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도트와의 말다툼
“자기 주제도 모르고 평생 쳐다볼 기회도 없는 제국의 황실에 발을 떡하니 들이다니.”
“…….”
도트의 말, 교묘하게도 유르디와 나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구나.
페이는 도트의 차디찬 말을 들어도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정말, 어림없는 짓이야. 푸른 피를 타고난 귀족들만 와야 하는 곳에 오긴 어디를 와?”
대꾸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만 아는 사람을 험담하는 일에 함부로 가담하지 않을 거야.
페이는, 가만히 예전을 떠올렸다.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황궁에 올 적에는 상냥하고 지혜로운 에이나로 보이려 했던 안타까운 과거를.
난… 그래, 노력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러니까 오늘도 할 수 있어.
그러나 도트의 패악은,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커지고도 남는 무서운 성질을 지녔다.
도트는 저도 모르게 히죽거리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다 예전만 못해.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하는 작자들은 잡아다가 매를 치고 노역에 종사하게 만들어야 마땅하지 않겠어? 세상이 너무 못쓰게 변했다니까.”
모름지기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페이는 서늘한 눈으로 도트를 흘겨보며 물었다.
“방금 그 말, 진심입니까?”
“뭐?”
페이는 다시 한번 똑똑히 말했다.
“아무리 공녀님이라 할지라도, 황실의 처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하다니 놀랍습니다.”
“내가 언제…!”
“제국의 황실에 발을 함부로 들였다고 불평한 대상이 누구인지요. 답하시지 않는다면, 방금 하였던 말을 그대로 기술해서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도트의 목덜미에 싸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실수했다, 너무 흥분했어.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과하면 되련만, 그러기엔 공녀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트는 한참을 씩씩대다가 울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변명했다.
“읍… 흐읍! 아니, 뭐. 그냥 혼잣말이고 대상은 무슨…! 갑자기 불려 나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지….”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황궁에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많습니다.”
페이가 야무지게 말하고 입술을 닫자, 도트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 되었다.
‘누가 그걸 모른대! 알아, 안다고. 네까짓 게 말 안 해도 안단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니까 신경이 쓰여서 말실수한 건데!’
“…어… 어딜 쳐다봐?!”
이 와중에 도트는, 푸릇푸릇한 연둣빛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소름이 돋아 목청을 돋웠다.
“분명히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시지요.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해 놓고 가문의 이름으로 빠져나가려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적어도 황실의 권위와 관련해선 그렇습니다.”
“알았다니깐!”
도트는 배알이 뒤틀리는 듯했으나, 약점을 잡힌 게 찔려서 씩씩대며 입을 다물었다.
안 하려던 말싸움으로 반격을 가한 페이의 눈은 금세 무심해질 따름이었다.
이틀 후, 정오 무렵.
“크으….”
“클라인 공녀? 점심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우리 놀아요.”
유르디의 순진한 눈빛, 또박또박한 말투.
그게 도트를 화나게 만드는데, 더 억울한 점은 이 촌뜨기 소녀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한다는 거였다.
사생아 주제에, 타국의 귀빈으로 왔으니까. 감히 날 두고 공녀 운운해도 화를 낼 수가 없어!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꾸하는 도트의 눈시울은 분함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황실에선 무슨 생각인 건지, 히논 왕국에서 온 유르디를 당분간 떠맡기로 했다. 예의 그 골치 아픈 ‘보호자’ 루프르델을 잠시나마 설득하기 위해서겠지.
그래, 그거야 이해하지. 그런데….
왜 철도 안 든 시골뜨기 돌보는 일을 나한테 떠넘기는 거야.
어째서 공녀인 내가 시녀와도 같은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정확히는, 클라인 공녀인 도트 혼자만의 책무가 아니었다.
얄미운 랏셀 공녀는 쏙 빠지고 눈엣가시인 모르가나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
그 사실이 도트를 더욱 복장 터지게 만들었다.
응접실에서 둘만 남았을 때 알아서 빠지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버티다가 감히 황궁에서 숙식을 해…!
그나마, 아이리스 별궁으로 장소가 한정되어서 다행이었다.
여기라면 성녀가 오진 않겠지. 설령 온다고 해도, 통제 중이니 들어오지 못할 거야….
곤란한 손님이 온 탓에, 별궁의 출입은 철저히 막힌 상태였다.
공작저에서 불려오고 돌아가지 못했기에 어머니께서 날 기다리고 계실 텐데.
도트는 클라인 공작 부인의 부드러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기 계셨군요, 유르디 양. 클라인 공녀님.”
‘흥!’
그나마, 전과는 달리 못된 모르가나가 클라인 공녀라고 제대로 부른다는 점이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그래!
난 공녀고 넌 아무것도 아니야.
도트는 샐쭉한 표정을 짓고는 머릿속으로 나쁜 생각을 해냈다.
‘아무래도 천한 것들끼리 잘 어울리지 않겠어?’
“유르디 양?”
“네?”
도트는 유르디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손이 너무 거칠어졌네요. 향 나는 물에 담그고 암소의 젖으로 만든 크림을 발라야겠어요.”
페이는 말없이 시간을 가늠했다.
곧 정오.
다이닝 룸으로 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숫제 목욕을 하라는 투의 말이 누굴 향한 음모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물을 데우고 입욕제를 푸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흘러갈 텐데 어쩌려는 걸까.
“그게 뭔데요?”
“호호, 왕족의 소양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랍니다.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응당 도울 것이니 명령만 내리시면 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유르디는 명랑하게 말했다.
“할래요!”
“…….”
도트는 거만하고 사악한 미소를 씩 짓고 호령했다.
“뭐해, 준비 안 하고.”
유르디의 침실 겸 놀이방에는 셋뿐이었다.
유르디, 클라인 공녀, 페이.
페이는 입만 가볍게 놀리고 일을 떠넘긴 도트에게 분노를 보이지 않고 고요히 대꾸했다.
“그건, 오찬이 끝난 후에나 할 일입니다. 다이닝 룸으로 갈 시간이 삼십 분 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 물을 준비해서 씻고 크림을 발라도, 마르기 전에 식기를 만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으응?”
“손이 크림 때문에 미끄러지거든요. 미루면 안 될까요?”
페이의 상냥한 설명에, 유르디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페이 언니 말대로 할게.”
‘이게 말 몇 마디로 날 무시해?’
오기가 생긴 도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나, 지금부터 준비하면 될 걸 그럴 이유가 있나? 그리고 점심시간을 뒤로 늦추면 충분할 텐데.”
건수를 하나 잡은 이상, 그냥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말 좀 잘못했다고 황태자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르겠다고 말한 못된 것!
도트의 눈에 페이는, 여전히 바보에 멍청이라 자신에게 당해야만 하는 모르가나였다. 그래야만 했다.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된 이상, 예의를 차려 가며 너를 잔뜩 곤란하게 만들어 주마. 다른 곳도 아닌 이 황궁에서 말이야.’
예상대로 페이는 반박을 해 왔다.
“그렇지만….”
도트는 눈썹을 확 찌푸렸다.
“지금이야 유르디 양이 아이리스 별궁에만 있지만, 이야기가 다 끝나서 갑자기 황제 폐하 앞으로 불려 가면 어쩌려고? 황태자 전하도 계실 텐데! 손을 잡아 보고 너희들은 그동안 뭘 했냐면서 불호령을 내리면 나더러 어쩌란 거야.”
유르디가 있다고 해서 반말을 뻥뻥 해 대는 도트를 노려보고 싶지도 않았다.
페이는 무척이나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럼, 우선 다이닝 룸 근처로 가시죠. 입구 근처에 그늘 쉼터가 있으니 그곳에서 대야를 놓고 손을 잠깐 담갔다가 빼도록 해요.”
“응!”
둘의 기 싸움을 아직 알지 못한 유르디가 순진하게 답했다.
페이는 유르디를 자리에 안내하고 빈 대야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크리에이트 워터.”
“우와!”
반짝거리는 금속 대야에 찰랑거리는 물이 채워졌고, 페이의 주문은 연달아 마법의 효과를 일으켰다.
“웜쓰.”
“김… 김이 나요! 물에서!”
마법 사용을 사전에 허가받진 않았으나, 나중에 고하면 되겠지.
어차피 공격력 없는 낮은 서클의 마법이고 용도가 명확하기에, 추궁을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대야에 물을 채우고 순식간에 데운 페이는 일어섰다.
“유르디 양, 물을 따뜻하게 해 뒀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응?”
그녀는 정원으로 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치자나무를 찾았다.
하얀색의 꽃 몇 송이를 딴 그녀는 대야에 띄우고는 유르디의 손을 살며시 잡아 물에 넣었다.
과연, 도트의 말대로 손바닥이 거칠긴 하다.
‘고생을 많이 한 걸까.’
국왕의 피를 이었대도, 하녀가 거뒀고 엄마를 일찍 잃은 후엔 병사의 집에서 자랐다고 하니…. 느긋하게 살 여유는 없었겠지.
이런 소녀를 보면서 긍휼함을 느끼지 못하면 악인일 거다.
다른 나라의 황궁에서 보내는 호사스러운 휴가가 부디 기분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했다.
페이 역시, 반나절에 불과했으나 루키우스의 아공간에서 보낸 황홀한 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온화해지곤 하니까.
“따뜻하다.”
“기분 좋아요?”
페이의 다정한 말에, 유르디가 웃다가 말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 네에! 장작이 비싸도 엄마가 씻을 물은 늘 데워 줬어요.”
“그랬군요.”
“데운 물은 얼마 없으니까 물장난하지 말라고 늘 혼났고요.”
“여기서도 안 돼요. 손만 잠깐 담갔다가 말리고 크림을 바를 거니까요.”
보자 보자 하니까 날 따돌리고 한가롭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어?
둘의 다정한 대화에 심사가 뒤틀린 도트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굴어서 언제 끝내려고?”
“그건….”
도트의 괴팍함이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도대체가, 황궁에서 겁도 없이 마법을 덜컥 쓰는 건 어쩌자는 거지? 시간이 걸려도 당연히 원칙대로 해야지. 주변에 하녀가 없으면 물을 직접 데워서 들통에 담아 오든가 해야 하지 않겠나?”
한층 거만을 떨며 내놓은 말에, 도트는 자못 뿌듯하기까지 했다.
페이는 허가 없는 마법을 썼다는 약점은 인지하고 있기에, 차분하게 대꾸했다.
“나중에 사용처를 말씀드리면 됩니다, 클라인 공녀님.”
“내가 말한 건 원칙이야, 원칙!”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했으면 향을 품은 물이니, 크림을 바르는 일을 추천하는 건 미루지 그러셨습니까? 오찬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서두르지요. 유르디 양? 손을 꺼낼게요.”
“으응.”
‘이게…!’
페이가 도트의 말꼬리를 잡아서 역으로 훈계를 하자, 그녀는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 되었다.
남의 눈이 없다고 해서 감히 내게 말대꾸를 하다니…!
페이는 유르디의 조그마한 손을 부드러운 수건에 감싸 닦고, 손가락으로 살살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