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꿈만 같은 해결책
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페이는 당장 되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실라스의 말끝을 곱씹으니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바바라 가헬의 운명을 구원해 줄 사람은 황실에만 있지 않나. 그 라냐 황비가 나서도 어렵기에 황제 아니면 실라스만이 할 수 있다.
생판 남의 일이라도 너무 안되었어, 그러니 제발!
페이는 실라스의 말을 믿고는 그를 더 보채지 않고 마탑으로 마차를 몰게 했다.
루야와 함께 가는 내내, 바바라 가헬을 걱정하지 말라는 확답을 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섣불리 말하면 안 되니까.
페이는 마탑으로 데려온 루야의 방 배정을 부탁하면서, 슬그머니 뒤편으로 온 루키우스를 잔뜩 의식한 채 말했다.
“홀트데인, 고마워요.”
“고맙긴 뭘. 마법사로 등록할 게 아니라서 저층에만 머무를 수 있지만 이건 엄연한 네 권리야. 어…. 그러고 보니, 네 서클이….”
드디어 페이의 서클을 진정으로 의식하게 된 홀트데인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그녀보다 완벽하게 약해지고 말았다.
키도…. 크윽.
존댓말? 쓰라면 지금이라도 쓸 수 있다.
까라면 까라는 게 지금의 마탑 방식인데 뭔들 못하랴.
다만…. 페이, 그의 첫사랑을 존댓말과 함께 영영 떠나보내게 될 듯싶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더 멀어질 듯한 예감이 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루야가 까치발을 들고 그녀와 홀트데인을 번갈아 보더니 한마디 했다.
“나! 이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페이는 죄 많은 사람이죠?”
“큿!”
“조그만 게 어디서 뭘 배워 가지고 온 거야?!”
“미… 미안해요. 루야가 좀 조숙해서 오해를 샀나 봐요. 그보다 할 말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홀트데인도 그들 뒤편으로 퍽 가까이 다가붙은 루키우스를 볼 수 있었다.
둘이서 사귄다지….
그녀의 머리칼을 닮은 핑크빛 소문은 은은하게 돌았으나, 부정하고 싶어 멀리하던 과거는 안녕.
내 첫사랑도 영원히 안녕!
홀트데인은 가지지도 않은 손수건을 하염없이 물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뭔데?”
“루야는 너무 어려서 혼자 자기엔 밤이 무서울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제 맞은편 방 주인이 괜찮다면 그쪽이랑 바꿔 줬으면 해요.”
“그거 굉장히…!”
좋은 생각이네, 하면서 맞장구치려던 홀트데인은 입을 딱 다물었다.
정면에 보이는, 루키우스의 살벌한 얼굴.
너무 두려웠다.
흐… 흑룡?
그는 은발을 가졌고 그게 특징적인 마법사인데도, 사납게 번뜩이는 흑안이 홀트데인을 지배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페이는 홀트데인이 대화를 하다가 말고 갑자기 굳어 버리자 고개를 갸웃했다.
“…홀트데인?”
“다녀왔어?”
목 뒤편을 거의 간질이는 음성에, 페이는 깜짝 놀랐다.
그가 뒤로 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깝잖아!
황궁으로 가는 그녀에게 미리 말해 주지도 않고, 히죽 웃고 있었을 게 얄미워서 끝까지 모르는 척하려고 했더니만.
“그래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정도면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뭘 신경을 쓰고 그래? 어차피 마탑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 대충 해. 가자. 너, 받아.”
“네? 우와아!”
루키우스는 루야에게 조그마한 봉지를 툭 내밀었는데, 안에는 앙증맞은 별사탕이 잔뜩 들어 있었다.
성녀 후보라도 아이는 아이.
“마… 맛있겠다!”
루야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별사탕을 하나 꺼내서 깨물었다. 봉투 안에 든 별사탕을 다 먹기 전에, 그들은 히논 왕국 국경 앞에 와 있었다.
따뜻한 계절인데도 바람이 은근히 춥게 느껴진다.
이곳을 자기 발로 넘어가려니, 심리적인 두려움이 몰려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계획을 다 세워 뒀다고 해도 만에 하나 어그러지면 그 책임은 제국에 돌아오게 될 터.
‘흐으….’
히논 국왕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모종의 경로로 정보를 확인한 루키우스의 말로는 죽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단다.
관을 숨겨 두고 매장을 미루는 건 주변 신하들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국왕의 친척도 거의 늙어서 죽거나 혈통이 멀어져 차기로 내세울 수 없어. 틀림없이 주변국과 결탁해 일을 꾸민 무리가 있을 거다.」
루키우스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한 무혈입성.
잘 될까?
오랜만에 본체로 돌아간 모모가 힘차게 고갯짓을 하자, 루야가 씩씩하게 말했다.
“갈게요!”
“성녀님을 모시겠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 말을 한 당사자는 바바라 가헬이었다!
황명으로 바바라 가헬의 시오넬행을 미룬 실라스는, 가헬 남작을 불러 오늘의 거사를 일부 알려 주는 모험을 감행했다.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 히논 왕국을 다시금 신성 왕국으로 되돌릴 것이며, 그 성녀의 보좌를 딸인 바바라가 하게 되리라고.
남작은 무척 당황하였으나 황실에 이어 주신의 뜻까지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오히려 남작은 침묵하면서도 은근한 기대로 고무되어 있었다.
황실에서 주관한 일이라면, 바니트 측에서 문제를 제기해도 넘겨 버리면 그만.
더군다나 과년한 딸을 덜컥 데려갔으니 황궁에서도 그만한 성의 표시를 이쪽에 해야 할 거다.
“바바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나 가서 실수하지 마라. 네가 가헬 가문의 얼굴이란 사실은 알고 있겠지?”
“네.”
“그것 참…. 성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차기 성녀가 후보로 발탁된 것도 아니고 곧바로 나오다니, 믿기는 힘들구나. 아무튼 잘 가거라.”
바바라는 꿈만 같았던 지난 시간의 대화를 떠올렸다.
꼼짝없이 시오넬 영지로 끌려가는 줄만 알았는데 성녀의 보좌역이라니, 내가….
울면서 도망치다가 정원에서 만난 꼬마 소녀가 새로운 성녀일 줄이야!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격에 젖었다.
“가지요.”
“먼저들 가라. 난 후미에서 천천히 따라가지.”
바로아로 분한 루키우스는 거대한 드라칸이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솟구쳤다.
드디어 일할 시간이다.
히논 왕궁의 평정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뤄졌다.
시엘 주신께 받은 신성력으로 만들어 낸, 신성의 보주를 들고 있는 루야 때문일까?
독실하다고 소문이 난 왕국민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내내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현하기 바빴다. 심지어 무기를 든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황태자의 선택이 완벽하게 적중했다.
로지아에서 근무하던 기사단이나 카셀 등을 동원하지 않고, 순수한 신성력을 머금은 루야를 내세운다는 계책!
물론 드라칸의 위용을 보여 주었다지만 그게 다일 수는 없었다.
히논 왕국의 다른 신하들이 왕의 죽음을 숨긴 재상 일당을 스스로 고발해 왔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페이 혼자만 제국으로 돌아왔다.
일의 경과를 보고도 해야 할 뿐더러, 루야를 보호하기 위한 자유 기사를 선발해 보내기 전까지 루키우스가 보호를 도맡아 주기로 했다.
‘말로는 늦어도 열흘이면 된다고 했지만, 그 뒤의 일도 남았지.’
카피아,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될 제국의 주신전.
그래도 황궁으로 혼자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뿐했다.
바바라 가헬은, 예상대로 히논 왕국에 뼈를 묻겠으니 돌아가 말을 잘해 달라며 간곡히 청했다.
루야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조그마한 손으로 꼭 잡고 놓지 않을 기세였고 말이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잘 지낼 거다.
‘안정되면 정식 허가를 받고 보러 가야지.’
그녀가 제국으로 떠나기 전, 루야를 보듬느라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바바라가 급히 달려왔었다.
“잠시만요!”
“바바라 양, 후일에 다시 봐요.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어요.”
“그게 아니라요.”
“네? 할 말은 다 하지 않았나요?”
바바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흔한 작별 인사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어요! 저… 들었어요. 저를 성녀님의 보좌역으로, 잘할 수 있으리라 천거해 준 사람이 레이디 모르가나였다면서요.”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하신 일이라….”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직접 말씀해 주셨어요. 그분께서 그 자리에 앉아 계셔도 누군가가 먼저 의견을 내야 행하기가 수월하다고요. 그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셨잖아요.”
바바라의 눈에는 전엔 보지 못했던 생동감이 넘쳤다.
그 예전, 진창에 빠진 마차를 구해 줬을 때보다 더 감격한 얼굴.
내가 한 일은 실상은 그렇게 크지 않은데…. 어렵긴 하나 누구든 떠올릴 말 아니었나?
페이의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고 바바라는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절대 잊지 않을게요. 레이디 모르가나, 당신은 부모님도 외면한 날 곤란을 무릅쓰고 구해 주었어요. 앞으로 제 국적이 바뀌게 되더라도 제국과의 온화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할게요.”
바바라는 자기가 한 말을 진짜로 지킬 거다.
자신이 살 자리를 드디어 찾고 무슨 일이든 실행할 수 있게 되었지.
바니트 측의 항의?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두 가문에 갈등이 생긴다면 황태자가 황실의 이름으로 잘 수습해 줄 거다.
해방이란 단어를 자기 얼굴에 드러난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바바라가 말했다.
“꼭 다시 봐요.”
“…네, 바바라 양. 당신을 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저 역시 레이디 모르가나의 손을 잡고 일어나게 되어서 고마웠어요, 우리 또 만나요!”
너무나도 힘찼던,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인사치고는 상쾌한 바람 같았던 작별.
페이 역시 그 일만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제국의 간섭과 부모님의 눈길이 없는 히논 왕국에서 바바라는 행복할 거다.
때로는 힘든 일이 몰려와도 그 또한 이겨 내면서 살아가겠지.
정말 잘 됐어….
‘그러고 보니, 이 자리 어딘지 익숙한데?’
여기를 떠나기 전에 바바라와 부딪힐 뻔했던 복도 모퉁이를 막 돌려고 할 때였다.
“앗!”
데자뷰?
누군가의 옷깃이 훅 다가오는 모습에 놀란 페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
하필 여기서 마주치다니.
목을 장식한 넥 칼라가 유독 하얗기 그지없는 클라인 공작 부인이 눈을 느릿하게 치떴다.
“어머, 레이디 모르가나.”
입은 드레스만큼이나 고상한 말투에 소름이 바짝 돋는다.
“클라인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크흠….”
불편한 듯 내뱉는 저쪽의 헛기침 소리는, 페이 역시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분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날이 올까?
그 거만했던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풀이 죽어 병문안을 부탁하였을 때도 풀렸던 마음이, 지금은 잔잔하기 짝이 없다.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쳐야지.’
페이가 아랫사람의 도리로 옆으로 비켜서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려고 할 때였다.
클라인 공작 부인을 에스코트하던 모리스가 친절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멀찍이서 뵈었는데 정식으로 인사하는 날은 오늘이 처음 같습니다. 레이디 모르가나, 저는 크로우 기사단의 모리스 클라인입니다.”
“말씀 종종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 모리스가 예의를 갖춰서 나를 대해 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