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진실에 가까워진 클라인 공작
루키우스는 천연덕스럽게 오래전 이야기를 꺼냈다.
어떠한 사유로 어미를 잃은 드래곤 알이 수백 년을 묵었고, 끝내 수정란이 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드래곤 알답게 영양분은 풍부했는데 그 틈을 타고 알껍데기에 기생한 고대 스펙터가 있었지.
과연 그 스펙터가 드래곤의 육신을 타고 무사히 깨어났는지, 아닌지가 너무 궁금해 사람들은 바로아의 입술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흥,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인간들은 왜 안 될 가능성에 집착하고 시도하는 건지 모르겠군.’
본디 드래곤 알은 배 속에 품음과 동시에 강력한 보호를 받으나, 이미 곪기로 예정된 알이라 스펙터가 잠시나마 깃들 수 있었다.
그게 시작이고 또 끝이다.
“…해서, 결국엔 알과 함께 그 스펙터도 타 버렸다오.”
“저런!”
“하긴, 드래곤의 탈을 쓴 다른 존재 이야기는 못 들어 봤어요.”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남의 이야기라 그런지 금세 수긍해 버렸다.
“그 알은 못 쓰게 되었어도 알껍데기는 무사히 미라화되어서 지금까지 남겨져 왔다지.”
“네?”
사람들의 관심이 서서히 흩어질 무렵, 바로아가 뭔가를 꺼냈다.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 보호막 안에 보관된, 작은 알껍데기로 만든 기념품이었다.
그는 무척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학술적 가치는 적으나 명색이 드래곤 알이라, 기념할 만한 가치는 있소. 자, 여기에 계신 아리따운 여성분께 우선으로 드리겠소.”
“어머나!”
“저도 좀 봐요!”
과연 선대 마탑주.
돈을 줘도 구하기 힘든 선물이 또 나오니, 눈이 안 돌아갈 사람이 없었다.
곁에 있기만 하면 재미난 이야기에다 기념품까지 턱턱 주는데 누가 싫어할까?
그는 여러 귀부인과 영애들에게 알껍데기를 나눠 주다가 클라인 공작과 눈이 딱 마주쳤다.
공작은 헛기침을 했다. 솔직하지 못하게.
“크흠.”
“클라인 공작 각하시로군요. 아까 와 있던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렇소.”
드래곤 이야기도 흥미로우나, 요즘 사이가 약간 껄끄러워진 부인에게 가져가 선물하면 좋을 물건.
루키우스는 남은 알껍데기 기념품이 있나 품속을 뒤지는 척하다가 손에 뭔가를 가득히 꺼내 들었다.
“아, 여기 더 있었군. 따님과 부인께 드릴 선물이라면 기꺼이 신사분께도 드립….”
“…아니!”
관심이 없는 척 슬그머니 그걸 받으려던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대 마탑주의 손에 들린 저, 저 물건!
그의 눈길은 드래곤 알껍데기인지 뭣인지에는 꽂히지도 않았다.
저건 우리 티아나가 과거에 들고 왔었던 루비 펜던트가 아닌가! 어디서 난 거지?
질겁한 공작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아는 다시 꺼낸 알껍데기 기념품만 태연히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공작 각하.”
“잠깐…!”
“예? 아, 이건 제 개인 물건입니다.”
바로아는 번쩍거리는 금줄을 감고 루비가 닿지 않도록,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도로 집어넣었다.
상대방의 완곡한 거절을 들은 공작은 순식간에 근엄한 자세로 돌변하더니, 괜히 루비에 조예가 있는 척 물어봤다.
“내 보석을 몇 번 봤는데 색깔이 예사롭지 않기에 놀랐을 뿐이오, 선대 마탑주여.”
“하하, 그렇습니까?”
거짓말이다.
저 짙고도 슬프고 오묘한 루비 빛깔을 보는 순간 알아차렸지! 저것이 과연 무엇인지.
클라인 공작은 자기 손에 덩그러니 남겨진 드래곤 알껍데기 기념품에는 관심도 없었다.
저 물건! 우리 티아나가 가져왔던 펜던트, 저게 선대 마탑주의 물건이라? 그것도 개인 물건? 틀림없이 연관이 있을 거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반드시 알아봐야 해!
그날 무도회가 파하기 전 공작은 시종을 시켜 넌지시 초청의 의사를 밝혔다.
선대 마탑주가 마탑에 머무르며 활동한 시기를 되짚어 보니, 높은 확률로 과거의 일과 관련이 있을 눈치였다.
만나고 싶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만나야 한다.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으나 야속한 선대 마탑주는 끝내 거절하고 돌아가 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공작이 아니었다.
꽤 끈질기면서도 무례하지 않게, 그의 연구에 방해되지 않게 줄을 대고 연락을 시도한 결과 그야말로 간신히 만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루키우스는 그가 놓은 덫에 차례차례 걸린 이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페이. 내가 지금 나가면 클라인 공작과 마주하게 돼. 그는 반드시 루비 펜던트의 일을 묻겠지.”
“…다녀와요.”
제법 무심한 대꾸에, 루키우스가 그녀에게 다가가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네가 처음에 선택했던 단절을 고수할 마지막 기회야. 정말 괜찮겠어?”
칠흑과도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만을 위한 염려를 내보이고 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시간을 많이도 뺏고 잡아먹어서 만든 판이라도 다 뒤엎을 수 있다고, 끝의 끝을 물어보는 중이었다.
페이는 웃었다.
“후회 안 해요. 가서 그에게 진실의 실마리를 잡을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뻗고, 목을 잡고 가볍게 끌어와 뺨에 입을 맞췄다.
연한 다홍빛의 연지를 바른 입술이 애매하게 남긴 흔적에 그의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루키우스는 자신이 페이 앞에서는 늘 갈대만도 못하다고 여겼다.
“알았어.”
“늘 고마워요, 루키우스. 그리고… 사랑해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말이라, 그는 너무 신이 나서 바로아의 모습으로 현신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뻔했다.
그간 공작을 쉽게 만나 주지 않은 이유는 일이 너무 잘 되어도 의심을 살 우려가 있어서였다.
이 정도로 시간을 끌었으면 괜찮겠지?
또다시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이, 그는 재밌기만 했다.
드디어 마탑의 모처에서 마주한 클라인 공작은 숱하게 받았던 거절의 답신을 기분 나빠 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랜만이구려, 바로아.”
“…예.”
공작은 마차에 싣고 온 무언가를 내밀었다.
유백색이 찬란하고 거의 정제하지 않은 고급 마정석이었다. 꽤 큰 크기에 순도도 좋기에, 루키우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돈 좀 썼겠는데?’
고대에도 이 정도면 귀한 물건이다.
“이건 그저 성의 표시에 불과하니 아무것도 개의치 말고 받아 뒀으면 하오.”
“사람 간의 관계에 어찌 그냥 오가는 물건이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선물이란 하나를 받았으면 답례가 가야 하는 법. 클라인 공작, 만약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하게 해도 됩니다.”
의례적인 감사보다 반가운 건 뒤에 따라오는 말이었다.
클라인 공작은 급한 나머지 대놓고 용건을 말해 버렸다.
“그전에, 그대가 황궁에서 잠깐 실수로 내보였던 물건 있지 않소.”
“…….”
“내 예전에 그와 똑같은 물건을 본 적이 있는데 소재를 알 길이 없어서 무척 답답하던 차였소.”
“장물은 아닙니다.”
바로아가 무심히 대꾸하자 공작은 더욱 몸이 달았다.
“오해하지 마시오. 이 마정석도 그대를 위한 성의 표시일 뿐 펜던트를 대가로 달라는 의미가 아니오. 그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황만 알고 싶을 따름이라오.”
“내 손으로 들어오기 이전 과정을 묻는 겁니까?”
“맞소. 내게 루비가 필요하다면 이 마정석을 구하기보다 더 쉬운데, 남의 물건을 굳이 탐낼 이유가 있겠소이까?”
클라인 공작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면피하기 바빴다.
만에 하나라도 의심을 사면 바로아는 마정석을 받기는커녕 그대로 돌아가 버리겠지, 그러고 나면 간신히 나타난 실마리는 허무하게 놓치는 셈이다.
“흠…. 혹시 용건이 이건가 싶어서 가져왔는데 잘되었군. 보십시오.”
고개를 까딱이던 선대 마탑주는 작은 보석함에 담아 둔 루비 펜던트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연 공작은 펜던트에 달린 금줄을 만져 보고 기막혀했다.
과거에 겪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돌아온다.
‘그래, 이거야! 이와 완전히 똑같은 물건이었어! 그런데 왜 티아나가 이번엔 이 펜던트를 놓치고 온 거지? 고생하느라 어딘가에 팔아넘겼다기에는, 그전보다 일찍이 왔기에 말이 안 맞는데.’
루비 펜던트와 유아용 실크 로브, 이 둘은 클라인 공녀의 신변을 보증해 줄 주요한 물건이다.
구태여 하나를 빠트릴 이유가 없지.
혹 그런 건가?
유아용 실크 로브만 있으면 되니, 루비 펜던트를 떠나기 전의 모르가나에게 증표로 대신 주었다면….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녀 역시 수도원에 오래 있지 않고 마탑으로 가 연구에 매진했는데, 이걸 개인적으로 팔아넘길 틈이 있었겠나?
귀한 물건을 팔아넘기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거늘.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클라인 공작이 돌아왔던 시점은 수도원으로 가기 전날.
소중한 물건을 증표로 주고, 그 뒤에 모르가나의 존재를 모르는 척 일관한 공녀의 행태도 영 수상쩍다.
대놓고 수도원에서 초청하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였으나, 공녀의 방에서 명단이 넘어오는 일은 오늘까지도 없었지?
긴 생각을 마친 공작의 입술이 어렵게 열렸다.
“…이걸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말해 줄 수 있소이까?”
바로아는 흔쾌히 대꾸했다.
“본디 내 물건은 아니고, 최근에 어떤 소녀가 부탁을 해 왔기에 받아 뒀을 뿐입니다.”
“누구인지 물을 수 있겠소이까?”
“그건 불가합니다. 어떤 일로 보석을 반드시 깨트려야 했고, 마음에 걸린다며 복구해 달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소녀도 어릴 적 남에게 받았던 물건이라던가. 이게 내가 아는 과정의 처음과 끝입니다.”
클라인 공작은 다급하게 물었다.
“남의 물건인데 펜던트의 중심인 보석을 깨트려야만 했다? 혹 무언가 나쁜 사술이라도 걸린 거요…?!”
“거기부턴 개인적인 사정이라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방금까지 밝힌 게 다이니 양해해 주시기를.”
팔짱을 끼며 고압적으로 구는 자세에, 공작은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미궁 속에 떨어진 기분인 건 여전하나 아리아드네가 떨어트린 실타래의 끝은 본 듯하다.
문득 페이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 온다.
내게 그랬었지?
“절대적인 믿음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공작은 무서운 예감을 느끼고는 망연자실했다.
만약….
아주 만약에, 이게 처음부터 티아나의 물건이… 도트리샤, 도로테아, 그 아이의 물건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말이 된다.
쉽고도 어려운 가설을 드디어 찾아낸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어야만 한다.
남의 루비 펜던트가 보기에 황홀하고 값져서 훔쳤다면, 그건 죄다!
그런데 절도를 넘어서서…. 왜 남의 루비 펜던트를 가지고 자기 진짜 신분을 알아달라는 듯이 군 거냐, 넌!
클라인 공작은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할 바보가 아니었다.
제발 아니어야만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아니길 바란다고 해서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하면, 이 괴로움을 영원히 삼킨 채로 살아야만 하겠지?
나의 사랑스럽고 수상한 딸을 끊임없이 의심해 가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는 살 수 없다.
이 나는!
공작이 어렵사리 눈을 뜨자, 바로아가 선심을 쓰듯 멀쩡해진 루비 펜던트를 턱 내밀었다.
“그 물건은 언젠간 원주인에게 꼭 돌려줘야 하기에 줄 순 없습니다. 단, 빌려 줄 용의는 있지.”
“정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