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후회와 의심 (98/148)

98화 후회와 의심

과거의 공작은 생각다 못해 모르가나… 그래, 분명 모르가나였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마법사 페이와 똑같이 생겼으나 얼굴에 슬픔이 가득히 배어 버린 가엾은 소녀. 그 아이를 불러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내줬다.

그러나, 그 애는 주머니는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호화롭게 살게 해 줄 돈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유령이 된 듯 창백한 얼굴에, 마른 입술은 작게 움직여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표했으나….

눈의 생기는 전부 죽어 있었지.

내가 수도원으로 가서 손수 데려왔을 때만 해도 반짝이는 눈은 더는 없었다.

‘맙소사.’

공작은 그때 직감했다. 이 아이는, 자신이 근 이 년을 살아온 클라인 공작저에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대한 드래곤을 사냥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 클라인 공작저 전체가 잔치 분위기인데, 홀로 시들어 가던 가엾은 아이.

이 년 내내 여기에만 붙들어 놓지 말고 수도원에 가끔이라도 보내 줄 것을, 아이야….

클라인 공작은 진실인지 거짓일지 모르는 기억을 뒤져 끝으로 날아갔다.

에이나 노릇을 그만두게 된 모르가나가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날.

마차가 출발하기도 전 그는 황궁으로 출타했고… 그리고….

끝? 기억이 더는 없었다.

“으으…!”

“각하! 실피드, 어서 나와! 이 사람을 빈방으로 옮겨야겠어!”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한계를 느낀 클라인 공작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수심에 잠긴 연둣빛 눈망울이 가득히 들어왔다.

닮았구나. 내가 알던 그… 에이나를 거쳤던 모르가나의 무심한 얼굴과 닮았어,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나….

클라인 공작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모르가나야….”

“……!!”

페이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카셀과 대화를 나눠, 진실 판독 석상이 뭔가의 작용을 했음을 짐작은 했다.

그러나 저건!

클라인 공작의 기억이 카셀과 똑같이 돌아왔을 줄이야.

검증의 여부만 생각하던 그녀는 손을 홱 거두고, 뒤로 돌아서서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이 상황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타악.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공작의 눈가에 눈물이 배었다.

“맙소사….”

이게, 진실인가.

그는 마탑에서 티아나의 미심쩍은 과거를 추적해 보고자 친히 왔었다.

그러나 다 끝났다.

예전과 다른 듯하나 결국에는 과거의 행위를 답습하는 나의 딸, 티아나, 도로테아, 도트리샤는…. 그저 어느 시간대에 있든 한결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티아나야, 너도 과거의 기억을 가졌던 거냐? 그래서 이번엔 모르가나가 에이나로 오지도 않았는데 철저히 꺼리고 파르르 떨었던 거냐. 어째서 그랬니….’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치졸한 행위였다.

‘그 아이 앞에서 우리 집안사람 중 떳떳한 이는 없다. 카셀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모리스… 모리스도, 기억하지 못할 뿐 안 저지른 일이라고 단언하긴 어렵지 않으냐?’

공작은 그날 마탑에서 공작저로 귀환하지 않고 페이를 찾아 나섰다.

모르가나라고 불러야 하는가, 마법사 페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레이디 모르가나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름조차 정하지 못한 채로.

“…….”

마침내 페이를 찾아냈을 때는, 날이 어둡게 저문 후였다.

마탑 모처 응접실의 창가에 앉은 채로 가만히 있는 그녀와 테이블 위의 찻잔에선, 김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공작이 접근하자 고개를 홱 돌렸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그를 보지 않으려고 피했다면 오늘 하루를 꼬박 찾아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리란 것을.

싫은 일을 억지로 참아 주고 있다면, 이게… 마지막 기회인가.

공작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누군지 모를 그녀를 불렀다.

“아이야….”

“…….”

“나는 클라인 공작저에 처음으로 발을 들일 때, 주눅이 들어 파르르 떨던 너를 기억한다. 에이나가 이런 역할이니 잘하라고 잔뜩 겁이나 줬지, 데려온 이후로는 돌봐 주지 못했구나. 내 일이 바쁘다는 알량한 이유로…. 미안하다.”

미안해.

입 바깥으로 꺼내기 이토록 쉬운 말을, 왜 그전엔 죽기 직전까지 듣지 못했을까?

대가로 받은 돈이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일정 부분 달래 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깊숙하게 패인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해 줄 수는 없어.

또한, 누군가는 막대한 상처를 입으면 그걸 딱지로 만들지도 못하고 곪아서 쓰러진 채 죽어 간다.

그게 나였잖아….

미안하다는 말. 그 말을 모르가나였던 내가 한 번이라도 들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모습과 좀 더 달라졌을까?

나는….

페이의 어깨가 한숨을 쉬느라고 들썩였다.

예전보다는 낫구나, 완전히 초연해질 수는 없어도 무덤덤해진 건 사실이야. 그래….

“저는.”

“……!!”

알고 있구나, 너도.

공작은 마법사 페이가 짧게 말한 저의 호칭에 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저는, 그 일을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마탑의 마법사 페이이고, 황태자 전하의 협력 요청에 응하는 부하이자 레이디 모르가나입니다. 그게 제 정체성의 전부입니다.”

명백하게 선을 긋는 말에도 클라인 공작은 면피가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른이 아이에게 저지른 잘못이다.

그 길고 긴 잘못이 이어져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내가 그 이상한 석상 앞에서 떠올린 일은 한낱 꿈도 아닌 진실이지. 모두가 겪었으나 극히 일부만 아는 과거의 일…. 혹, 우리 티아나와 나, 그대 말고 또 있는가?”

“…….”

페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클라인 공작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 티아나가 과거와 똑같이 다행스럽게 내 곁으로, 좀 더 빠르게 돌아와 줬지. 그러나 레이디 모르가나, 그대의 모습은 과거와는 현저히 달라졌군. 나는… 그대가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된 그날 새벽에, 일이 있어 급하게 황궁으로 가야만 했소.”

“…….”

할 말 따위 없다. 무슨 말을 하지?

클라인 공작 부인이 선심을 써 줘 내준 마차는 짐마차도 아닌, 괜찮은 마차였다. 도트가 보낸 용병들이 뒤쫓아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끝에선 고마웠어’라고 멍청하게 생각할 정도로.

설령 그때 공작이 남아서 배웅을 해 줬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어느 때든 당신들은 전혀 모르잖아. 문제가 생긴 본질이 뭔지를….

“정말 미안하오. 그 이후의 기억은 모르겠고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카셀도 돌아오고, 모리스도 기사가 되었고…. 예전과는 달라졌지. 그대가 우리 가문에 뒤늦게라도 오지 않은 것은 거부의 의미라고 생각하오.”

“네. 맞아요.”

페이는 처음으로, 거절의 말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에 클라인 공작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모르가나야….”

갑자기 달라진 말투에 페이는 울지 않으려고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여전히, 눈앞의 고고하고 외로운 마법사가 자신의 딸임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죄를 청하고 있지.

이만큼만 해도 내 몸에 도는 피가 뜨거워지는데…. 괜찮지 않잖아, 바보 페이, 아니… 바보 모르가나….

“네가 이토록 훌륭하게, 마탑의 일원이자 또 드라칸을 얻어 황태자 전하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다니 잘 되었구나. 하나 이것만은 알아다오. 네가 만약 마법사가 되지 않았더라도 내 기억이 돌아왔더라면, 난 너를 꼭 찾았을 거다.”

“그래요…?”

페이는 울음기 없는 음성으로 대하려고 노력, 또 노력하여 간신히 대꾸했다.

클라인 공작의 눈에 회한이 잔뜩 비쳤다.

“내 말은 안 했으나, 그 일이 벌어진 후로 시신을 수습하여 두 분의 장례는 잘 치렀다. 이번 생에선 난리가 일지 않도록 수도원 전체에 방화벽 설치를 검토해 보마. 응?”

“…….”

페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왜, 그런 말로 내 마음을 뒤흔들려 해. 난 다 내려놓고 외면하는 삶을 택했는데.

클라인 공작은 뻣뻣하게 굳은 마법사 페이를 보며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그의 딸 티아나, 클라인 공녀도 틀림없이 기억이 있으리란 사실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빤히 알고 있으니, 그를 보자마자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말을 걸려고 노력했겠지. 아니 그런가?

그는 당시 딸의 언행을 전부 기억했다.

모르가나의 부재를 놓치지 않고 내게 쾌활하게 말을 붙여, 도로테아란 귀여운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아양까지 떨지 않았나.

‘왜 처음부터 터놓고 말하지 않은 거냐? 구태여 암흑 길드에 발을 들인 일도 그러하나… 그렇군. 이번에 루비 펜던트를 빼놓은 이유는 뭐란 말인가.’

“으음.”

쓰러졌다가 일어난 직후, 페이를 너무 오래 찾아다녀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의 신음에 눈을 뜬 페이가 물었다.

“편찮으신가요?”

“조금….”

“큐어.”

낭랑한 음성과 함께, 공작의 전신에 물과도 같은 상쾌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를 괴롭게 하던 미열과 지끈거리는 두통이 서서히 옅어졌다.

“밤이 깊었습니다. 마부가 1층에서 여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 보셔요.”

“모르가나야….”

그녀는 고개를 또 돌리고 있었다.

“저는 클라인 공작저를 이 이상으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앞으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예우는 다하겠으나, 친밀함을 원치는 말아 주세요. 그게 제가 원하는 길입니다.”

차가워도 너무 차갑다. 괴로워하는 공작을 돕는 마법은 기꺼이 써 주면서도 곁은커녕 마음 한 조각도 줄 수 없다는 저 꼿꼿한 자세.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언젠가 신탁에 따라 돌아오리란 딸의 말벗으로, 훌륭한 에이나로 키우겠다는 첫 마음은 어디로 갔지?

이대로 일어서야 하는가. 클라인 공작은 괴로웠을 페이의 마음을 이해해 몸을 일으키려다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생경한 소녀가 보이지 않는가?

‘아니?’

그녀는 낮과는 달리 후드를 쓰지 않은 차림이었다. 그런데,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그녀의 머리칼이 그와 비슷한 옅은 금발로 보이다니?

“헛….”

“또 편찮으신가요?”

페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공작이 본 장면이 거짓이라는 듯, 그녀의 머리칼은 도로 연핑크빛으로 비치고 있었다.

기절했더니 고스트에게 홀리기라도 했나? 공작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는 그대에게 할 말을 다 했는데, 연을 자르려고만 하니 더는 소녀 모르가나로 대하지 못하겠군. 소원대로 다음부터는 나도 예우를 다하겠소. 혹시 내게 할 말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구려.”

그녀는 공작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절대적인 믿음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페이는 공작더러 어서 가라는 듯, 그를 스쳐 지나가 응접실의 문을 먼저 열어 주었다.

그는 마부와 하인을 부르러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심상치 않은 말이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건가?

‘그전엔 도트리샤라고 거리낌 없이 잘 칭하다가, 공녀로 인정받은 뒤에 꺼려진다고 모르가나를 밀어냈지. 내가 안 보는 사이 입조심하라고 부인이 아마 엄포를 놓았을 거다. 그보다….’

루비 펜던트.

그건 본디 모르는 물건이고, 이번의 생에선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쏙 빠져 있었다. 이미 페이는 더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하였으니 단서를 찾아볼 만한 구석이란….

‘티아나야, 또 너구나.’

한번 물꼬를 튼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딸의 암흑 길드 출입으로 인해 괴로워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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