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더는 비밀이 아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내용만 들으면 특별하지 않은 대화다.
한 명의 공작이 축출된 황궁에서, 황실 다음가는 권세를 누리는 나머지 공작이 구태여 전할 말로는 부족하지만.
나는, 나는….
페이는 속으로 혼란스러워졌다.
“되도록 가만히 있으려고 하였으나, 레이디 모르가나. 그대는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오. 한 명의 인재로서도 그렇고 인품의 성장도 나무랄 데가 없어.”
“과…찬이십니다.”
드디어 들어 보는 칭찬에, 약하디약한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지려고 했다.
공작은 과거의 모르가나와 지금의 페이를 겹쳐 보고 있다.
그 두 생애를 통틀어서 잘한다고 말해 주고 있어…. 드디어 나를…. 나란 사람을 온전하게 봐 주었어….
어느새 떠오른 달을 머리 위에 둔 공작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대가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아들, 카셀을 또 그 로지아로 떠밀어 보내야 했겠지.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길로 다시금 가게 놔뒀으면, 아내의 반발도 그렇고 나도 힘겨웠을 거요.”
“어느 방법이었든 다 잘 해결되었을 겁니다.”
페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거사의 핵심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루야의 존재.
루야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갓 피어난 풀꽃과도 같았고, 호수에 비쳐 보이는 수면의 햇빛과도 비슷했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진심, 히논 왕국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신앙도 받아들여진 거지.
그러나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웠을 거요, 레이디 모르가나. 국경 수비대는 늘 웃으며 남을 대하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지. 어느 쪽이 되든, 다치는 자가 나오면 그때부턴 고착에 빠지고 그러면 빠른 해결은 불가하오.”
“저는 블루 로즈 기사단장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나친 겸양은 남의 눈에 자신을 우습게 보이게 만드니 그만두시오.”
‘아!’
전에 들은 적이 있는 말이다.
과거, 수도원에서 클라인 공작저로 가는 마차에서 해 줬던 말이잖아!
그 말…. 난 지켰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클라인 공작은 마부석이 비워진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너무 오래 붙들어 두면 안 되겠지. 레이디 모르가나, 잘 돌아가시오. 그대가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를 했더라도 클라인 공작가에 베푼 은혜는 내 결단코 잊지 않으리다.”
아, 또…!
공작이 천명하는 말뜻을 금세 알아들은 페이의 눈이 떨려 왔다.
그는, 과거의 삶과 카셀의 부재를 막아 준 공로까지 합쳐서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말을 건넨 거다.
필요…없어. 물리적으로야 당연하지, 난 독립했으니까.
그렇지만. 난….
루키우스와 히논 왕국으로 가서 장미를 보고, 그 황홀한 장미들이 다 져 버리기 전에 벌어진 모든 일과, 오늘 황궁에서 본 광경까지 한데 어우러져 머릿속을 어지럽게 메웠다.
내가 바라는 일, 그건…!
“잘 가시오.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해 주기를.”
그날, 클라인 공작이 건넨 고마움의 표시와 인사가 뇌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오래전에 끝냈다고 생각한 결단을 다시금 끄집어냈을 때 떠오른 것도 하나 있었다.
외길인 줄 알았던 길 너머로 내가 예전에 걸었던 길의 풍경이 달라졌음이 보이고, 지금이라면 뛰어서 넘어갈 수 있지.
나는…. 그 길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페이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삐이이!”
“조… 조용히 해, 모모.”
루키우스도 돌아오고, 오랜만에 마법 연구가 아닌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긴 페이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엉뚱한 취미에 재미를 붙인 참이었다.
갑자기 시작한 실뜨기 놀이인데, 이건 뭐 과정도 결과도 엉망진창이었다. 수를 잘 못 놔서 혼나던 모르가나 시절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중간에 손가락과 실이 엉켜서 루키우스가 다섯 번을 풀어 줬는데 이번에도 실패하려나.
그녀는 별 모양의 실뜨기 과정표를 힐끔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루키우스는 씩 웃다가 손가락을 구부려 걸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번엔 혼자 다 완성해 볼게요.”
“그래.”
연금술 수식 같은 건 벌써 중급 수준을 상회하는 그녀가 여기엔 약하다니.
루키우스는 의외로 자수나 이런 쪽엔 소질이 있어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댔다. 그림은 별로여도 이건 손가락 두 개만 대어 주면 곧바로 완성해 줄 텐데.
도와주고 싶다.
히논 왕국의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는 그새 또 심심했다.
“…으음.”
이 실뜨기 놀이, 과연 언제 끝나려나.
한참을 또 헤매던 페이는 눈을 들다가 무심코 루키우스의 눈빛을 봐 버렸다.
노골적으로 도와줄까? 라고 묻는 듯한 간절한 시선.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됐어요. 다 엉켰는데 오늘은 여기서 그만할래요.”
“풀어 줄까?”
“네, 부탁해요.”
두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이 못하는 걸 나머지 한 사람이 보완해 주고 그러면 참 좋겠지. 물론 그림처럼, 둘 다 못하는 방면도 있겠지만.
손가락에 엉킨 실을 다 풀어 준 루키우스의 품으로, 페이가 와락 뛰어들고 말았다.
폭 안기는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한 촉감에 남자의 정신이 아득해져 심해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그녀는 뜨거워진 입술을 셔츠에 묻고 중얼거렸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거, 제 뜻대로 자르고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끝내 엉키기도 하네요. 참 독하게요.”
그녀가 구태여 이 말을 하려고 실뜨기를 하진 않았을 거다. 진짜로 하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었을 따름이겠지.
“그래.”
루키우스도, 자신이 완벽하게 망쳐 놓은 페이를 사랑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워서 사랑을 거부하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면 추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과거의 나는….
“뭐, 제가 황궁행을 마다하지 않았을 때 이렇게 되도록 정해졌는지도 모르죠. 제 정체가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숨기지 못할 것 같아요.”
몇 번이나 생각한 진정한 복수를 드디어 결심한 데는, 클라인 공작과의 만남도 한몫 거들었다.
그녀가 말했던 선을 깔끔하게 지켜 주면서도 구태여 ‘은혜’라고 언급했지.
똑같이 딸을 되찾은 공작 부인의 태도보다 훨씬 낫다.
페이는 카셀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일은 거의 다 나설 생각이고, 공작은 그 연유를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정중한 감사를 표했다.
‘왜 이제 와서 내게 이러지’라는 떨떠름한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녀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했던 상처가 많이 나았음을 깨달아서, 괜찮았다. 앞으로도 괜찮을 거다.
“그럼, 네 존재가 전면에 드러나도 된다는 거야?”
“네.”
페이도 익히 알고 있다.
가짜 공녀의 존재가 덜렁 드러나기보다, 진짜 공녀의 생존이 있어야 전자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산 사람의 물건을 빼앗아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농락한 도트리샤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루키우스의 눈에 스산함이 비쳤다.
“어렵겠지만 잘 생각했어.”
“루키우스가 전에 말했던 그때가 닥쳐왔나 봐요. 솔직히 전 제 결정을 나중에 바꿀지 몰랐어요.”
“자기가 내린 결정을 후회하고 되돌리는 것도 생물체의 권리지.”
제법 철학적인 말이 들려왔는데 문제는 그걸 두고 한가하게 사색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그런데… 말이죠.”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
그녀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꾸물거리며 내밀었다.
루키우스는 이게 뭔가 싶어서 눈썹을 살짝 까딱였다.
중간에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났을 때 예상하긴 했는데…. 역시나, 처참하게 부서진 루비 펜던트였다.
“이게 그거였나?”
“루키우스…. 이거, 원래대로 고칠 수 있어요? 제도 상점가에 나갈 때마다 물어보고 다녔는데 다들 이 귀한 보석을 무슨 수로 부쉈냐고, 저더러 대장장이 해 볼 생각이 있냐고 하던데요….”
페이가 우물쭈물하며 묻는 모습이란 무척 귀여워서, 루키우스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참으로 잘도 부쉈어. 주신전의 신물인데도 기어코 깬 걸 보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한 짓인데?”
바로아의 안배를 뻔히 아는 그가 하는 말에 낯이 더욱 없어진다.
그래도 페이는 마법사답게 호기심을 표현하는 질문만은 그만두지 않았다.
“무슨 재능이요? 설마 싸움요?”
“음. 이거 하나는 알겠어. 이 펜던트를 부순 이는 드래곤 한 마리는 너끈히 잡고도 남을 거야. 자기 잘난 줄만 알았던 드래곤이 이미 포로가 되어서 그 사람 발치에 나뒹굴고 있는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들어 보는 낯 뜨거운 소리.
“루키우스도 참!”
“그르르륵!”
놀리는 척 추어주는 말에 페이는 그의 어깨를 때렸고, 모모는 어이가 없어서 꼬리로 바구니 안쪽을 탁탁 치며 항의했다.
그녀를 적당히 놀려 준 루키우스는 루비 펜던트를 흔쾌히 받아 들었다.
“좋아, 이왕에 하기로 결심한 거 화끈하게 저질러 보자. 연극이든 오페라든, 등장인물과 무대가 화려할수록 사람들 이목이 집중되는 법이야.”
“아….”
“바로아의 이름으로. 안 그래도 요즘 심심했는데 잘됐어.”
꿀꺽.
어느새, 루키우스의 모습이 바로아의 것으로 금세 뒤바뀌었다.
한층 성숙하고 남자답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졌다.
날 보는 그들의 표정이 경악과 후회로 점철될지라도 괜찮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오도 결정도 끝났다.
“바로…아.”
루야를 데리고 히논 왕국으로 가던 날엔 긴장하느라고 이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왕국에 바바라를 남겨 두고 돌아오는 길에도 이것저것 챙겨 주기 바빠서 마찬가지였지?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흩어진 때에야 도로 물었다.
“날 믿어?”
“그럼요. 다 맡길게요. 부탁해요, 나를 찾으러 와 주었던 바로아 님.”
“기꺼이.”
그는 무척 정중한 몸짓으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기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멋지고 익숙한 동작에 가슴이 뛴다.
결국엔…. 이 모습도, 평소의 모습도 둘 다 좋아.
히논 왕국에 갈 때 바로아가 동행한 일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새로운 성녀와 드라칸 라이더 페이, 거기에 결혼을 앞뒀던 바바라 가헬이 느닷없는 부름을 받고 갔노라고 이제야 말이 퍼지고 있지.
그 외에 동행한, 미청년이라는 마법사의 이름은…. 곧 알려질 거야, 느릿느릿하게.
뿌듯한 마음으로 잠이 든 페이는 그날 안심한 채로 늦잠을 자 버렸고, 정오를 넘겨 공복으로 카페테리아에 가다 누군가를 만났다.
저 멀리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홀트데인이었다.
“페, 페페페페페페이!”
그가 양팔을 내젓고 뛰는지라, 펄럭거리는 로브 소매 사이로 바람 소리가 휭휭 들려올 지경이었다.
“홀트데인?”
“너 한참 찾았는데 도서관에도 연구실에도…. 허억, 아무 데도 없길래. 여기에 있었구나?”
루키우스에게 다 맡겨 놓고 평소보다 늘어지게 잔 그녀는 양심에 찔려서 고개만 끄덕였다.
내 일인데 그에게 너무 많이 떠넘겼나…?
그렇지만, 루비 펜던트가 원상복구되고 그걸 토대로 해서 공작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편이 나아서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