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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언젠가는 (115/148)

115화 언젠가는

도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클라인 공작 부인을 반드시 붙들어야 한다.

만에, 만에 하나라도 진짜 정체가 발각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날 감싸 줄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기에 도트는 베갯잇을 꽉 붙들고 달콤한 말을 쏟아붓기 바빴다.

공작은 그날부터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악몽 아닌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꿈에선 호통을 치며, 저 가짜 공녀를 당장 묶어 끌어내라고 이르고 지방 영지로 내려보내 밭을 갈게 했거늘.

최소한 십 년에 이르는 노역을 끝마치면 당장 처형하라고 명령까지 시원하게 내렸는데, 그 모든 일이 꿈이라니!

꿈에선 통쾌했는데, 깨고 나면 저주받아 마땅한 그것이 아내의 침실에 들락날락하고 있으니 심사가 몹시 불편했다.

주치의가 ‘이젠 괜찮습니다’라고 말만 하면 내 당장에…!

집무실에서 혼자만의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공작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잠깐, 하나를 놓쳤군. 우리 티아나가 가지고 있던 펜던트를 선대 마탑주에게 맡겼다고 하지 않았나?’

그 당시에는 루비 펜던트가 과거에서 봤던 그 물건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금 떠올려 보니, 묘한 점이 하나 있다.

선대 마탑주 바로아가 활동한 시기와 공녀가 주신전으로 돌아오기로 약정된 해가 완벽하게 일치해!

우연이라면 우연이나, 그냥 흘려보내기엔 걸리는 점이 있었다.

‘둘이 전에도 만난 사이… 혹시, 그가 우리 딸을 구출해서 수도원으로 맡겼다면…! 설명이 된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둘은 최소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야!’

안 그래도 루비 펜던트는 두 달 이후에는 돌려주기로 했던 물건.

어차피 다시금 만나기로 된 사이 아닌가?

하는 일이 없는 김에 확인이라도 해야겠지.

클라인 공작은 마탑에 급히 전갈을 넣었으나, 바로아는 만남을 승인해 주지 않았다.

안부를 위한 서신에 펜던트의 일을 슬그머니 끼워 넣자 날아온 답장에는, 펜던트만 따로 보내도 된다는 완곡한 거절까지 있고.

낭패였다.

마탑에서의 충격적인 일 이후, 열흘째.

황궁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공작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공작저에 돌아왔을 때였다.

놀랍고도 반가운 얼굴!

“아니!”

“…….”

“나리, 오셨어요?”

손님이 와 있다길래 무심코 응접실에 들러 얼굴만 보이려던 공작은 깜짝 놀랐다.

내 딸, 티아나가 와 있어!

소파에 앉은 페이가 그를 슬쩍 돌아보지 않는가.

오늘은 거의 마법사 차림이라 그런지, 레이디 모르가나보다는 페이로 보였다.

냉랭한 얼굴에다 입가엔 웃음기라고는 없었으나, 환영이 아닌 진짜기에 감격스러웠다.

공작은 두 눈을 비비고, 당장 달려들어 네가 내 딸이라고 고백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물었다.

“부인께서 초대하셨소?”

“티아나는 퀘이사 백작가에 보냈어요. 거기 백작도 영지에 내려가서 일이 바쁜지 통 올라오질 않고, 백작 부인도 조만간 돌아가서 가을께나 온다네요.”

누가 뭐래도 공작 부인의 마음에 든 사람은 그, 그 가짜 공녀인가 보다.

묻지도 않은 말을 왜 하나.

공작은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랬나.”

“인사차로 급하게 보냈고 여기 레이디 모르가나는, 전에 못 한 대접을 하려고 초대했어요.”

“잘했소.”

공작 부인은 거의 무성의하게 말했으나, 공작으로선 이 순간에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왔다. 와 줬어, 우리 티아나가.

소파에 앉은 몸은 얼음처럼 얼어 있으나 아무튼 와 주었어!

테이블 위에는 장미 문양을 새긴 도자기 찻잔 세트와, 오밀조밀하게 놓인 과자 접시 등이 보였다.

과연 공작가의 호화로운 대접다웠다.

과거에도 모르가나가 뭘 먹는지 관심도 없던 공작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인…. 참으로 잘하셨소. 당신의 사소한 예의가, 우리 가엾은 딸의 차가워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일 가능성을 찾은 거요.’

클라인 공작은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딸에게 무슨 말이든 건네고 싶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기에, 그는 곧 집무실로 쫓겨나듯 나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생각보다 이르게 집무실로 온 공작 부인은 시녀의 부축을 물리치고 혼자 소파에 앉았다.

걸음걸이도 나쁘지 않다.

“이젠 움직여도 괜찮소?”

“그런가 봐요. 다음 주가 넘으면 사교계 활동도 하려고요. 주치의도 반대는 안 하던걸요?”

그렇다면 폭로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클라인 공작은 벙긋 웃으며 곧, 아내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티아나’라는 이름을 숱하게 입술에 올렸다.

내가 아버지고 당신이 어머니인데 ‘우리 티아나’를 위해 뭔들 못하랴. 조만간 이것저것 좋은 일을 마련해서 손에 권력도 쥐여 주고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우리 티아나에겐 꼭.

딸 생각뿐인 공작 부인은 당연히 기뻐했고,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오늘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거다.

원래 가졌어야 할 주인을 내쫓고 들어앉은 뻐꾸기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혼자에게만 처참한 광경을 다 볼 수 있도록 말이지.

* * *

누구든 자기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일은 자유였다. 단, 뜻하지 않은 암초를 무조건 피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페이는 느긋하게 일어나 코코아 한 잔을 타 마실 기쁨에 젖어 있었다.

카셀이 선물해 준 통 안의 내용물이 쑥쑥 줄어들어도 아쉽지 않았다.

다 마시면 그 핑계로 편지를 보내고, 또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그 계획이 갑자기 무산되고 나서 눈앞에 있는 사람은 도트였다.

도트는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로 페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만남.

이 내키지 않는 만남의 사유는 히논 왕족의 잔재가 나타났다는 급보 때문이었다.

‘휴….’

성녀 루야가 이미 즉위해 자리를 잡은 히논 왕국.

그런데…. 

왕의 피를 이었으니 자신이 왕녀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히논 왕국을 탈출해서 황궁으로 오는 중이라지.

국법상 가능한 범위가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도 있으나, 망명 신청에 일이 이래저래 복잡해진 모양이다.

히논 왕국으로 성녀를 보낸 세력이 아칸 제국이라는 사실도 큰 약점이었다.

서거한 황후를 대리해 내궁의 일을 일부 맡아 보던 라냐 황비의 호출이, 아침 댓바람에 일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접대를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셨겠구나.

그야, 당연히 이해하는데….

‘하아…. 황비께선 나와 도트의 관계를 모르시니 둘 다를 부르신 거겠지.’

다친 클라인 공작 부인을 보호하여 데려간 일 때문에, 도트는 잔뜩 약이 올라 있을 거다.

그 후로도 페이가 공작저에 들렀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용인에게 들었다면 더.

“…….”

대놓고 노려보고 있다, 틀림없이.

사람을 거의 찌를 듯한 적반하장의 눈초리가 느껴진다.

페이가 담담한 한숨을 경고성으로 내쉴까 말까 고민하던 무렵,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랏셀 공녀님…!”

“…….”

“오, 두 사람 다 와 있었군요. 참으로 다행이에요.”

마뉴엘라와 함께 들어온 라냐 황비의 머리에 꽂힌 핀은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급한 걸음으로 따라붙은 황궁 시녀가 그것을 손봐 주는 사이, 황비가 입을 열었다.

“세 사람 모두 급하게 불러서 미안해요. 정말 도리가 없었답니다.”

어쩔 수 없었겠지.

이런 일에 동원할 고위 귀족들이 죄다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으니 골치가 아팠을 거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근신 중에, 휘안테 후작 부인도 마찬가지. 클라인 공작 부인의 부상은 암묵적으로 알고 있겠지.

백작 급으로 내려가느니, 두 공녀와 황태자의 부하인 레이디 모르가나의 호출이 낫다고 생각했다면 뭐….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다.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인지요? 설명은 들었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황비는 페이가 쪽지로 받았던 내용보다 더 자세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서거한 히논 국왕은 오래전에 왕비를 떠나보냈고, 말년에 왕궁의 나이 든 하녀와 짧게나마 만남을 가진 눈치였다.

그 하녀는 임신을 하자 조용히 왕궁에서 나가서 딸을 낳고 키우다가 작년 즈음에 죽었단다.

지금 그 어린 딸을 데려오는 사람이 문제라는데?

이후로 왕의 딸을 거둔 병사가, 루야의 즉위 후에 핏줄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이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였다.

“저런, 그럼 그 소녀는 이용당하는 셈이로군요.”

마뉴엘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으나,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도트는 생각이 완전히 다른 눈치였다.

“황비마마,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여자를 황궁 안으로 들여선 안 됩니다.”

“네?”

라냐 황비가 반문하자, 도트는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하게 밝혔다.

“사기꾼일지도 모릅니다. 모친은 죽고 다른 사람이 보호자로 나서다니요?”

“확인은 마쳤어요. 그녀, 유르디는 히논 선왕의 딸이 맞습니다. 오, 중요한 이야기를 빠트렸군요. 루야 신성국왕이 신성마법으로 직접 감별을 마쳤답니다. 그러나 왕족으로의 대우는 거절했다지요.”

도트는 감별이란 단어에 굳어 버리고, 이야기를 듣던 마뉴엘라는 가볍게 탄식했다.

“보호자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거로군요.”

“왕실 측에선 적당한 수준의 연금과 하우스 한 채의 평생 대여를 제의하였으나, 유르디 양은 국경을 탈출해 로지아 쪽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여기로 오고 있지요. 중간에서 만난 지역 유지들이 설득해도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참으로 쓸모없는 짓.

루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역사책도 많이 읽게 된 페이는 급작스럽게 피곤해졌다.

왕이 핏줄을 잇고, 현 국왕에게 뻗대고도 무사히 살아서 국경을 넘는 게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충분히 봐준 건데…. 모르고 있는 걸까?

만약 히논 국왕의 두 아들들이 살아 있었으면, 유르디 양은 죽거나 좋지 못한 대우를 받았을 텐데.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골칫거리가 되니까 말이야.

그러나, 페이는 섣불리 말을 보태지 않았다.

사생아.

유르디를 향해 당연하게 쓸 수 있는 그 단어가, 아스테인 황자의 모친인 라냐 황비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신중해야지.’

마뉴엘라도 그렇고, 도트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퉁명스러운 말을 턱턱 내뱉진 않았다.

잠시 후.

“라냐 황비마마, 유르디 양과 보호자 루프르델이 도착했답니다.”

“벌써? 알겠다. 음…. 랏셀 공녀, 그대만 와 주겠어요?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황비마마.”

‘정치란 어렵구나.’

라냐 황비의 눈에 짧게 스친 갈등을 보았을 때, 페이는 한숨을 푹 쉬고 싶었다.

공녀 둘과 황태자의 신임받는 부하 한 명까지 더해 우르르 몰려가면, 지나치게 환영받는 모습으로 비칠까 싶어 막았겠지.

황궁 시녀까지 전부 따라가고 둘만 남은 공간.

문 쪽을 쳐다본 채의 도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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