밀턴은 초반에 쓰러져 지금에야 겨우 일어나고 있고 카셀 저놈이 다 통솔해 버렸어!

“…흠.”

그나마 능력은 있었지, 기사들을 크게 다치게 만들지도 않았고.

발리엣 경의 눈이 엉망진창이 된 세 기사단을 차례로 보았다.

어디의, 누구 밑에 있든 다 소중한 인재들.

흙투성이가 된 꼴을 보고 있자면 한심한 마음이 안 들 수야 없으나, 어쨌든 다행이다.

겨우 눈을 뜬 해밀턴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소… 송구합니다… 단장님….”

“잘도 쓰러지더군.”

“면목 없습니다.”

“가세!”

발리엣 경의 눈은 어느새, 가벼운 부상이나 타박상을 입은 기사들을 확인하는 카셀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에게 직접 해 줄 말이 있었다.

카셀은 무수하게 선 기사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사도 아니고 다들 기사인지라 자존심이 있어, 부상이 있어도 없다고 거짓말로 숨길 가능성도 컸다.

소속이 어디든 빠르게 찾아내서 치료하는 편이 낫기에, 그의 눈은 쉴 틈이 없었다.

그가 맨 뒤편의 기사들을 노련하게 바라볼 때였다.

“블루 로즈 기사단장.”

“발리엣 경…! 해밀턴 경도 오셨습니까.”

카셀은 돌아온 해밀턴 경까지 잠재적 부상자로 보느라, 발리엣이 그를 무어라 불렀는지 미처 듣지 못했다.

“과연 그대는 한 기사단의 수장을 맡을 자격이 있군.”

“제게 한 말씀입니까?”

발리엣 경이 재차 칭찬하자, 카셀은 그가 자신을 새롭게 평가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전의 그는 카셀을 업신여기고 한심하게 보기만 했었지.

눈총을 받던 시간이 괴롭거나 억울하진 않았다. 텃세란 어딜 가도 있으니.

“그렇소.”

이제껏 살아오며, 카셀은 누군가의 칭찬으로 쉽게 들뜨지 않으려고 애쓰는 주의였다.

그러나 발리엣 경의 재정의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 최고의 검사에, 현역 소드 마스터.

막말로 타국으로 망명해, 그 나라 공주와의 결혼으로 차기 국왕 자리를 노려도 이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남자.

어느 나라든 쌍수를 들고 다 환영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충신으로 남은, 최강의 사내가 자신을 다시 봐주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

“내가 그간 그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오늘에야 알았소.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구분해 전략을 세우다니 훌륭하군.”

“잘못된 판단으로 기사들을 위험에 빠트려 부끄럽습니다.”

해밀턴 경이 고개를 푹 숙이자, 카셀은 그를 살폈다.

깨어났을 때도 잠깐 보았으나 크게 다친 눈치는 아니다.

다행이군.

발리엣이 웃었다.

“하하, 카셀 경은 그 와중에도 해밀턴을 살피고 있군, 못 당하겠소. 안 다쳤으니 마음 푹 놓으시오!”

“모두가 제국의 귀한 인재들입니다. 한 명의 기사라도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카셀이 진심으로 말하자 발리엣 경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 마디 말보다 더한, 눈빛으로 마음이 서로 통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고작 전투 한 번으로 화해 아닌 화해가 이루어지는 사이.

지금도 죽은 척하는 모모를 힐끗 보지도 않은 바로아가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구태여 비행 마법까지 쓰고 있을 필요는 없었으나, 때로는 무력시위도 필요한 법.

이런 곳에 쓴 마나는 아깝지 않다.

‘흠, 잘됐군. 놈들 실력은 시시하지만 못 쓸 수준까진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고대의 투사들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쇠퇴한 전력이다.

대륙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제국이 이 모양이니 다른 나라야 뭐….

원래 그는 이걸로도 잘 안 되면 비밀리에 숨겨 놓고 기르는, 데샤루트라는 해츨링까지 내세우려고 했다.

조금 흉포한 드라칸 새끼로 위장해서 내놓으면 꽤 볼만했을 텐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니 이번 일도 무사히 마무리인가?

씩 웃은 그가 기사들이 모인 공터와 조금 동떨어진 구역에 발을 디뎠을 때, 아래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이가 있었다.

일부러 만남을 회피하던 클라인 공작이었다.

꽤 집요하군.

눈빛이 마주쳤음에도 침묵하는 바로아를 향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의도한 바였는지, 공작의 곁에는 시종이 한 명도 없었다.

“부탁하오, 선대 마탑주여. 우리 티아나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면 부디 도와주시오.”

“…….”

“나는 진실의 실마리를 가까스로 잡을 수 있었소. 그건 내가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진짜 딸을 잃고도 되찾은 줄 아는 내 부인을 위해서 나서 주시오.”

클라인 공작은 무서운 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가짜 공녀의 거짓된 애교에 홀딱 빠져 있다.

이 상태에서 진실이 밝혀지면 현실을 인정하기는커녕 도피하려 들지 않을까?

소피아의 다리 부상으로 시간이 비는 동안, 그는 그레이스 수도원에 다녀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섯 살 남짓의 소녀, 모건 르 페이와 모르가나란 이름을 가진 아이를 구해 준 마법사의 이름.

그 또한 바로아!

우연일 리가 없지.

루비 펜던트를 바로아에게 맡긴 일도 마찬가지일 거다.

공작은 살면서 남에게 이토록 절박한 말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 최초를, 가엾은 딸과 부인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나섰다.

“부탁하오.”

클라인 공작은 몇 번을 거듭 고쳐 부탁했고, 바로아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아가 공작을 데려간 장소는 미쥬앙 호텔 최상층이었다.

공작의 예상대로 선대 마탑주는 그의 딸에 대해 많은 사항을 알고 있었다.

설마설마하였으나 카피아가 태어나지도 않은 페이의 인생을 망치는 첫 주범이었다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구려.”

“그렇소.”

바로아의 말투는 존대에서 하오체로 바뀌어 있었으나, 복수심에 불타는 공작에게 그런 건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는 딸의 은인이다.

최소 두 번 이상 목숨과 운명을 구해 준!

바로아는 분노하는 공작을 향해 말했다.

“카피아는 새로운 성녀의 등장으로 인해 어차피 권력을 거의 다 잃은 처지로 전락했지. 자기가 세워 둔 복안이 있다고 해도, 성녀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렸으니 성공하기 어려울 거요.”

“루야 성녀께는 후에 공물을 보내야겠군.”

그 일이야 나중에 천천히 해도 상관이 없다.

머릿속으로 과거사를 정리한 공작은 심호흡을 하고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아를 통해 친딸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간접적으로 알았다.

클라인 공녀의 지위를 되찾고 싶진 않으나 가짜를 집안에서 몰아내 달라는 거겠지.

정의와 복수를 위하여!

‘무조건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자. 그러다 보면,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우리 집에 다시 와 줄지도 모른다.’

제발 그날이 꼭 오기를.

희망은 사람을 살게 하는 마지막 축복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클라인 공작은 바로아에게,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가짜 공녀가 암흑 길드에 모종의 의뢰를 넣었다는 말을 듣고도 바로아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이미 훤히 아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차게 웃는 모습이, 클라인 공작에겐 아름다운 사신처럼 보였다.

강력한 마법사가 이 일을 도우니, 도통 실패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공녀의 진짜 정체가 도트리샤 카리스임을 폭로하고 성녀는 지금까지 지은 죄목으로 단죄하였으면 하오.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바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하면 카피아에겐 가짜 공녀의 효용이 사라지는 셈이로군.”

“내 입장에서 성녀의 곤란을 고려할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오.”

공작은 이 일로 인해 주신전과 평생토록 틀어진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카피아가 주도적으로 저지른 음모라 해도, 주신전도 책임이 막중하다.

조작된 검증이 이루어지는 동안 관리를 하지 못한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모건 르 페이는 그러길 원치 않았소. 카피아가 이를 알게 되면 죄목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자기가 납치한 카리스 자작가의 사람들을 몰살할 게 뻔하니까.”

“그건…!”

그래서 쉬이 움직이지 못한 건가!

강력한 마법사, 선대 마탑주의 비호를 받는 페이가 간편한 복수를 망설인 이유가….

원수의 가족이 죄 없이 말려드는 일을 꺼렸기 때문이라니!

내 딸아….

너는 왜 이리도 선량한 거냐.

공작은 페이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자기 억울한 입장만 종일 생각해도 모자란 처지인데 남을 위하다니.

루야 성녀의 히논 왕국 입성 때, 팔리듯 결혼하게 된 바바라 가헬을 성녀 보좌역으로 쓰자는 의견을 낸 일도 장하거늘!

공작도 황제나 황태자 앞에서 감히 못 꺼낸 말을 했어, 우리 딸은.

그런 아이가 내 딸이야!

새삼 자랑스러움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나저나 이 공간이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아시오?”

“음?”

느닷없는 바로아의 말에, 공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쥬앙 호텔의 최상층.

공작은 황궁이나 공작저에서 타인과 대화하는 일을 선호하기에, 여기에는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그대의 큰아들과 페이가 종종 만났소. 참고로 그도 기억이 돌아와 있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라고 했었나?”

“뭐… 뭐라고 했소?”

“페이를 통해 들은 바로는, 그가 로지아에서 제도로 돌아온 이유는 기억이 곧바로 떠올라서가 아니라더군. 그냥 꼭 여기에 와야만 한다는 자각이 들었던 게 다라고 했소.”

이럴 수가!

카셀이…! 

공작은 충격으로 인해 눈꺼풀을 떨면서, 여동생을 향해 지극히 무심했던 카셀의 행적을 되짚었다.

그래…. 그래…. 그랬구나.

네가… 그래서…!

왜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그의 진짜 여동생을 알아본 즉시 정체를 말하지 않았냐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클라인 공작, 그 자신이 진정한 눈을 뜨기 전에 말해 봐야 소용이 없었겠지.

사랑스러운 공녀를 되찾은 줄로만 알고 팔불출로 굴던 한심한 공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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