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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주신의 새로운 성녀 (103/148)

103화 주신의 새로운 성녀

‘세상에!’

느닷없이 성녀 후보라니!

갑자기, 루키우스가 왜 마탑에서 그녀에게 놀리듯 방법을 찾아보라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새로운 성녀 후보가 나타났다면….

카피아는 은퇴를 시키든지 해도 되고, 뭣보다 이 소녀가 결정만 해 준다면 히논 왕국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서거를 앞둔 국왕이, 왕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새로운 후계자를 못 찾는다고 해도 말이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저는 페이, 페이라고 해요.”

“아….”

방긋방긋 웃던 소녀의 얼굴에 조금 그늘이 졌다.

“이 소녀는 신성력을 갖기 전에도 고아여서 이름이 없었고, 당장은 루야라고 부르고 있네. 소개는 나중에 하고, 루야도 히논 왕국으로 가는 일을 좋게 여기고 있으니 준비를 하지.”

그새 기운을 차린 루야가 얼른 대답했다.

“전 가고 싶어요! 주신께서도 허락해 주셨고 저도 좋아요!”

조그만 아이가 말하는 내용이 심상치 않다.

벌써 주신과의 대화도 한 걸까? 능력이 어디까지길래…!

페이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마법사인 그녀가 보는 순간 알아차릴 정도로 강대한 신성력을 가진 성녀 후보.

아니…. 어쩌면.

이 소녀의 존재가, 주신이 카피아로 인해 상처받은 모두에게 해 준 대답일지도 모른다.

카피아는 더는 성녀가 아니다.

그저, 성녀의 탈을 쓰고 있는 악마일 뿐.

카피아의 숙명이 이토록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지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지진 않았겠지만, 이젠 끝이 났다.

정말로….

가짜 공녀를 내세워서 이득을 잡는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후대의 신성을 밝힐 새 성녀가 나타났는데!

과연 제국의 주신전이 이 소식을 알면 카피아의 손을 끝까지 잡고 있으려나?

페이는 새삼스럽게 루야를 다시 보았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한 천진하고 사랑스럽고, 자신감 넘치는 이 아이.

알게 되자마자 히논 왕국의 어지러운 정세 안으로 들여보내야 한다는 일이 솔직히 기막혔다.

어리니까 좀 더 놀게 해 주면 좋으련만.

“…….”

그 순간, 루야가 방긋 웃었다.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페이! 정말로 제가 원한 일이에요. 주신께서 손을 내밀어 주신 이후로 제 소원이 뭔지 알았어요.”

루야가 재잘거리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무엇을요?”

“히논 왕국은요, 앞으로 신앙을 원하는 이들을 누구든 받아들여 행복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할 거라고요! 저하고 함께 갈 거예요!”

루야가 씩씩하게 굴수록 마음이 더 아려 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아이를 꼭 껴안아 주고 싶다. 황태자의 앞만 아니라면.

실라스는 페이의 안타까움이 가득한 연둣빛 눈동자를 보더니 쓰게 웃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네. 히논 국왕이 의식을 잃기 전에 나와 서신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만약의 사태가 오면 이러기로 했지. 그도… 차후의 일을 예감하고 있었네.”

“후계 둘이 종국에는 서로 싸우리란 사실을요?”

“권력 계승이란 거의, 늘 그렇지. 내 경우에는 운이 좋았지만 히논 국왕의 경우엔 재난을 피하지 못했어.”

실라스는 무심하게 대꾸했으나 페이는 그 말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라냐 황비나 아스테인 황자가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이 없었대도, 권력이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실라스가 정말로 무능했더라면 지금 황태자의 자리는 그에게 없었겠지.

칩거한 동안에도 그는 자기 할 일을 가뿐하게 다 지켜 왔을 거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루야 성녀 후보님을 무사히 보호해서 히논 국왕 대리로 앉히는 일인가요? 드라칸의 힘을 빌려서요.”

“그대 혼자만 과중한 일을 떠맡게 할 생각은 없네. 혹시 선대 마탑주를 본 적이 있는가?”

푸흡!

갑자기 나온 루키우스의 말에, 페이는 조금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언제라도 말은 나오리라 예상은 했는데 하필 여기서!

그녀는 억지로, 억지로 참으며 대꾸했다.

“마탑에 오셔서 마력 측정을 할 때 멀찍이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마법사야, 물론 그대도 훌륭하지만 말이지.”

바로아가 들어왔을 때 9서클이라서 다들 기겁한 걸 생각하면 황태자의 평가는 지나치게 후하다.

페이는 바로아와 일면식이 없는 사람처럼 뻣뻣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실은… 그분이 제게 마법의 재능이 있다고 안배를 남겨 주셔서…. 그 이야기도 전에 했었지요?”

“음. 마탑으로 귀환한 이후 그대와는 얼굴을 마주하고 차 한 잔도 마시지 않은 건가? 작은 면에선 은근히 무심하군.”

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지만…!

페이는 본능적으로 반박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에 있던 루야는 웃고 있다가 고개를 몇 번 갸웃했다.

‘이상하다, 페이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갑자기 거짓말을 할까?’

그녀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혹시 그분께서도 히논 왕국의 일에 동참해 주시는 건가요?”

“그렇지. 뭣보다 현 국왕이 제법 독실한 신자라 다행이네. 제국의 주신전과는 오히려 연락이 없었으나, 장소가 어디든 믿고 따르고 선량하게 굴면 그만이지.”

실라스가 무심코 말한 이 짧은 격언을 카피아가 알았더라면.

주신 시엘께선… 이 조그마한 소녀, 루야를 좀 더 늦게 보내 주지 않으셨을까?

새 성녀가 나오고 히논 국왕의 뒷일을 마무리하게 되면.

이 소식이 왕국을 넘어 온 누리에 알려지게 되면….

카피아, 당신은 어쩔 건가요?

페이는 처음으로, 성녀 카피아란 존재를 개인적인 감정 없이 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자기 손으로 망쳐 놓은 신앙이 어디선가 다시금 꽃피우게 될 광경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그 위대한 시작에 자기가 앉을 의자는 없고 말이지.

‘이거야말로 카피아가 감당하기 힘든 복수 중의 복수…. 그래서 루키우스가 유쾌한 표정이었구나. 정말, 미리 말해 줘도 좋은데.’

그녀의 심장 부근에 늘 박혀 있던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녹아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실라스는 봉인한 서신 하나를 꺼냈다.

“레이디 모르가나, 나는 선대 마탑주와 공감대를 형성한 부분이 있어 그쪽으로는 이야기가 통하네. 여기 용건을 적어 뒀으니 돌아가서 당당히 요구하게.”

“네?”

“그가 그대와 루야를 보호하여 히논의 사태를 처리하게 도울 걸세.”

반짝반짝.

어느새 눈을 빛내며 페이 곁으로 찰싹 다가붙은 루야를 보고 있으니 현실감이 확 느껴졌다.

히논 왕국으로 가야 한다, 이 일은 무조건 성사해야 해!

실라스는 응접실 안쪽에 있는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커튼으로 가려진 뒤에 있었는지, 시종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트레이를 밀고 오려고 할 때였다.

“데려와야 해!”

“루야?”

맛있는 과자가 나오기 전, 루야는 이상한 말을 소리치더니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달아나고 말았다.

깜짝 놀란 페이와 시종 몇몇이 뒤를 쫓았으나 그새 어디론가 간 루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빠르지, 어딜 간 걸까?

카피아가 이 근처에 없다는 느낌이야 감지는 하였으나 둘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성녀는 물론, 주신전에서 온 모든 성기사의 눈에 띄어선 안 돼. 마법사인 내가 보자마자 눈치를 챈 신성력인데 그들이 모를 리가 없잖아!’

마음은 급하나, 거의 이십 분을 찾았는데도 소득이 없다.

“…레이디!”

한참 뛰어다닌 페이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실라스였다.

언제 응접실에서 나와서 이곳까지 오셨을까?

“어…?”

“쉿. 저쪽을.”

어깨 너머로 내밀어진 실라스의 손가락 끝은, 테라스 너머 정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가 있다는… 아!

정원의 길을 따라 꾸며 놓은 보송보송한 덤불 뒤에 웅크리고 있는 두 개의 덩어리가 보였다.

작은 덩어리는 틀림없이 루야였고, 큰 덩어리는….

‘바바라 가헬?’

천만다행으로, 환기를 위해 테라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깥에선 여기가 잘 안 보이나 이 안에서는 그들을 관찰하기가 쉬웠다.

테라스의 창 양옆으로 붙은 실라스와 페이는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흐… 흐흑….”

“울지 마세요, 안 보낼게요.”

‘역시…. 결혼을 거부하는 중이었구나.’

루야의 야무진 말에 울던 바바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돼.”

“주신께서 그러셨어요. 제가 꼭 원하는 일이면 들어주신다고요! 나쁜 거 아니면 다요.”

바바라는 서글프게 웃었다.

“후후…. 내가 시오넬로 안 가면 그게 나쁜 일이야, 모두가 부모님의 결정을 어기고 도망친 날 손가락질하겠지? 그 누구도 날 구원할 수 없어….”

“아니라니까요!”

루야의 조그마한 손이 눈물에 젖은 바바라의 손목을 탁 잡고 끌어오려고 했다.

바바라는 제법 우아해진 손짓으로 아이의 손가락을 떼 주며 말했다.

“고마워, 꼬마 아가씨. 이 넓고 넓은 황궁에서 날 달래 준 사람은 너뿐이야, 잊지 않을게.”

“그치만…!”

“안녕.”

바바라는 부스스하게 일어나더니,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루야의 몸에 붙은 나뭇잎부터 떼 주었다.

그러고는 자기 드레스에 붙은 흔적들을 털어 내고는 걸어서 길 쪽으로 가 버렸다.

그 발걸음은 정말로 허탈해 보였다.

루야는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차마 잡질 못했다.

“히잉….”

길을 따라서 움직인 고개와, 오동통한 볼 옆으로 쭉 내민 입술이 어쩌면 저리도 귀여운지.

가슴이 아릿해지는 광경을 다 본 실라스는 손을 입으로 가린 채 나지막이 말했다.

“바바라 가헬 양은 원래는 어제 떠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며칠 더 미뤘다는군. 도로 사정이 갑자기 나빠졌다나?”

클라인 공작과의 대면을 최대한 피하려던 과거의 자신과 같은 모습.

우연이라곤 하나 길이 막혀서 못 가는 김에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순 없을까.

“어떻게 그녀를 도울 묘안이 없을까요? 저토록 시오넬행을 원치 않는데 가야만 하다니 안타깝습니다. 막상 가게 되면 평생을 거기에서 지내야 하니까요.”

페이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안다, 이건 전통적으로는 절대 용서되지 않는 반항이라는 걸.

자식의 결혼이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부모가 주관하는 게 제국의 방식이다.

물론 연애로 맺어진 오를레앙 공작 내외 등도 있기는 하나…. 드문 일이기에 회자되는 거지, 보통은 그러지 못한다.

실라스의 눈가가 기분 좋은 방향으로 살짝 휘어졌다.

“가헬 남작가 쪽과 친분이 있나?”

“길에서라든지, 모임 등에서 잠깐 얼굴을 마주한 적은 있으나 서로 초대를 주고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그 정도 사이라면 사교계에선 널리고 널린 관계인데.”

“그냥…. 마음이 돕고 싶다는 쪽으로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실라스의 눈길이 테라스 너머, 힘없이 덤불 앞으로 나가는 루야를 바라보았다.

성녀 후보를 찾던 시종들이 드디어 발견했는지 서둘러 달려오는 모습도 보인다.

곧 바바라 가헬도, 루야도 자기 갈 길로 가게 되겠지. 이대로라면.

오늘의 안타까운 헤어짐도 언젠간 잊힐 거다.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레이디 모르가나, 내가 아까 바바라 가헬의 시오넬행이 미뤄진다고 한 말을 기억하는가?”

“네.”

“…그게 한참 뒤로 더 미뤄질지도 모르겠군. 그러다 보면 무산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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