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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돌아온 기억 (97/148)

97화 돌아온 기억

“…….”

“정 곤란하면 그날 오전에는 제가 남았다가 공작이 오고 석상을 가동한 이후에 떠나겠습니다. 이 석상이 나름대로 민감하고, 잘못 유용되어 검사지가 유출되면 곤란해서 그럽니다. 중간 단계와 마무리만 부탁합니다.”

“생각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벤은 페이의 조그마한 손을 꽉 잡고 고마움을 표했다.

벤…. 내게 늘 곤란함을 안겨 주는 마법사.

하지만, 고의도 아니고 돌이켜 보면 결국엔 내가 밟아야 할 길을 앞서서 가게 해 준 것뿐이지. 당신은… 꼭 선지자 같네.

페이는 몇 번 더 고민하다가, 이 일을 결국엔 떠맡기로 했다. 벤도 마음이 편하도록, 상아탑으로 출발할 때 다 같이 가도 좋다고 언질까지 줘 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공작이 오기로 한 전날.

그때와 다른 감정으로 또다시 잠이 안 오자 페이는 침대에 누워서 뒤척이다가,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각오는 했는데 마음이 답답해서 복도에서 좀 걷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루키우스.”

“모모는 또 자? 네가 이렇게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도?”

그의 손가락이 뻗어 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긴장이 일시에 스르르 녹아내리면서도, 연애하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곤란하겠구나 싶었다. 페이는 루키우스의 손가락을 잡아서 아래로 내려 주며 속삭였다.

“그냥 둬요.”

“네가 너무 오냐오냐하니까 기세등등한 거야. 한 번씩 우위를 점한 쪽이 어딘지 알게 해 줄 필요가 있어. 그보다 잠이 안 오면 마탑 옥상에 가 볼래?”

“네? 그럴 수 있어요?”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상층에 가까울수록 능력이 있는 자가 그곳을 점거할 수 있는 게 마탑의 규칙.

페이는 구태여 높은 층을 바라지도 않았고, 루키우스도 방을 옮길 계획이 없어 그들은 처음 배정받은 처소 그대로였다.

뭐… 바로아는 좀 특이하게, 상층이 아니라 중간 즈음에 머물렀다지만.

약 60층 이상부터는 그냥은 이동할 수 없고 사전 허가가 필요하여 가기가 곤란할 텐데?

“내가 못 할 게 뭐 있어? 너 하고 싶다면 다 하지. 가 보자.”

루키우스는 한 걸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그대로 텔레포트를 썼다.

“앗…?”

깜깜한 공간으로 일시에 온 페이는 눈을 깜빡였다. 얼마 안 가, 그녀는 발밑과 눈앞에 탁 트인 공간을 번갈아 보고 기겁했다.

지, 진짜 마탑 옥상이잖아!

“이동 마법을 쓰기 전에 윈디 실드를 미리 둘러놓는다, 이거 상식이야. 외우고 있지?”

“…텔레포트를 제가 시전할 일이 있을까요?”

“왜 없어, 너라면 하고도 남아.”

루키우스는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드라칸 비행을 할 때보다야 나으나, 마탑이 워낙 높아서인지 불어오는 바람이 상당하다.

마법을 쓴 상태로도 남보다 기민한 그는 오른손에 내내 가지고 있던 두툼한 로브를 바닥 돌 위에 깔았다.

“……?”

“누워 봐, 여름 별자리가 다 보여.”

반신반의하면서 누운 페이는 탄성을 질렀다.

“와…!”

구름 한 점 없이 까마득한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

등은 포근하고 따뜻하고, 곁에는 루키우스가 나란히 누워 있다. 눈으로 보는 광경은 낭만이란 단어가 어떤 뜻인지 알려 주듯 무척 아름다웠다.

순식간에 황홀한 기분이 된 페이의 등허리가 꿈틀거렸다. 혼자였다면,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치고 활개치고 싶은 기분일까?

“예쁘네요.”

“마음에 들었다면 잘됐네.”

그녀는 잠시 침묵에 잠겨 별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루키우스, 만약 제가 안 나오고 그냥 잤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어쩌긴, 오늘은 공쳤구나 하고 로브 가지고 들어갔겠지.”

“후훗!”

그가 말하는 말투가 여상하다 못해 평범해서 페이는 웃고 말았다.

늘… 나를 위해 노력해 주는구나, 루키우스는.

굳게 닫힌 그녀의 방문을 보면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을 그.

왠지, 내일 생길 일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해낼 수 있어. 그건 사랑이 주는 자신감이었다.

“고마워요.”

“고맙긴.”

“요새 느낀 거 하나 있어요. 전 드래곤이라고는 루키우스밖에 모르지만, 모든 드래곤을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인 드래곤은 루키우스 혼자일 거라고요.”

“칭찬 아닌 거 알지?”

그의 말투가 다정하지 않아도 좋다. 괜찮아, 오히려 더 좋은걸!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게 하잖아.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이가 루키우스여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고.

그녀는 기습적으로 몸을 굴려 루키우스에게 닿았다.

포옥.

따뜻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페이의 육신이 노골적으로 안겨 오자, 루키우스는 뒤늦게 퍼득거렸다.

그에게도 욕망이란 게 존재한다. 이제껏 드래곤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서 애써 외면했을 뿐이지.

“떠… 떨어져.”

“싫은데요.”

“너한테 불리해!”

페이는 그의 옷깃에 더욱 안겨 들면서 키득댔다.

“추워서요.”

“그럼 들어갈까?”

슬금슬금. 루키우스의 몸이 자꾸 뒤로 꿈틀거리며 빠지다가 로브 끝까지 밀려갔다.

그와 코가 닿을 정도로 근접했던 페이는 입술을 내밀어 그의 것을 살짝 핥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사람을 놀리는 일이 이토록 재밌다니! 전에는 미처 몰랐다.

더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 루키우스가 또 도망 다니면 곤란하니까.

“…다신 이러지 마. 흡, 크윽.”

그녀보다 한참 늦게 일어난 루키우스는 왠지 쿨럭대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페이와, 벌겋게 물들인 얼굴을 원래대로 돌리지도 못한 마법사의 머리 위로 무수한 별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후.’

앞머리만 겨우 보이게 후드를 눌러쓴 페이는 의자에 앉아 공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왔어…?’

보고 싶지 않으나, 왜 구태여 여길 찾았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도 거짓말. 여전히 건강한 클라인 공작은 모자를 벗어 보이며 위엄 있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려, 레이디 모르가나.”

“안녕하신지요.”

수식 없이 깔끔한 인사말에 공작은 도리어 흡족해했다. 긴히 할 일이 있어 온 만큼, 괜히 없는 말 있는 말 붙여 가며 겉치레하기가 부담스러워서였다.

“음.”

“용건은 간략하게 들었습니다. 여기 이것이, 진실 판독의 석상입니다.”

“곧바로 사용 가능한가?”

“네. 이런저런 제한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됩니다.”

클라인 공작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꼭 알고 싶은 일이 있어서 온 길이니 여러 말은 필요치 않겠지. 부탁하네.”

석상 위에 올라앉은 가고일 장식은 괴팍하게도 생겼다.

심술궂은 얼굴에 우락부락한 근육, 무엇이든 할퀴고도 남을 발톱까지.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주둥이가 살짝 벌어져 있어서인지 별로 보고 싶은 형상도 아니다.

페이가 막 다가서서 레버에 마력을 불어넣은 직후.

후우욱!

“앗…!”

가고일의 주둥이에서 냉한 바람이 나와 페이의 머리 위를 스쳤다.

후드가 뒤로 휙 넘어가는 바람에,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가 공작의 염려를 받았다.

“레이디 모르가나, 괜찮소?”

“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그녀.

핑크 사파이어를 연상하게 만드는 화려한 머리카락과, 조금 짙어진 연둣빛 눈과 창백한 얼굴.

페이를 멍하니 쳐다본 공작은 순간 아득한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었다.

‘…내 눈앞에 있어도 나를 외면하려고 드는 저 얼굴, 저 표정. 어디에서 본 듯싶군. 어디지…? 둘이서 독대한 일은 이게 두 번째 같은데 왜 익숙할까.’

공작의 머릿속에서 이상한 대화가 떠올랐다.

“수녀원장님의 소개라면, 과연 재원이겠소. 내 믿어 보리다.”

“예, 각하. 모르가나를 잘 부탁합니다. 에이나로서 충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순된 대화, 있을 수 없는 호칭. 이게 다 무어란 말인가?

‘이 무슨…?’

“…공작 각하?”

그새 뒤로 넘어간 후드를 뒤집어쓰고 정면을 향한 페이가 불렀으나, 공작은 답하지 않았다.

아득한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든 공작은 페이의 부름도 한 귀로 흘리고는 멍하니 거기에 잠겼다.

‘너…는…!’

“윽!”

그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와 동시에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어떤 기억이 공작을 강타했다.

“각하?!”

공작의 상태가 이상함을 직감한 페이는 서둘러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또 뒤로 넘어간 후드와, 가까워진 얼굴.

한쪽 무릎을 꿇고 신음하는 공작은 눈앞의 그녀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렸다.

얼마나 힘든 과제와 목표물을 주든 꿋꿋하게 해내던, 가엾은 아이.

볼품없는 모습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밤을 새서라도 주어진 건 다 해내던 아이.

그게… 내가 알았던 모르가나, 모르가라나고?

아니야. 난 그녀를 공작저에 초대한 적이 없다. 우리 티아나가 꺼렸기에 당연한… 티아나? 티아나야…. 너는… 알고 있었던 거냐?

그래서 이번엔 처음부터 철저히 언급하지 않은 거고?

몇 달 전, 황궁에서 우연히 마주친 포셰트 학자가 마법사 페이에 대한 칭찬을 어마어마하게 했더랬다.

부인이 워낙 싫어하기에 공작저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기특하게 생각했지.

한편으로는 우리 딸 티아나가 레이디 모르가나를 본받았으면 참 좋겠다고 여기기도 했고.

‘하지만… 하지만, 수녀원장도 그녀의 딸도 한날한시에 죽고, 무척 울던 그 아이를 난 수도원으로 보내 주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근 오 년 만에 무도회에 나오신다는데 당연히 내보내야지 싶어서.’

클라인 공작은 머릿속에서 조각이 난 정보를 취합하다가 또 놀랐다.

오 년? 아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칩거를 깬 건 삼 년 만이지. 그리고 수녀원장과 셰릴 사제도 멀쩡하게 살아 있거늘. 대체…?

내가 떠올리는 이 잘못된 기억은 무엇이지?

“각하?”

“조용… 가만.”

클라인 공작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연둣빛 눈망울을 잠깐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도, 선명하고 푸릇푸릇한 눈동자가 깜빡이는 모습은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잔뜩 뻐기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 에이나인 모르가나가 고생이야 했지만 같은 수도원 출신이잖아요. 제 가명도 알고 있고요. 앞으로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수도원 동기라며 손가락질할 텐데 전 그게 너무 싫어요.”

“당연하지, 티아나야! 조금만 기다리렴. 네가 공녀임을 발표하고 나면 곧바로 되돌려 보내마.”

부인까지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말을 해?

기억 속의 클라인 공작은 모녀가 나누는 대화를 못마땅해했다.

“부인, 티아나. 다시 생각해 보구려. 오래도록 지냈던 기숙사가 다 불타 잿더미만 남았는데 사람만 덜컥 보내다니 그건 너무하지 않소?”

“밤만 되면 수도원으로 가고 싶다고 울고불고한다는데 소원대로 보내요!”

“화마로 쓰레기가 된 구역을 치우고 건물을 다시 지으려고 해도 시간이 걸리거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더 주는 편이 낫겠소.”

공작 부인은 짜증을 냈다.

“묘지도 다 지어 놨다는데 가서 꽃이나 바치라고요. 그리고 수도원이 다 망가진 것도 아니라는데 안 될 거 뭐 있어요? 그토록 그리우니 보내 주면 잘하는 거죠.”

“부인!”

“됐어요, 우리 티아나가 싫다는데 준비만 끝나면 당장 보내요.”

공작은, 그제야 비로소 공작 부인의 넓은 드레스 뒤에 숨어서 소심한 척 자기 의견을 마구 밀어 넣는 공녀를 보았다.

티아나야, 네가…?

내가 알았던 현실과 다른 이야기, 유독 똑같이 구는 너. 아기였던 네가 처음부터 포악한 성정을 타고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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