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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바바라의 슬픔 (101/148)

101화 바바라의 슬픔

그제야 바바라가 시오넬로 팔리듯 시집간다는 생각이 도로 난 도트는 그, 약간 원망스러워하는 시선을 마주 보아 줬다.

당연히 가기 싫겠지.

그럼, 능력 없는 제 부모한테나 가서 따질 것이지 왜 애꿎은 내게 화풀이람?

“저는… 당신이… 너무 부러워요…!”

이만큼 말하는데도 바바라의 얼굴은 두려움과 자괴감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적당한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평생 제도 안에서 살았더라면, 귀하디귀한 공녀에게 감히 이러진 못했겠지.

그야말로 자기 인생 전체가 통째로, 절망스럽게 바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나온 말이다.

이젠 노력이고 뭐고 다 끝이니까.

“뭐?”

그러나 도트에게 있어 타인이 울먹거리는 심경은 온전히 와 닿질 않았다.

네까짓 게 뭔데? 성녀 때문에 눈치를 보고 또 보다가 겨우 연 다과회에서 내가 왜 이런 말이나 듣고 있어야 하지?

말로는 바바라 가헬, 곧 바바라 바니트가 될 예비 신부를 위해 열었다지만 여긴 클라인 공작저야. 네가 감히 발을 들이는 행위 자체가 이런 일이 아니면 꿈도 못 꾼다고!

바바라의 겁 없는 한탄은 둑이 터지듯이 끊이지 않았다.

“당신은, 내 절박한 마음 같은 건 영원히 모르겠죠? 어떻게든 도망치고, 또 도망치려고 해도 똑같은 자리에 붙들렸다가 남의 결정으로 한순간에 뒤바뀌는 인생이요.”

“…….”

“당신은 그래도… 말이라도 해 볼 수 있잖아요. 이건 싫고 저건 좋다고요. 공작 각하께서도, 공작 부인께서도 사랑하는 딸의 하소연은 들어주시겠죠!”

이게 진짜 미쳤나?

어디서 감히 나하고 저를 비교해?

더는 못 참겠어서 도트가 눈을 확 치켜뜨자, 바바라는 미친 여자처럼 비뚤어진 웃음을 지었다.

“나는요, 당신은 평생을 가도 모를 험하고 버려진 땅에 팔려 가듯이 결혼해요.”

“이봐요.”

“이 지경이 되어서야 귀부인들이 가엾게 여기며, 아닌 척 축하하는 척 선물을 주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죠?”

“내 말 좀…!”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오늘 쏟아지는 관심은 내 장례식 관 위에 놓이는 조화나 마찬가지란 걸요. 미리 주는 영원한 작별의 호의죠!”

도트는 속으로 정말 어이가 없었다.

원래는 노기사에게 시집가서 허무하게 죽을 인생, 그게 훨씬 먼 지역으로 바뀌었다고 뭐 어쩌란 거지? 그게 네 팔자잖아!

천한 게 감히!

도트는 순간적으로 멸시하는 표정을 지었고, 바바라는 제 슬픈 감성에 젖은 터라 비참함을 곱씹기 바빴다.

이래선 안 된다.

알고 아는데…. 조각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떠밀린 듯 울렁이는 감정을 도저히 추스르기 힘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애원하고 매달려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끔찍한 결정.

부모님이 정한 일에 제아무리 제도의 귀족들이라 할지라도 뭐라 말할 수 있겠나?

난 끝이잖아, 오늘부로.

이 비참하고 초라한 생에서 달아나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많지도 않은 돈에 딸을 넘기기로 한 아버지는 선심을 쓰듯, 헌 드레스 몇 벌을 구해 혼수로 딸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처음엔 말려 보려고 하였으나 늙은 바니트가 건넨 액수에 배상금까지 물기가 곤란해서인지, 언제부턴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걸로 정해진 바바라 가헬의 인생! 불쌍한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

절망한 바바라는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아… 아니….’

사람이 한적한 테라스 쪽에 서 있던 공녀와, 오늘 꽤 단정한 차림으로 초청받아 온 바바라 가헬.

딸이 바바라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려 했던 공작 부인은 매우 놀랐다.

왜 저렇게 서늘하다 못해 업신여기는 표정이지?

부채 너머로 흘깃거린 바바라의 얼굴은 마치 오욕이라도 맞은 듯 힘겨워 보이고. 그야, 원치 않는 결혼이었을 테니 젊은 나이라 비탄에 잠겼겠지만….

‘혹 우리 티아나한테 원망 섞인 말이라도 했나?’

그런 일, 고귀한 공작 부인으로 살면서 몇 번 겪긴 했다.

오히려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상대의 앞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우르르 토로하는 희한한 무리 말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니까.

절박한 상황에 몰린 자가 어이없게 내미는 이빨을 물리치든, 다독여 집어넣게 하든 둘 다 할 줄 알아야 하는데.

티아나는 얌전한 아이니 많이 놀라긴 했겠지?

억지로 그 상황을 수긍한 클라인 공작 부인은, 그날 밤 공작의 방문을 받았다.

“아직 안 잤소?”

“몸이 피곤해서인지 더 깨네요.”

“…티아나는 잘했고?”

당연히 걱정되었겠지, 싶었던 공작 부인은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낮의 일을 떠올렸다.

바바라 가헬은 내일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다.

며칠 더 있다가 시오넬로 출발하기야 하겠지만, 공작가에서 구태여 남작 영애 한 명의 환송을 나서서 해 줄 필요는 없지. 그쪽과 돈독한 관계도 아니고 말이다.

오늘 해 준 것만도 어디람?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자기 삶을 살아야지.

그녀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네… 음, 뭐. 그랬어요.”

“좀 된 이야기인데, 성녀가 저택에 왔을 때 다른 말은 안 했소?”

바바라의 우울한 얼굴을 억지로 지운 공작 부인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네, 소식이 닿자마자 말 머리를 돌려 와서 망정이지요. 염탐이라도 했는지 하필 제가 비웠을 때 오다니요, 에휴.”

“티아나는 평상시와 좀 달랐나?”

“다르게라뇨? 그때 얼굴이 얼마나 하얗게 질렸는데요. 마치 뱀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고요! 제가 그 애의 정체를 알려고, 실크 로브가 네 물건이냐고 꺼내 놓고 물었을 때보다 더 안 좋았어요.”

“흐음…. 그랬구려, 고생 많이 했소.”

클라인 공작은 딸을 아끼다 못해 늘 보듬는 공작 부인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과거 조사를 단행해야만 한다.

열쇠는 티아나와 모르가나, 둘 다 틀림없이 쥐고 있겠으나 두 사람 모두 협력해 주진 않겠지? 지금까지 진실을 꼭꼭 숨겨 놓았으니.

주신이여….

공작 부인이 슬립 차림이 되어 잠든 모습을 보고 나온 공작.

그는 쓰게 웃고는 위스키병을 따게 했다.

감정의 어지러움을 술에 의존하면 안 된다고 알고는 있으나 오늘 같은 날엔 자제하기가 어려웠다.

한 병을 다 마시고, 하인도 내보내고 홀로 다음 병에 손을 올리려 했을 때.

거칠고 다른 손이 먼저 와 막았다.

“으음…?”

남의 손등을 엉겁결에 잡게 된 공작이 눈을 흐릿하게 떴다.

“너무 취하셨습니다. 이만하십시오.”

울적함으로 흐려진 눈을 들자 아스라이 보이는 사람은 그의 큰아들, 카셀이었다.

언제 들어왔나.

“카셀이냐…! 어서 와라.”

“치우겠습니다.”

카셀은 무엄하게도,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공작의 손을 토닥이며 술병을 치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페이에게 상세히 들어 놓기는 했으되 뜻밖의 일이라 힘들겠구나 싶었다. 그녀도, 공작도.

만취한 공작은 팔꿈치를 테이블에 둘 다 올려놓은 채로 한탄했다.

“참 이상하지. 원하던 바를 다 이뤘는데 어째서 행복하지가 않을까?”

“예?”

취기 어린 눈에는 시름이 가득했다.

“모리스도 기사가 되고, 너도 변방에서 돌아와 황궁의 위엄을 받드는 기사단장이 되고, 티아나도 무사히 돌아오고…. 우리는 지금 봄보다 아름답고 찬란한 계절을 살지.”

“…….”

“그런데…. 내 마음이 왜 시시때때로 쓸쓸해지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이날만을 바랐거늘 하루하루 공허하기만 하구나. 황궁에는 화려한 장미도 무수히 피었거늘 봐도 기쁘지가 않다.”

이룰 것 다 이루고 제국 최강의 공작 가문으로 자리매김한 가주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셀은 클라인 공작의 말에서 오히려 위안을 찾았다.

조금만, 한 발자국만 더 내딛는 순간, 진짜 티아나의 억울함을 알아주실 거다. 과거의 기억이 다 돌아온 지금이라면…!

“하아…. 아들아, 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란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를 자꾸 잘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내 탓인 게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과연 무엇을 놓치고 사는지 요즘은 곰곰이 생각하고 있단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음을 내 이 나이가 되어서야 느꼈다. 아들아, 너는 나처럼 후회하지 마라.”

고개를 든 공작의 눈에, 취기가 조금씩 걷혀 갔다.

어두운 밤하늘의 달을 가린 구름이 물러가듯 청명한 광경이었다.

“기사단장이란 책무가 막중하고 클라인 대공자라는 이름을 책임지느라, 하고 싶은 일을 멈출 필요는 없다. 너는 젊고, 나도 아직은 건재하다. 부득이하게 할 일이 있다면 내게 언제든 귀띔해 다오.”

“알겠습니다.”

“쉬어라. 나도 이만 쉬마.”

카셀은 시종을 불러 취한 공작을 모시게 한 후,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튿날 황궁에 출타했다.

공작의 침실에 ‘오늘 하루만은 푹 쉬십시오’라고 쪽지를 남겨 두고 가는 길이었다.

어젯밤의 일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흐음.’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해도 될까?

우리 티아나는, 가엾은 모르가나는 끔찍이도 싫어할 수 있겠지만. 그 돼먹지 못한 가짜 공녀를 내모는 일에 아버지께서 도와주신다면…!

틀림없이 더 통쾌하겠지.

페이도 조금쯤은 마음을 돌이켜 줄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내가 꼭꼭 숨겨 뒀던 가슴 아픈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서 보여 줄 수 있을까.

“…….”

말을 타고 달려가는 길에, 어째 낯익은 뒤통수가 보인다.

크로우 기사단원의 어깨 장식인지라, 무심히 보던 카셀은 설마 싶어서 외쳤다.

“라파엘 경!”

평소였다면 절대, 먼저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이름.

그래도 아는 사이라고 걱정은 또 되었다.

“…아.”

달리는 말을 멈추고 돌아보는 얼굴이 참으로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앓았다더니 정말 핼쑥하고 광대마저 도드라져 보여 아팠던 기색이 역력하다.

이대로 황궁에 가게 되면,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지를 영애들의 한둘이 아닐 텐데?

그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괜찮은가?”

“나는…!”

진심으로 묻는 말에, 라파엘의 입술이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고 부들거렸다.

왜 그러는지야 알지.

이 일 역시 페이를 통해 들었으니 사연은 알되, 말을 할 수 없어 답답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라파엘도 그렇고.

“오랜만에 황궁으로 오는군, 같이 가지.”

카셀은 그의 말을 끊고는 독려하여 함께 말을 달렸다.

새삼 귀엽고 가여운 여동생의 생각이 난다.

나 역시 이렇게나 힘든데, 모든 진실을 품고 홀로 긴 계절을 버텨 온 그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얼굴을 보면서 당신이 나의 친오라비라고, 그 간악한 여자를 여동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을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리를 쳤다.

‘이게 정말 옳은 길인가?’

회의감을 느낀 카셀은, 어느새 녹음이 짙어지는 풍경에 눈길을 주지도 못하고 갈 길만 재촉했다.

황궁 안.

크로우 기사단은 왼편에, 황실 기사단은 남쪽에, 새로 자리를 잡은 블루 로즈 기사단은 오른편에 위치했다.

그러니 라파엘은 마땅히 왼편으로 가야 하는데도 카셀의 뒤를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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