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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당신의 곁이라 웃을 수 있어 (117/148)

117화 당신의 곁이라 웃을 수 있어

피부에 남았던 물기가 톡톡 소리와 함께 스며들면서 반짝이는 윤기를 남겼다.

공연히 서두르다가 이 연약한 손을 다치게는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만 한숨을 쉰 페이는 조그마한 화장품 통을 꺼냈다.

뭐라더라…. 산양유? 크림?

루키우스가 약초를 많이 만지는 손을 걱정하며 준 선물인데, 가져와서 마침 잘 되었다. 원료가 암소든 산양이든 몸에 바를 수만 있으면 그만 아닐까?

서둘러서 통을 막 여는데 시야에 웬 오똑한 코가 쑤욱 들어온다.

장난꾸러기 유르디의 짓이었다.

“앗, 유르디 양…!”

“킁… 크흐응…. 냄새 좋다.”

“먹으면 안 되어요. 바르는 거니까요. 자아, 손 줘 보세요.”

조그마한 손에 크림을 얇게 펴 바른 페이는 손바람을 일으키며 어서 마르기를 기다렸다.

오찬에 늦으면 안 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과는 달리 태평한 유르디의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통을 집었다.

“으응, 페이 언니. 나 이것 가지면 안 될까?”

루키우스가 준 선물인데….

그에게 받은 건 많고도 많기에, 아깝다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함부로 줬다는 오해를 사는 게 두려울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는 루키우스여서.

페이는 오찬이 끝나고 시간이 나면 사죄의 편지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요. 오찬 시간에 이 통을 만지작거리면 안 되니까 끝나고 드릴게요.”

“히히, 약속!”

“네, 약속.”

유르디는 신이 나서 손가락까지 내밀었고, 페이는 아직 미끌거리는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자기 것을 걸어 주었다.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황궁 한복판에서 왜 이런 시중을 들고 있냐고.”

이 꼴을 보고 있던 도트는 멀리서 보아도 알 정도로 한숨을 푹 쉬면서 불평을 내뱉었다.

소리는 안 들린대도, 가슴께가 과장되게 들썩거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복도에 차례로 멈춘 사람들이 다 보고 있었다.

오늘의 오찬을 함께하기로 한 클라인 공작과 황태자 실라스였다.

“…….”

“먼저 들어가지. 저쪽에서 하는 일이 끝나면 그때 불러오게. 괜히 다가서서 재촉하지 말고.”

“예.”

붉은 서코트를 입은 시녀가 고개를 숙였고, 두 사람은 먼저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으로 들어온 공녀는 그들을 발견하고 눈이 커다래진 뒤, 거의 쉬지도 않고 입술을 쫑긋거렸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오셨군요…!”

“…….”

클라인 공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이 두 눈 뜨고 버젓이 다 본 광경이 기가 막혀서, 수고했냐는 입에 침 발린 인사도 해 주기가 싫었다.

뭐? 오찬이 코앞인데 귀한 티아나더러 물에 꽃잎을 띄우라고 해?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가늠도 안 되는 화장품까지 요구하고…!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건, 티아나를 레이디 모르가나도 아닌 너, 너 하며 불렀다는 사실과 마법을 쓰게 만들고는 그걸 두고 추궁했다는 점이었다.

괴팍하고 교활한 것!

그리고 정말 모르고 있는 건가?

얌전한 라냐 황비는 자제하는 편이나, 만약 지금까지 황후가 살아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

나이가 찼고 데뷔탕트를 치른 클라인 공녀는 황후의 시녀가 되어, 지금 페이가 하는 일들을 손수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황궁에 며칠씩 들어와서 타인의 치장과 시중을 들어주는 일상들.

신분 높은 여성의 말벗을 하고, 마음을 감싸 주는 대화를 하고, 돌봐 주는 일은 결코 천하지 않다.

에이나로 살 적엔 사람 대하는 일에 오히려 약했던 티아나는, 저렇게 무난한 사람으로 성장했거늘!

‘네가… 진짜 공녀답구나. 공녀로 단 하루도 살아 보지 못한 페이야, 네가 과연 어느 면이든 도트리샤보다 훨씬 낫다.’

클라인 공작은 답답한 가슴을 치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악의 씨앗이 싹을 틔워 보여 주는 모습이 죄다 못난 모습인데 망설일 게 무언가.

그로부터 며칠 후, 유르디의 일은 잘 수습이 되었다.

유르디와 그 병사 출신 보호자를 분리하고, 페이가 상냥하게 굴어 줘 유르디가 마음을 열어 주어서였다.

내 말을 안 들으면 엄마의 묘를 파헤치겠다는 압박을 받았다는 증언이 결정적이었지.

그런 아픔을 어렵사리 털어놓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경악했다. 이런 사이였다는 걸 모르고 일이 진행되었다면 유르디는 또 고통을 겪었겠지.

뭣보다 루프르델, 그자가 과도한 요구사항을 내놓는 바람에 설득이 난항을 겪은 게 오히려 호재였다.

제국의 황비가 이국 출신의 공녀와 자기들을 맞으러 오니, 기가 살았는지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댔단다.

히논 왕국으로 당당히 개선할 수 있도록 제국의 군사를 빌려 달라, 이쪽이 새 성녀를 내밀어 책임이 있으니 배상금을 내놔라, 만약의 경우에 도피처로 삼도록 제도 라피스에 대형급 하우스를 마련해라….

첫 요구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기에 협상은 테이블을 차리지도 못하고 지지부진한 터였다.

이런 와중에 진상이 당사자의 입으로 밝혀졌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둘은 따로따로 히논 왕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유르디는 편하고 호화로운 마차를 탔고 루프르델은 협박죄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근 일주일을 황궁에서 보낸 페이도 마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 내막이 있을 줄이야 몰랐으나 잘 해결되었으니 안심이지.

루야가 돌아가는 유르디를 박대할 것 같지도 않고….

내내 바늘 같은 시선을 보낸 도트도 떠났으니 페이도 귀환할 시간이다.

“레이디 모르가나?”

“황태자 전하!”

그녀를 불러 세운 실라스는 웃으면서 조그마한 선물 포장을 내밀었다.

“그간 고생 많았소. 내 성의 표시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었으면 하오.”

“아…. 감사합니다.”

페이는 부드럽게 웃고는, 황태자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탔다.

이게 뭘까.

손가락 몇 개가 잠시 망설이다가 리본을 풀었다.

‘어?’ 

안에는 금박과 세공으로 장식된 둥근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무심코 여는 순간 머리를 친 생각과, 뒤늦게 코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럽고 단 향기-

‘화장 크림이잖아? 어…. 이거…. 설마…!’

대야에 손을 담그고 까르르 웃던 유르디의 웃음소리가 귀로 들려오는 듯하다.

다 봤구나…. 정말, 황궁의 눈과 귀는 수도 없이 많다더니.

근처에서 인기척을 못 느꼈는데 세세한 대화까지 다 알려졌음을 간파한 페이의 입술이 딱 벌어졌다.

그럼, 그날 황태자와 같이 있던 클라인 공작도 틀림없이 봤겠지…!

“하아….”

한숨을 쉴 일이 아닌데 저절로 나온다.

풀려나가는 실이 워낙 많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 사람 심경이 무척 복잡할 텐데….

생각이 어지러워진 페이는 마탑에 돌아가자마자 루키우스의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그녀의 약은 역시 그가 최고였다.

그는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를 상냥하게 안아 주었고.

* * *

‘저쪽은 곧 터지겠군.’

루비 펜던트 복구 이후로 사방의 일을 감시하던 루키우스는 페이가 없는 틈을 타 피식 웃었다.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이 온통 그런 류라, 왜 웃었냐고 물어보면 답하기 곤란해서였다.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한다지만 보람은 있었다.

클라인 공작은 인간 중에는 제법 무서운 자다.

분명…. 페이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반성조차 하지 않은 저 가짜 공녀를 무섭도록 몰아치겠지.

단순히 화가 났다고 목 베는 수준을 넘어서 말이다.

남은 건 즐거운 관람.

“이것 말고 뭐 더 할 일은 없나?”

움찔.

루키우스가 중얼거린 말에, 바구니에서 나와 창문의 햇볕을 쬐던 모모가 미약하게 떨었다.

주인이 심심하면 자고로 밑에 딸린 노예가 고달파지는 법이다.

공연히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드라칸의 생각이 난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모모, 너 이리 좀 와 봐.”

“삐… 삐이익….”

“안 와? 간이 부었네, 진짜 안 오겠다는 소리야?”

재수가 없다.

페이는 하필, 도서관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럴 줄 알면 낮잠 그만 자고 조용히 따라서 갈걸!

가느다란 다리로 떨면서 걸어간 모모의 이마에 손가락이 딱, 튕겨진다.

“뿌삐이잇!”

“요즘 등 따뜻하고 마음 편하다고 정신 놓고 살지, 아주?”

아프다고 난리를 쳐도 봐주기는커녕 윽박지르는 전 주인, 아니 진짜 주인.

모모는 눈에서 온갖 별과 행성이 돌아다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네가 그간 페이를 제대로 보필하지 않았다는 정황을 몇 번이나 봤는데 그간 계속 봐줬어. 그런데 참을성이 다 사라지려고 하네?”

“삐… 삐삐익?”

“마법을 거드는 건 유니콘이 낫고, 기동성은 실피드가 좋고. 넌… 독보적인 거라곤 못생기고 괴팍한 성품을 가진 게 다 아닌가?”

청천벽력 같은 평가에, 모모는 억울해서 다리를 동동 굴렀다.

정해진 대로 생겨 먹었을 뿐인데 왜 못생겼다는 말이나 들어야 하나?

따지고 보면 드라칸이나 드래곤이나 외양은 거의 비슷하면서!

충격받은 모모를 덩그러니 놔둔 루키우스는 혼잣말을 했다.

“슬슬 일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으니 앞으로는 더 바빠지려나? 그 두 멍청이를 끝장내기 전에 페이하고 오붓하게 데이트도 해야 할 텐데.”

클라인 공작 부인이 느닷없이 다리를 다쳐 폭로 시기가 늦어진 건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뭐, 그 덕에 공작이 여러모로 무서운 벌을 고려해 뒀을 테니 손해는 없다.

남은 건 페이와 다닐 데이트 코스 짜기겠지.

어디로 가면 좋으려나?

‘흠, 이번에야말로 아무 일도 안 터질 한적한 장소가 좋겠지.’

그의 레어와 아공간, 히논 왕국…. 교외는 여러 차례 나가서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세계 지도를 펴놓고 휘파람을 불자, 그새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느닷없이 튀어나온 새로운 성녀의 일은 정말로 잘 된 거다.

주신의 안배 덕택으로 손 안 대고 코를 풀다니!

고대의 드래곤 몰살 이후로 이득을 본 건 이게 처음 아닌가?

물론 카피아에게 저주를 걸어 둔 루키우스의 공로도 컸으나, 그는 자기가 한 건 원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주의였다.

그때, 문고리가 달각거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루키우스!”

“왔어?”

연금술 연구를 하겠다면서 연구실로 갔던 페이가 에이프런을 두른 채로 돌아왔다.

얼른 봐도 위험한 약물 냄새가 안 나는 걸 보면 성공했거나, 안 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의 시선이 쭉 따라오는 눈치를 챈 그녀가 웃었다.

등 뒤에 숨겨 둔 무언가가 있긴 하다.

“후후후.”

“오늘은 뭘 만들었어?”

“짠! 세미 엘릭서예요. 볼래요?”

그녀가 내민 건 마개를 닫아 둔 플라스크였다.

진짜 엘릭서의 황금빛과는 비견하기 어려우나, 옅은 금색의 물이 제법 넘실거려 보기 좋았다.

“아! 이거 마개 밑에 묻으면 한 방울이라도 양이 줄어들어서 아까운데.”

내용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히 내려 둔 페이의 머리카락으로 루키우스의 손가락이 뻗어 갔다.

“잘했어. 레시피를 완벽하게 지켰네.”

“헤헤, 연구실 담당 교수님도 보고 놀라시더라고요.”

조제에 몰두하느라 하나로 질끈 묶은 연핑크빛 머리칼이 그의 손에 잡혔다.

끈을 풀어 헤치기만 하면 금세 나풀거릴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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