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마탑의 바로아
페이가 그걸 내밀면 공작은 자연스럽게 공녀가 이걸 작별 선물로 주었구나, 하고 생각해 버릴 테니까.
이 일만큼은 꼭, 제3자가 해야만 한다.
“아…. 네.”
“너 그전에, 헉헉, 마탑에 올 때 바로아 님이 맡겼던 그 쪽지 지금도 가지고 있어?”
“그럼요.”
그가 진정으로 어떤 존재일지 모르고 있을 때도, 루키우스가 바로아와 같고도 다른 존재란 사실을 알기 전에도 소중했던 물건. 쓸모가 다했다고 없애 버렸을 리가 없었다.
잘 펴서 새로 산 액자에 끼워 뒀지, 뭐.
그새 숨을 좀 고른 홀트데인이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다.
응? 바닥?
페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으나 거기에 뭐가 있을 턱이 없다.
그냥 매끄러운 바닥 돌만이 보일 뿐.
“지… 지금… 1층에, 바로아 님이 오셨어. 믿어져? 어? 가서 직접 만나 봐. 내가… 내가… 살면서 선대 마탑주님을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아.”
“가 봐, 페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만나야지!”
“…고마워요, 홀트데인.”
역시 그는 좋은 친구다.
별다른 생각 없이 놓쳐 버릴 뻔한 순간을 두 눈으로 보도록, 내 등을 밀어 주고 있잖아?
그녀를 카페테리아로 이끌었던 공복감은 어느새 날아가고 없었다. 그보다 그의 의젓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당연히 믿기에 더 보고 싶었다.
내 남자가 일하는 모습은 언제나 최고니까!
마탑의 루키우스는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을 거의 막는 편이었다.
그의 황홀한 외모에 홀려 다가왔다가도 까칠한 성격에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홀트데인… 홀트데인도, 서글서글한 성격인데 루키우스와 좀 멀어졌던 때가 있지 않았나? 나도 포함해서. 응? 뭔가 중간에 놓친 듯한 느낌이네.’
1층으로 가는 내내 옛 생각에 잠긴 그녀는 큰 홀로 오자마자 깜짝 놀랐다.
‘와…!’
이 넓고 넓은 장소가 이토록 붐빌 때도 있었나?
마탑에서 가끔 참여를 유도하는 어떤 세미나나 행사를 할 때도, 참가자가 지나치게 많으면 소문을 듣고 오히려 피하는 게 마법사의 특성이다.
그런데 단 하루, 반나절도 안 되어서 이렇게나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다니, 바로아 한 사람을 보려고!
“다들 뒤로 좀 물러서시오! 들어가서 할 말이 있어!”
“벤 님!”
마법사 벤도 팔을 홰홰 내저으면서 홀의 중앙으로 다가가려는데 쉽지 않은 눈치였다.
루키…우스는…. 아, 저기에 있네!
까치발을 든 페이는 웬만한 남성 마법사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바로아를 드디어 발견했다.
그는 서클 측정기 앞에 있었는데, 하얀색의 코트를 입고 오른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채였다.
무심한 빛으로 가득한 눈동자는 이윽고 측정기의 구체로 향했다.
선대 마탑주의 귀환을 믿기 힘든 이들이, 측정기를 아예 이쪽으로 가지고 온 눈치였다.
정말이지 요란한 등장이요, 행사구나.
숨을 죽인 채로 구경하던 마법사들이 부산하게 떠들어 댔다.
“저분이 진짜 선대 마탑주셔? 그, 일 년만 재임하고 떠났다는 역대 최강의 마법사?”
“그렇다니까!”
“고대 이후로는 인간도 엘프도 9서클에 도달한 적이 없는데 진짜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이 자리에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마법사들의 의견은 죄다 갈렸으나 결론은 하나, 바로아의 실력을 직접 보잔 용건이었다.
이윽고, 바로아의 손이 측정기 위에 얹혔다.
루키우스의 손은 저것보다는 좀 더 작아. 키도, 어깨도, 날 가득히 안고 둘러 주는 두 팔의 느낌도 다 다르지.
그렇지만 나는 바로아 님에게서 나의 루키우스를 느낄 수 있어.
페이는 어느새 가슴께에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그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그가 마력을 주입하자, 결과는 순식간에 나왔다.
당당하게 보이는 9서클 유저. 종이 반 틈 정도로 마스터에 근접한 눈금에 다들 경악했다.
사실상 9서클 마스터의 등장이라니.
“헉!”
“말도 안 돼!”
“진짜였단 말이야?”
그와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몇몇 마법사들이 떠들자, 그 웅성거림은 곧 파도가 되어 홀 안을 무섭도록 휩쓸었다.
사람들이 더 난리가 난 통에, 안으로 가려고 애쓰던 벤이 중간에 끼어 낑낑댔다.
“좀 비켜 줘 봐들!”
종이 인형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가엾었으나, 페이가 도와줄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때였다.
루키우스의 표정을 지운 그, 바로아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앗!’
여전히 까치발을 든 그녀를 향해 일부러 지어 주는 미소.
서늘하면서도 온화한 그의 미소가 페이의 멀쩡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가 맞다.
히논 왕국으로 가는 길에도 크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루키우스가 구태여 이러는 이유는.
그가 유명해진 후로도 변하지 않을 거니 안심하란 뜻인가?
‘루키우스도 참…! 내가 그렇게 겁 많은 어린애로 보인단 말이야?’
문제는 구경하러 온 마법사들이 이 안에 풀밭의 양 떼처럼 우르르 모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아 님이 날 보셨어!”
“아니, 날 보고 웃어 주셨거든?”
“마탑주 자리를 네이아 님이 계속하신다면, 바로아 님이 새 제자를 들이려는 게 아닐까? 나야 제의가 들어온다면 기꺼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자리는 내 거거든?”
“내 거야! 난 조교 경력만 십 년이 넘는다고!”
‘아, 아하하.’
페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마는데, 그녀 뒤에 있던 홀트데인도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욕심이란 사실 똑같지, 뭐.
이렇게 해서 마탑으로 십수 년 만에 귀환한 바로아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 소식은 흘러 흘러 사교계에도 들어갔고, 마탑 입구에선 초대장을 든 전령들이 문지기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아졌다.
실라스가 때를 맞춰서 퍼트린 ‘히논 왕국 건의 참여자’란 칭호도 한몫 거드는 모양새였다.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궁금해서 실피드를 시켜 상황을 짬짬이 보는 페이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해요. 공식적으로 9서클 마법사가 나오니 관심이 이렇게나 쏟아지네요?”
“고대에도 9서클은 드물었으니까.”
“오늘은 어때요, 좀 쉴래요?”
“아니. 이따 귀찮지만 강의 한 번만 하기로 했어. 너도 할 일 없으면 와서 구경하든가 해.”
루키우스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는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타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분신 마법으로 도서관에 루키우스의 환영을 놔두고, 바로아 인격으로의 활동은 남 앞에서 하기도 했다. 일부러 같은 시간대에.
변신 마법을 유지하면서, 다른 언행을 구사하고 다른 마법까지 또 쓰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녀로선 놀라움의 연속인데 그는 무덤덤하게 굴었다.
치밀한 계략도 좋으나 자칫 잘못해서 헷갈리면 안 될 텐데.
“실수로 루키우스가 하던 연구하고 주제가 겹치면 안 되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차피 사람들은 7서클 마스터하고 9서클 유저를 겹쳐서 볼 리가 없어. 애초에 상상하기가 힘든 일이라 의심하는 축이 조롱당할걸.”
페이는 생각난 김에 물었다.
“루키우스의 성장은 언제쯤이에요?”
“슬슬?”
그러는 그의 손에는 8서클 마법인 플레임 버스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이 백색 불꽃에 당하면 어지간해서는 무사하기 힘들다고 했다.
본체로 돌아간 드래곤이라도, 약한 부위에 정통으로 맞으면 타격을 입는다니 조심해야겠지?
자신만만한 그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음, 좋아.”
“반성했어요.”
“뭐를?”
페이는 루키우스가 뜨끔할 만한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루키우스는 10서클의 드래곤인데도 늘 마법 연구에 열심이었잖아요, 역사 공부도 병행하면서요. 구태여 할 필요 없는 8서클 연습도 틈만 나면 했던 걸 보면, 역시 연습이 중요한가 봐요.”
“어…? 그… 그야….”
시간을 거슬러 온 그가 페이를 찾아냈을 당시, 원래 상태보다 급격히 약해졌다는 사실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야 하는 영원한 비밀.
루키우스의 등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었다.
거만한 드래곤의 최대 약점은 눈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모를 건 절대로 모르는 귀여운 마법사님.
“저도 앞으로 루키우스 만날 시간을 줄여서라도 마법 연습을 하려고….”
“그건 안 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넌 그냥 나만….”
“네?”
페이의 말을 중간에 탁 끊은 루키우스의 눈엔, 왠지 억울함이 가득했다.
알긴 안다.
솔직하게, 내가 작년 여름 축제에서 널 만났을 당시엔 좀 약해져 있었다고 고백해도 그녀는 날 업신여기지 않겠지.
하지만 그 뒤에! 그 뒤에 페이가 자신을 두고, ‘약해질 수도 있는 가련한 존재’로 인식당하기가 너무 싫다.
절대로 안 돼! 그것만은 못 참아!
그러기에 그는 이 비밀을 영원히 파묻고 살아가야만 했다.
현명? 드래곤이?
…개뿔.
“루키우스?”
“넌 지금도 너무 공부만 해. 쉴 땐 쉬고 놀러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실피드를 시켜서 날 불러. 네가 하도 안 불러서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알아?”
“루키우스가 일하고 있을 때 그러면 민폐죠.”
그는 완전히 정색했다.
“민폐는 무슨! 제발 내 일상에 민폐 좀 끼쳐 줘, 어? 네가 날 안 부르니까 내가 책만 보고 있는 거잖아!”
이토록 열을 내는 그의 모습은 보기가 힘들다.
“푸…후후후….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요.”
낯 뜨거운 소리를 실컷 한 루키우스는 내키지 않는 눈길로 회중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떠나야 할 시간.
그가 마력을 조절함에 따라 청염에서 백색을 오간 불꽃이 곧 꺼지고, 빈손이 훅 다가왔다.
두렵지 않아.
그의 손을 냉큼 잡은 페이의 입술에서 버릇처럼 얕은 숨이 뱉어졌다.
“하아….”
“페이.”
“루키우스, 사랑해요.”
그는 달콤한 밀어에 좋아하긴커녕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거 너무 기습인데?”
“아까는 민폐 좀 끼치라면서요.”
“하하하….”
둘이 아공간, 고대의 바다에 다녀온 이후 이런 일을 수시로 겪는 모모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페이가 솜을 손수 넣어서 만들어 준 어설픈 베개였지만 이럴 때는 효능이 최고로 좋았다.
남의 연인들이 하는 속닥거림이란 자고로 안 듣는 자가 승자지. 뭐하러 듣고 귀를 씻나?
페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기회가 될 때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참지 않고 다 말하려고요. 루키우스를 좋아하고 보고 싶고, 어느 날엔 미워도 다시 보고 싶어진다는 것도요.”
“흐, 흐음.”
“저는 루키우스만 생각하면 큐어를 안 써도 몸에 생기가 돌아요.”
말의 중간에 썩 내키지 않는 소리가 있긴 하였으나 루키우스는 대충 넘겼다.
사람이 모름지기 매사에 너무 세세하게 파고들면 사랑받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루키우스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래, 나도 사랑해.”
“꾸우우우….”
베개로도 막지 못한 연인의 밀어를 듣고 만 모모가 다 죽어 가는 시늉을 했다.
띵-
알림 소리가 울리기 직전, 시계의 버튼을 가볍게 누른 그가 손에 뭔가를 쥐고 일어섰다.
“강의 끝나면 곧바로 가야겠네. 황궁에 오래 있으면 피곤하니까 끝나고 가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