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진정한 시작
페이의 눈앞에서 그가 바로아로 순식간에 변했다.
“다녀와요. 오늘 하기로 한 강의는 나중에 벤 님한테 전해 듣고 복습하는 걸로 할래요.”
루키우스는 딱히 서운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늘은 많이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
“그럴게요.”
그녀는 웃으면서 거짓말을 했다.
그가 가고 나면, 뭐 할 일이 없나 일정표를 뒤적거리다가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보겠지. 밤이 너무 늦지 않는다면 조제실에 가서 간단한 물약 정도는 만들고 불을 끄고 나올 거다.
그러고 나면….
몰려오는 잠을 쫓으면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문 너머 루키우스의 방문이 언제 열릴지 귀를 쫑긋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가 자기 방문을 열어 놓고 이쪽을 가볍게 톡톡, 노크하다가 들어가면 그녀도 웃으면서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겠지.
얼굴 안 봐도 그 정도면 만족해.
구태여 한 공간에 있지 않아도, 이만큼만 해도 행복하다. 정말로.
그녀가 간절히 바란 일상은 크거나 거창한 야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갈게.”
“내일 봐요.”
애써 기분 좋은 일만 떠올린 페이의 얼굴은 그가 가고 나자 약간 침울하게 변했다.
그가 강의를 마치고 황궁으로 가고 나서, 잠시 후면.
드디어 루키우스가 주체적으로 꾸민 연극의 막이 화려하게 오를 거다.
루키우스가, 아니 바로아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다.
“페이, 네가 아는 그 둘은 세상에 다시없을 명배우들이야. 그러니까 그들이 연기를 마지막으로 실컷 하게 해 주자고.”
“네? 성녀와 도트가 연기를 하다뇨? 아…!”
그녀는 되묻고 나서야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파악했다.
“그들이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게 돕는 친절이야 얼마든지 베풀 수 있어. 전혀 귀찮지 않으니까 안심해.”
페이는 소중하고 슬픈 물건이 영영 떠나간 그녀의 빈손을 멍하니 보았다.
모르가나 시절, 분노와 사력을 다해 깨트렸던 루비 펜던트.
그걸 완벽하게 복구한 루키우스는 저주의 흔적을 남겨 둔 채로, 공작의 눈앞에 대놓고 보여 줄 예정이라고 했다.
알아보겠지, 지금의 공작이라면.
마탑에서 거의 눈물을 보이려던 공작의 얼굴을 생각하니 심란해졌다.
밤이 올 때까지, 빈 마차 옆에서 일부러 기다렸다가 고맙다고 말해 줬던 그 눈빛도.
진상을 알고 나면 과연 그의 반응이 어떨지….
‘늦었어, 되돌릴 수 없어. 페이, 정신 차려! 마음 약하게 굴면 못써.’
이제 시작이다.
이만큼이나 온 길인데, 과거의 원한 갚아 주기는 이제 시작이야.
그녀는 고개를 내젓고,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 정령술 책을 펼쳐 들었다.
무어라도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고선 견디기 어려웠다.
* * *
유독 강력했던 선대 마탑주의 마탑 귀환 소식이 제도를 휩쓸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황궁의 아카드니아 홀에는 많은 사람이 득시글거렸다.
심지어 사교계에 영향을 주지 말라고 명령을 들은 휘안테 후작가의 방계 사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각 기사단의 인원들도 최소 수 명 이상이 기웃거렸다.
제도 근처에 출몰했던 라이칸슬로프 킹을 도륙 내고 기사들의 치료를 도와줬던 마법사의 이름, 바로아.
히논 왕국에 새로운 성녀이자 왕이 된 루야를 추대하는 데 기여한 미청년 마법사, 바로아.
마탑에 돌아온 선대 마탑주의 이름, 바로아.
과연 세 인물이 서로 일치하는 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성기사단의 슬로트 경은 여기에 없었다.
사람들이 쑥덕대는 불운한 칭호, 선대 성녀로 밀려나기 직전으로 몰린 카피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바로아라,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새 시대와 새바람은 어느 때라도 불어오는 법.
“…마탑에서 오신 9서클의 마법사, 바로아!”
홀의 문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외치자, 사람들의 눈이 한꺼번에 그쪽으로 쏠렸다.
드디어 왔다!
남들 같으면 부담감에 숨이 막힐 수도 있겠으나 오늘의 주인공은 그런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좋군.’
거만의 끝에다가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드래곤답게 씩 웃은 바로아는, 은근한 시선을 간파했다.
멀찍이서 그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황태자 실라스.
이전에 히논 왕국으로 갈 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아 줬으니, 황무지까지 직접 찾아온 공로의 갚음은 다 해 주었다.
그럼 이제 주고받을 것 없는 평탄한 사이.
모름지기 사람의 시선에는 맞대응이 예의 아닌가?
루키우스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황태자를 향해 냉소를 날린 그가 홀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오자 발리엣 경이 발끈했다.
“저놈이…! 뻔뻔하기 그지없군!”
“그만하게, 발리엣 경. 드디어 만나게 되어 잘됐어. 생각보다 더 이른 재회로군.”
실라스는 기분이 좋았으나 발리엣 경의 속은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만의 싹은 잘라 둬야 합니다. 저놈이 무슨 고대적 드래곤도 아니고 어디 감히 황실 직계의 황태자 전하 앞에서 저런 언행을 한단 말입니까?”
“난 상관없네.”
“전하!”
황태자와는 달리, 그의 앙금은 썩 가실 기세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좋은 만남도 아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
황태자의 왼편에 선 카셀은, 당시 동행한 길이 아니라서 자초지종을 잘 모르기에 묵묵히 있었다.
‘바로아라면 페이를 구해 줬던 마법사고, 루키우스 못지않게 훌륭한 실력을 지녔겠지. 나이야 상당할 터이니 페이와 재회한다고 해도 불미스럽게 엮일 일도 없고.’
겉보기에는 생각보다 젊어 보이나 엘프와 피가 섞인 자라면 크게 이상할 일도 없다.
실라스에게 귀띔만 조금 들은 카셀은 이 상황을 대충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발리엣 경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눈치였다.
“전하! 저자를 공식적으로 만나는 일만은 재고해 주십시오.”
“이유가 뭔가?”
“9서클이 틀림없다고 여러 마법사가 입을 모아 증언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황실 마법사까지 마탑에 가서 확인했다는데 왜 황궁에 들이려는 겁니까?”
“마탑으로 온 이상 거기나 여기나 차이는 없네. 그만한 실력이면 다 똑같지.”
실라스는 지극히 실리적인 말로 받아쳤다.
“9서클 마법사는 마음만 먹으면 작은 왕국도 하루아침에 멸망시킨다고 하였습니다. 황실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마탑의 전력까지는 상대해도, 저자의 위험까지 덮기란 어렵습니다!”
“우선은 멀찍이서 지켜볼 생각이네.”
“네?”
실라스는 젊은 사자와도 같은 위용을 드러내며 냉철한 분석을 해냈다.
“대면은 적당한 때가 오면 따로 정해도 돼. 오늘은 저자가 이 낯선 환경에 어찌 대처하는지 지켜보기만 하세.”
“전하의 앞으로 먼저 부르지는 않겠다는 뜻입니까?”
“맞네. 마법이 탁월하다고 해도 정치와 이해관계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는 능력과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유독 황실의 일에는 성질이 급한 발리엣 경의 말문이 막혔다.
나쁜 선택이 아니다.
“단 일 년간 마탑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마물 사냥에 탁월한 게 능력의 전부라면 난 관심을 거둘 생각이네.”
“…….”
“9서클이라고 해도 마법만 쓸 줄 아는 선대 마탑주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어. 결국엔 한 번 써먹고 버릴 패밖에 안 되겠지.”
황태자의 말이 뒤로 갈수록 냉혹해지자, 발리엣 경은 완전히 수긍하고 입을 다물었다.
불쾌감이 다 가신 건 아니라지만 이만하면 참을 만하다.
어느 쪽이든 황태자 전하께 이롭게만 된다면 괜찮겠지.
‘연약한 개체 둘이서 웃기고들 있군.’
페이는 불가능했던, 정령을 통해 그들의 대화를 고스란히 엿듣던 바로아는 씩 웃고 말았다.
그는 멍청하지 않은 인간을 오히려 좋아하는 부류였다.
머리는 없고 힘만 세면 그들을 다루는 방식이란 오로지 하나로 좁혀질 뿐이다.
페이는 틀림없이 슬퍼할 거고….
그리고 잠시 후.
‘슬슬 오는군?’
솔직히, 안 올 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논 왕국의 소문이 다 퍼진 이상 카피아는 물론, 그 덜떨어진 성기사 단장의 입지는 형편없이 쪼그라들 터.
그러기에 주신전으로 못 돌아가고 황궁에 눌어붙어 있으려는 속셈이겠지?
귀환하면, 사제들의 눈치는 물론 문책 아닌 문책이 무섭게 쏟아질 게 뻔하다.
저주받아 마땅한 카피아가 아카드니아 홀로 느릿하게 오고 있음을 간파한 바로아의 입술이 열렸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볼 시간이다.
남들은 바로아가 히논 왕국 말을 꺼내 ‘성녀를 도왔다’, ‘신성을 목격했다’란 소리로 이목을 끌리라고 여기나, 그건 잡담에 불과하지.
그의 계획은 전혀 달랐다.
누구누구가 정확하게 맞춘 예상대로 고대 드래곤인 그는, 제도의 사람들이 희미하게 들어 본 적만 있고 잘은 모르는 주제를 내놨다.
말하자면 옛 역사의 야사 따위였다.
그러면서 기념으로 삼을 만한 조각이나 귀중품을 꺼내 구경을 시켜 주자, 다들 열을 올렸다.
“그럼, 이게 페어리의 날개를 본뜬 물건이란 말인가요?”
“등에 달고 날 수야 없으나 크기와 형태는 완전히 똑같소. 효능만 없을 뿐이지.”
바로아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귀부인들은 손바닥만 한 기념품을 갖고는 서로 야단법석을 떨어 댔다.
개중의 누군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턱 꺼냈다.
“저, 선대 마탑주님. 당신이 9서클이라면 드래곤도 능히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황실에 기사단이 셋이나 넘쳐나니 한 번쯤 원정대를 꾸려도 괜찮겠죠? 드래곤 정벌이라니, 정말 멋져요!”
“제국의 국력이 이만큼이나 성장했으니 그 성과를 확인할 때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놈들. 라이칸슬로프 킹 한 마리로 쩔쩔매더니 뭐? 날개도 없고 느릿느릿한 개미들이 몰려가서 드래곤을 잡아?
천 년 전의 바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들을 본 그가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이라. 갑자기 생각나는 이야기가 또 있군.”
“해 주세요!”
“여기 시원한 에이드를 가져왔으니 쭉 마시고 해 주셔요, 네?”
상큼하다 못해 풋내가 나는 음료를 들이켠 바로아는 태연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은 조리 있고 흥미를 유발하기가 쉬워, 귀족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어 귀를 기울이기 바빴다.
대놓고 ‘드래곤’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자 움직인 쪽은 엉뚱하게도 클라인 공작이었다.
안 그래도 공녀가 한 예언 때문에 민감했던 공작은 슬금슬금 접근을 시도했다.
9서클의 대단한 마법사를 보기 위해 모인 인파가 상당해, 나중에 따로 만나려고 했는데 참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바로아는 한 드래곤의 전설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찰나였다.
“여러분은 드래곤 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오.”
“드래곤 알이요?!”
“지금은 드라칸도 거의 멸종하고 없으나, 고대엔 퇴화한 드래곤을 부리는 드래곤 라이더가 있었지.”
“어머나, 이 자리에 레이디 모르가나가 있었어야 할 텐데요!”
페이, 나의 페이.
어느 영애가 외친 말에, 그새 그리움에 젖을 뻔한 바로아는 말을 이어 갔다.
“그만큼 드래곤이 번성했기에 다양한 생태가 보였는데…. 개중엔 겁도 없이 드래곤 알에 기생한 놈도 있었다오.”
“세상에!”
“끝까지 다 이야기해 주세요. 어떻게 되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