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통한의 순간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유니콘의 머리를 묶은 케이프 매듭이 풀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야 하는데.
유니콘의 비밀보다도, 다쳤던 공작 부인이 안정을 점차 되찾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유니콘의 등에서 공작 부인이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으음….”
“마님!”
“가만히들 있게, 어서 모시지.”
집사에다 힘 좋은 메이드 몇몇이 공작 부인을 조심스럽게 데려가고 나자, 페이는 문 앞에 선 유니콘을 도로 사라지게 했다.
벗어서 유니콘의 머리에 씌워 둔 케이프를 도로 챙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섬으로 가고 나면 다른 동료들이 알아서 벗겨 주려니 믿을 수밖에.
‘안 들키고 무사히 끝내서 그나마 다행이다….’
유니콘이 안전하게 돌아가고 나자 목구멍 안쪽에서 하품이 몰려오려고 했다.
고작 마법 한 번, 유니콘 부르기 한 번을 하였을 뿐인데 지치다니.
‘…본채 안을 기웃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으니 이젠 가 보자.’
공작저에서 감사 인사를 따로 받기 위해 뭉갤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페이가 막 돌아서서 가려고 할 때였다.
언제 도착했는지 뒤편으로 바짝 붙은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그쪽의 정체가 어찌 되는지 페이의 입장에서 궁금해할 턱이 없다.
“이게 웬 소란이야? 왜들 우르르 나와 있어?”
짜증이 섞인, 누가 듣기에도 불유쾌한 음성.
듣기만 해도 피부 위를 에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는 틀림없이 도트였다.
페이는 환멸이 섞인 눈빛을 하지 않으려고 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알 바 아냐.
“공녀님, 오셨습니까.”
“집사는 왜 없… 아니…?”
집사며 시녀장이 마중은 아니 나오고, 본채 앞이 소란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던 도트는 입을 딱 벌렸다.
‘모르가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젠 이 안에까지 슬그머니 들어오겠다 이거야?’
선연히 적대적인 푸른 눈이 노려보는 시선을, 페이의 입장에선 받아쳐 줄 이유도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싫다, 정말로.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는 그녀가 몇 발자국 더 걸었을 때였다.
본채 안으로 들어갔던 집사가 급하게 뛰어나와 일렀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모르가나. 마님께서 찾으시는데 잠시 얼굴을 보여 드릴 수 없겠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집사와 페이의 대화에 도트는 더 돌아 버릴 지경이 되었다.
‘뭐야! 너, 내가 죽어도 가기 싫었던 독서회 따위에 가 있는 동안 내 어머니를 꼬셨어? 네가 뭔데! 늘 구박이나 당하고 조롱받는 삶에 익숙한 네가….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감히…!’
집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레이디 모르가나께서 마님을 여기까지 모셔 왔는데 그냥 보내다니요? 클라인 공작가의 법도로서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그새 시녀들이 말했나?
솔직히,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페이의 옆에서 얼굴이 뚫리도록 노려보는 도트가 없다고 할지라도 안 내키는 걸음.
“…….”
“잠깐이면 됩니다. 예?”
집사가 거듭 재촉하자 결국엔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내 손으로 짠 운명의 태피스트리라….
“알겠습니다.”
페이는 그렇게,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공작 부인의 침실까지 가고야 말았다.
내실엔 어느새 침대에 눕혀진 공작 부인과 주치의, 당시에 대동한 시녀 셋과 시녀장만 있었다.
주치의는 문가에 서서 더 다가오지 않는 페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을 썼다고 하셨습니까?”
“큐어요. 아, 그리고 마법을 쓴 직후에 다리는 괜찮은데 허리엔 통증이 남았다고 하셨어요.”
“큐어라니, 고급 마법이라고 들었는데 대단합니다. 으음…. 다리는 전체적으로 괜찮으나 추락 후의 충격이 심했을 겁니다. 그거야 푹 쉬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죠.”
3층에서 2층 테라스로 떨어졌다고 시녀들이 입을 모아 말했으니 그러겠지.
루키우스도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육신은 생각보다 섬세해서, 다친 후 치유 마법이 닿아도 한계가 남을 가능성도 있다고.
그녀가 아니라 루키우스가 손을 봤더라면, 아마 완벽했겠지만….
“…네.”
“마법이 잘 들어 치료는 거의 다 된 듯싶은데, 몸이 놀랐을 터이니 마님께선 당분간은 푹 쉬셔야 합니다. 흥분은 절대 금물이고, 환자에겐 안정, 또 안정이 최선입니다.”
주치의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알겠네.”
대답한 사람은 뜻밖에도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
클라인 공작의 목소리?!
깜짝 놀란 페이가 옆을 홱 돌아보자, 있는 줄도 몰랐던 공작이 침대에 누운 아내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럼, 처음부터 날 보고 있던 게 아니라 공작을 염두에 두고 보고하고 있던 거였구나…!
그녀의 시선을 알았는지, 공작의 눈빛이 잠깐 곁눈질을 하다가 도로 주치의를 본다.
‘아….’
그런데 뭐지? 공작은 오늘 마탑에 간 건가? 갔다가 돌아왔다면…!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페이가 혼란에 빠진 사이, 침대에 누운 공작 부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레이디 모르가나에게 큰 도움을 받았네요. 제 몸이 아프다고 해도 그냥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니 차 대접이라도 해야겠어요.”
“마님께선 부디 움직이지 마십시오.”
“다리를 다쳤다는데 정말 괜찮은가?”
공작도 부인의 뜻하지 않은 변고에 마음이 쓰이는 눈치였다.
“예, 흥분할 일만 만들지 않으면 그럴 겁니다.”
“으으음…. 알았네.”
클라인 공작이 평소와는 달리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은 곁에 선 시녀장에게 일렀다.
“가서 레이디 모르가나를 응접실로 모시고 다과를 내드려, 말벗할 시녀들도 고르고.”
“전 괜찮으니 마탑으로 돌아가 보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뭘 먹고 마시나 싶어서 페이가 거절하려 할 때였다.
“어, 어머니!”
영문도 모르고 밀려났던 도트가 냉큼 공작 부인의 침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머리를 고정한 핀이 풀리도록 뛰어온 공녀는 침대 곁으로 가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부상이라뇨! 대체…! 시녀들은 뭘 했길래!”
“소란 피울 것 없다. 난 괜찮아.”
공작 부인은 의연하게 대꾸했으나, 꿍꿍이가 있는 도트는 울상을 한 채로 머리맡에서 크게 흐느꼈다.
“오늘 독서회에 가서, 제 배움이 많이 모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돌아오면 더 노력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 이런 끔찍한 사고를 겪다니요!”
다친 환자를 달래 주기는커녕 감정을 고조시키려 들다니?
주치의는 난리를 피우는 공녀를 한심한 눈으로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의료 가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녀는 알게 모르게 공작저 내의 인심을 조금씩 잃고 있었다.
“티아나야, 그만 울렴. 네가 울면 내 가슴이 찢어진단다.”
클라인 공작은 저, 당장 죽이거나 노역장으로 끌어내도 시원치 않은 가짜 공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괘씸한 것.
당장이라도 진실을 폭로하고 저 요물을 철조망이 있는 뒤뜰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그러나….
‘부인…!’
흥분은 금물이라니 지켜야겠지.
무술엔 통 재능이 없어도 강골인 그라면 괜찮겠으나, 공작 부인은 지극히 아끼고 보호해야 할 그의 소중한 아내였다.
공작은 노기를 억누르고, 갑자기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버린 친딸에게 점잖게 감사 인사를 했다.
“레이디 모르가나, 고맙소. 부디 쉬다 가시게.”
“아닙니다. 방금 말이 끊겼는데 저는 마탑으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날이 저문 뒤에 움직이기가 부담스러워서요. 그럼 이만 가 보겠으니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용태에 더 신경을 써 주셔요. 일의 경중이 따로 있습니다.”
그의 귀하고 안타까운 친딸은 이 자리에 한 시도 있기 싫은 듯,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돌려 침실에서 나갔다.
공작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 루비 펜던트, 너의 것이냐.
혹시 너의 머리칼 색이 매우 어릴 때 옅은 금발은 아니었느냐? 만약…. 만약, 이 사특한 저주가 걸린 물건으로 인해 달라졌던 거라면.
내가 그 복수를 꼭 해 주마, 뒷방 신세로 전락한 카피아를 도로 끌어 내오겠단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은데 선뜻 나와 주질 않는다.
어쩐 일인지 두 다리도 그 자리에 딱 붙어 버린 듯하여 그로선 다른 말로 목청을 돋울 수밖에 없었다.
“집사, 어서 배웅하게.”
“옛.”
가 버렸다.
공작저의 파티시에가 구워 낸 과자 하나, 차 한 모금, 따뜻한 수프 한 그릇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어.
나는 물론이거니와, 저의 친모와 저 간악한 가짜 공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클라인 공작은 휙 떠난 페이의 등이 너무 아쉬웠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네 말은 대상이 여럿이었구나. 좋다…. 내 딸아, 복수는 반드시 이뤄질 거다. 잠시 미뤄졌을 뿐이야! 내 맹세하마.’
“어휴, 신세를 졌는데 그냥 보내다니 창피하군요.”
침대에 누운 공작 부인이 페이의 말을 하며 한숨을 쉬자, 공녀가 더 다가붙어 아양을 떨었다.
목적은 당연히 하나, 떠난 이의 생각을 잊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값비싼 시트 위로 꼼지락대는 손가락이, 공작 눈에는 몹시 보기가 싫었다.
네가 뭔데 감히 그걸 만져!
하루를 꼬박 일해도 살 수 없는 것들을 희희낙락하며 즐긴 대가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나 있느냐?
“그렇다니까.”
“티….”
티아나- 라고, 더는 여상히 부를 수 없었다.
온갖 욕지기가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 가엾고 애틋한 이름을 가짜에게 붙여서, 연기로라도 불러 보기가 힘들었다.
공작은 미련 없이 가 버린 딸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로 간신히 말을 이어 붙였다.
“부인, 이제 빈 하우스는 그만 보고 다니시오. 더는 그럴 필요 없소.”
“흥!”
몸이 아프든 말든 딸이 더 중한 공작 부인은 대놓고 콧소리를 냈다.
다친 건 당연히 싫으나, 남편과의 기 싸움에서 드디어 이겼다면 그깟 다리쯤이야 희생할 수 있다.
내 딸을 위한 일이기에.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했었지…. 드디어 진실을 안 게 오늘인데 비통하기 짝이 없군.’
주치의의 말을 떠올린 클라인 공작이 묵묵히 있자, 공작 부인이 눈을 새침하게 치떴다.
“됐어요, 나도 내 할 일은 다 알아서 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지 않소?”
“각하, 공작 부인. 그만해 주십시오. 마님께선 무엇보다도 쉬셔야 합니다.”
보다 못한 주치의가 나서서 말리자, 공작은 공녀에게 너도 나가라고 눈짓을 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도트는 쉽게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었다.
요새 클라인 공작이 대놓고 그녀를 내몰았다.
이 또한 성녀의 흉계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데, 하필 모르가나와 공작 부인까지 모종의 일로 엮이다니!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어디선가 새로운 성녀가 튀어나와서 히논 왕국을 홀라당 다 먹는 바람에, 카피아의 입지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는 이야기야 들었다.
문제는, 도트의 입장에선 그 일을 두고 고소하다며 깔깔대고 웃기만 하긴 곤란하단 점이었다.
더 독이 바짝 올라 도트의 목덜미를 물고 안 놓으려 할 수도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