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만약 기적이 일어난다면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잡고 가는 그의 뒤로 저벅저벅, 하는 소리가 들려오다니.
불길하다.
‘설마 날 따라오는 중인가?’
카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에 두 사람 이상이 아는 진실은 더는 비밀이 아니라지.
만약 라파엘이 페이에 이어 그에게까지 가짜 공녀 건을 폭로하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성녀와의 결탁을 밝히면 라파엘이 사랑하는 오를레앙 공작 가문에 틀림없이 치명적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말한다면…. 카셀도 반드시 나서야만 한다.
그러나 페이가 원치 않는 일은 손대지 않으리라고 나 자신과 약조했거늘.
카셀의 적안에 극심한 갈등이 비춰질 때였다.
“라파엘 경!”
“…모리스?”
일찍 와서 훈련을 했는지, 땀으로 상당히 젖은 모리스가 달려와 라파엘의 등을 툭 쳤다.
“오랜만이오, 어서 가지.”
“자, 잠깐…!”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모리스가 라파엘을 거의 끌 듯이 크로우 기사단 쪽으로 밀어 보내자, 카셀은 속으로 안도했다.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당장 몇 시간이라도 생각할 틈이 나는 편이 낫지.
그때, 모리스가 스윽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런 말을 남겼다.
“왠지 형님의 순… 안위가 위험해 보여서 왔습니다.”
“뭐라고?”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묵묵히 걷느라 카셀은 몰랐지만, 등 뒤에서 찌를 듯 유심히 바라보는 라파엘의 푸르고 깊은 눈빛은 오해를 사고도 남을 만했다.
혼기를 꽉 채웠는데도 약혼 말조차 오가지 않는, 두 명의 소공작이 유지하는 애매한 간격도.
카셀은 자기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는 모리스의 등을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상을 알기에 그는 너무 올곧았다.
* * *
히논 왕국까지 가서 장미를 구경하고 온 후, 페이는 황태자궁의 부름을 받았다.
전령이 왔을 때 곤란하니 피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동봉된 서신을 읽고 나서는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루키우스는 정말 예언자인가?
구경하고 온 히논 왕국의 문제가 곧바로 불거지다니!
그녀의 용건을 듣고 생각에 잠긴 루키우스는, 도서관의 개인 열람실로 가길 권유했다.
문을 닫자마자 페이는 급하게 말했다.
“히논 왕국이 영토는 작아도 내실은 꽤 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맞아. 커도 가난한 시오넬 영지보다 훨씬 낫지.”
“국왕이 임종을 앞뒀다는데 후계 둘이서 다투다가 한꺼번에 죽다니…!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사경을 다투는 히논 국왕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루키우스의 얼굴엔 쓸쓸한 감정이 비쳤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주변국에서 노리다가 대의명분 따위를 내걸고 들어오려 하겠지? 그중 가장 큰 세력은 아칸 제국일 거고.”
“윽….”
페이는 냉정한 지적을 듣고는 곧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실라스 황태자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국민에, 제도에 위치한 마탑의 마법사인 페이의 관점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였다.
남의 나라.
후계를 잃고 위태로운 이웃 나라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라냐 황비, 랏셀 공녀님의 경우를 보자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입술을 꼭 다문 페이를 향해 루키우스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설령 제국이 가만히 있다고 해도 다른 나라에선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히논 왕국민은, 로지아 영지로 탈출을 시도하겠지. 철조망을 뚫고 말이야.”
“그건….”
이 지적 또한 아니라고 부정하기 곤란했다.
그녀가 히논 왕국 사람이라도 안전만 보장된다면, 크고 안정적인 아칸 제국으로 오고 싶어 할 거다.
“히논 왕국에선 그 일을 문제로 삼아 제국에 뭔가를 요구할 수도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 제국은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
“어렵네요.”
“현 황태자는 멍청하지 않아. 언제든지 일이 터지면 네가 단박에 가 주기를 바랄걸? 원래 거기에 있던 블루 로즈 기사단을 여기 데려왔잖아?”
아, 그렇지.
칩거 중이었던 황태자가 도로 실권을 잡기 위해 카셀 오라버니를 위시한 그들을 불러들였다.
그쪽은 재편성을 하였다고 하니, 빠진 전력을 단숨에 채우려면….
겉보기에도 위용이 있고 기동성이 빠른 드라칸이 쓸모가 있겠지.
“…그리고 나도.”
“아니, 루키우스도요?”
페이는 깜짝 놀랐다.
“정확히는 바로아에게 온 거지만. 으음…. 그쪽이 사람들도 괜찮고 땅이 비옥해서 그런지 욕심은 나는가 본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히논 왕국, 잠깐 다녀왔는데 인상이 퍽 괜찮았다.
제국과 인접하면서, 여태 큰 충돌도 없었고 평화로워 보였지.
그런 땅이 후계자 둘의 어이없는 실책으로 큰 위기를 맞다니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없을 거야. 만약에 국왕이 장수해서 한 이십 년 뒤에 일어난 일이라면 또 모르지만.”
“어째서요?”
“원래 히논 왕국은 신성 왕국이었어. 지금은 주신전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데 예전엔 그쪽이 꽤 구심점 노릇을 했지. 고작 삼십 년이나 될까 싶은 역사지만 의의는 있었거든.”
“그런데 왜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뒤에…. 아…!”
루키우스가 한 말은, 성녀 교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카피아는 나이가 지긋한 편이고 장년 축에 속한다.
만약 성녀가 천수를 누리고 죽어서 다음 대의 성녀가 나선다면…. 후계가 없는 히논 왕국의 어지러움을 달랠 수 있으리란 소리일까?
“국왕의 혈통이 끊겨서 다음 대를 신성 국왕이나 여왕으로 갈음하는 선택이 나쁘진 않거든.”
“음…. 그건 그러네요.”
페이는 모르가나 시절에 공부했던 역사 지식을 겨우 끄집어냈다.
루키우스의 말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합법적인 적통 후계자가 없기에 주신전의 성녀가 나서서 왕국을 지켜 준다고 하면.
군침을 흘리던 인접국에서도 무력을 쉽게 들이대지는 못할 거다.
뭣보다 주신전에는 성기사단이라는 수단이 있으니까 마음도 놓이고.
“다른 나라보다 아칸 제국의 주신전이 나서서 한다면야, 이쪽 황실에서도 크게 반발하진 않을 거고. 표면적으로 둘 사이가 나쁘지는 않잖아?”
“그렇지만….”
하필 현 성녀가 카피아라서 안 될 일.
자기와 관계도 없던 클라인 공녀의 삶을 끔찍하게 만든 성녀가, 한 나라의 수장을 대리로 맡다니!
히논 왕국이 그 후에 얼마나 불안해질지, 페이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개인감정으로도, 공적으로도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었다.
“너라면 어떡할래?”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전 심각하단 말이에요!”
페이는 속으로 너무 안타까웠는데, 루키우스가 너무 싱글벙글 웃고 있어서 약이 올랐다.
우리가 함께 봤던 아름다운 장미들이 짓밟히면 싫은데!
“잘 생각해 봐. 그 방법 아니라도 뭔가 해결책을 끄집어내야지.”
“솔직히 모르겠는데, 일단은 황궁에 다녀올게요. 루키우스는… 따로 가겠죠?”
“곤란하면 그냥 응답을 안 하는 방법도 있어, 숨는 거지.”
“정말! 됐어요, 이번엔 제가 어떻게든 찾아볼래요.”
루키우스가 손뼉을 짝 쳤다.
“제일 좋은 방법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
“뭔데요?”
함정 같은데 왠지 솔깃하기도 했다.
“카피아를 끌어내린 다음, 차기 성녀를 급하게 찾아서 왕국으로 보내는 거야. 그러면 억울할 게 없지.”
페이는 입술을 삐쭉거리고 외투를 찾아 들며 말했다.
“분하지만 안 돼요. 지금 성녀가 능력은 부족해도 오래 살면서 인망을 쌓았잖아요. 새로 뽑힌 어린 성녀라니, 왕국에선 십중팔구 음모로 볼 걸요. 허수아비 성녀를 보냈다고요!”
“우리 페이는 너무 똑똑하네.”
“갈게요!”
마차에 올라 황궁으로 오는 내내, 페이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로지아에서 오래 근무한 카셀의 말을 들어 본다고 해도, 차라리 무력으로 빠르게 안정시키는 편이 최우선이라고 할 거다.
오라버니는 귀족이어도 기사로 살았으니까 당연하지.
‘하아, 루키우스야 인간의 삶에 초월한 드래곤이라서 더 말할 거리도 없고…. 곤란하네.’
황궁의 복도를 따라 걷는 그녀의 고민이 깊어졌을 때였다.
앞이 조금 어두워진다 싶더니 어깨와 팔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타악!
“아! 죄송해요.”
반사적으로 사과한 페이는 자신과 부딪힌 사람이 누군지를 살폈다.
아는 사람이었다.
‘아, 바바라 가헬…!’
“흐, 흐흑….”
“바바라 양?”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바바라는 넘어지지도 않았으면서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고, 그전부터 흐느꼈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손수건을 꺼내 내밀어도 통 받질 않았다.
페이는 민망해진 손을 그대로 둔 채 상냥하게 불렀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걸어서 바바라 양이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도… 도와줘요….”
“네?”
바바라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흐흑…! 가고 싶지 않아요, 시오넬 영지로는, 절대로…! 으흑, 흐으윽…!”
역시 싫었구나.
“바바라 양…!”
“여기에 있었구나.”
“히끅!”
복도 너머에서 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더니, 가헬 남작이 우는 딸의 팔을 꽉 붙들었다.
마구 울던 바바라는 겁에 질린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페이를 힐끗 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레이디 모르가나. 안녕하십니까. 그럼 딸을 데려가겠습니다. 결혼을 앞둬서인지 감정이 좀 널뛰는군요…. 크흠.”
“아….”
변명을 마친 남작이 걷자, 바바라는 마치 인형이라도 된 듯이 기계적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가기 싫을 텐데.
부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페이는 사교계에서 숱하게 떠들던 말을 떠올렸다.
‘안됐네.’
시오넬 영지로 결혼하여 떠나게 되었다는 말은 남을 통해서 몇 번이고 들었다. 참으로 잔인한 가십거리였다.
전의 그 노기사만큼 늙은 남편은 아니라지만 다행은 아니지.
‘영주인 스테파노도 여기로 압송되었고 크게 혼란한 땅이잖아. 아휴….’
히논 왕국의 일 못지않게 바바라도 가엾다.
서신에서 말한 약속 장소는 황태자궁이 아닌, 황궁의 주신전 근처 응접실이었다.
다 안배를 해 뒀겠으나 행여 카피아와 마주치게 될까 봐, 간이 콩알만 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불쾌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실라스는 어젯밤 조금도 자지 못했는지, 약간 피로한 얼굴이었다.
“어서 오게, 레이디 모르가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본론은 거의 곧바로 나왔다.
“히논 왕국에 대해 아는가?”
“조금요. 작금의 상태가 무척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어떻게든 소요 사태를 막고 싶습니다.”
실라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잘 되었군. 실은… 우리 쪽에서 아직 숨겨 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네.”
“무엇인가요?”
“들어오라.”
응접실 안쪽에 달린 문이 열리더니, 문고리의 높이만 한 키가 작은 소녀 한 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동그란 눈에 단발머리가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페이는 소녀의 존재를 인식하는 동시에 크게 놀랐다.
“신…성력이!?”
“그대와는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아도 통하는 바가 있어서 좋군. 맞네, 현 성녀와 비견할 정도로 신성력을 많이 머금은 성녀 후보이지. 황궁 주신전에 거하는 주교가 최근에 찾아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