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무너지는 신앙
파아아악!
“뭐냐!”
“전투태세!”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 부딪히더니 이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앞에서 터져 나갔다.
그러더니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의 몸이 머리가 사라진 채 기우뚱하다가 넘어갔다. 한 박자 늦게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안 성녀는 경악했다.
‘이건… 이건… 커도 너무 크잖아!’
얼른 봐도 2미터는 가뿐히 넘고, 3미터인지는 재 봐야겠지.
가만히 선 채, 느닷없이 나타난 라이칸슬로프 킹을 멍하니 보는 카피아의 눈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돌을 던져 기사 한 명을 죽인 녀석에게 묻은 끔찍한 체취가 밤바람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물러서라!”
촤아악!
놈이 큼지막한 손을 들어 휘두르자, 앞서서 대열을 정비하던 기사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개중에는 흉갑이 망가졌는지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도 났다.
저들은 죽었을까, 살았을까.
카피아는 공포에 질리는 대신 은으로 만든 로사리오를 들고 소리쳤다.
“성력을 모아서 쏘아라!”
그녀 역시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부족한 신성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성녀의 명령을 들은 성기사들은 어떻게든 상대하기 위해 칼을 빼 들고 하얀빛을 발산했으나, 상대는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앗!”
휘이익.
그 큼지막한 몸집이, 뜀뛰기 한 번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왼쪽으로 갔는지 오른쪽으로 갔는지 가늠도 안 되는 찰나. 다시 나타난 라이칸슬로프 킹은 일행의 왼쪽을 노려 재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놈과 부딪혔거나, 뒷다리에 채인 기사 몇몇이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였다. 갑옷 아래로 천천히 배어 나오는 핏물이 저들의 생사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주신이여… 주신이여, 나의 힘을 돌려주십시오!’
카피아가 어렵게 쏜 성력의 빛줄기가 라이칸슬로프 킹에게 명중했다.
그러나, 놈은 멀쩡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펄쩍 뛰어 기사들의 후미까지 교란했다.
앞, 중앙, 뒤편 할 것 없이 뛰어다니며 뭉친 기사들을 흩어 놓은 뒤에야 슬로트 경이 소리를 질렀다.
“당황하지 마시오! 놈의 가죽은 칼로 충분히 뚫을 수 있소. 발톱에만 유의하여 공격을 시도하시오!”
휘이익!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이칸슬로프 킹이 어디론가로 또 뛰었다.
성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놈의 앞다리가 잽을 날리듯 아래를 찔렀다가 도로 굽혔다. 그 과정이 어찌나 유연한지 카피아의 눈에 아로새겨질 지경이었다.
닿았다, 녀석과.
“아앗…!”
“저쪽이다!”
“시선을 떼지 마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사기를 잃지 말라며 기사들은 서로를 독려하고 방어 대형을 갖췄다. 크게 다쳐 꿈틀거리는 동료나, 축 늘어져 생사를 가늠하기 힘든 이들을 잠시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아… 아파! 아파, 허억, 아프다고. 아파아…!’
그 와중에 카피아는 다쳤다.
녀석이 부드럽게 건드리듯 친 부위는 외투 아래에 드러난 오른쪽 갈비뼈 아래. 다행히 기흉이 생기진 않았는지 숨은 정상적으로 쉬어졌으나, 가면 갈수록 아픔이 거세게 몰려왔다.
발톱에 독이라도 발라 놨는지 스쳐 다친 곳이 끔찍하리만큼 아팠다.
“다시 온다!”
“으아악!”
‘다시 온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을 덮쳐 오는 라이칸슬로프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컸다.
우릴 다 깔아뭉개 죽일 셈인가?
쏜살같이 다가오는 거대한 배와 네 개의 다리를 아찔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그때.
“플레임 볼트!”
선명하고 또렷한 목소리와 함께, 적당한 크기의 구체가 날아와 라이칸슬로프의 허리에 명중했다. 큼지막한 몸집을 날리던 놈은 샤아아악, 하는 새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습격을 당한 여파인지 왼쪽 뒷다리가 착지 전 몇 번 떨렸다는 게 그나마 희망이었다.
“아!”
“블리자드!”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큰 화상을 입은 라이칸슬로프 킹의 몸이 일시에 사라졌다.
하얗고 푸르른 공간-눈보라와 엄청난 한기-에 휩싸인 놈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을 때였다.
성녀는 눈을 부릅뜨고 보고 또 보았다.
옆구리에 생긴 상처는 물론 손발, 머리할 것 없이 극심하게 얼어붙은 흔적이 가득하다. 그나마 목 부근은 꽁꽁 얼진 않았으나 작은 우박 같은 얼음이 털에 무수히 뭉쳐 있었다.
끝…이라고? 이렇게나 빠르게…?
오, 맙소사. 주신이여, 내게 구원자를 보내 주셨어!
카피아는 숨도 고르게 쉬지 못한 채로 헐떡였다.
마법이 완전히 걷힌 후, 슬로트 경과 황실에서 나온 최고위 기사가 다가가 목표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틀림없이 죽었음을 감지해 놓고서도 그들은 라이칸슬로프 킹의 언 목을 칼로 쑤셔 분리해 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상황이 불리할 때 죽은 척했다가 되살아나는 개체가 종종 있어서였다.
슬로트 경이 난입했던 마법사에게 퍽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누구신지 모르나 토벌에 도움을 주어 감사합니다.”
“바로아.”
“예?”
“내 이름이다.”
그는 다른 말은 더하지도 않은 채, 다친 이들 사이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아직 산 자에게는 치유 마법을 걸어 주고 죽은 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게, 변별력이 엄청났다.
“…….”
응급 치료를 마친 그가 한데 뭉쳐져 있는 기사들을 차례로 보더니, 중간 즈음에 우두커니 선 카피아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씨익.
웃…어?
“텔레포트.”
이윽고 그는 마법을 써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사들이 전전긍긍한 마물을 고작 마법 두 번으로 쓰러트린 걸로도 모자라 치료까지 도맡았지.
사망 세 명, 부상자는 전원 치료 완료.
라이칸슬로프 킹의 사체를 황궁까지 운반한 슬로트 경은 어깨를 폈다.
비록 성기사 둘이 죽고 황실의 기사 한 명이 순직하였으나 그는 멀쩡하고, 성녀는 물론 다른 성기사들도 무구가 조금 손상되었을 뿐 문제가 없다. 이만하면 낙승이다.
“…경?”
“예, 성녀님.”
달빛도 없는 밤인데, 성녀의 얼굴이 유독 핼쑥했다.
“포….”
“예?”
“성수를 좀 가진 것이 있는가? 내게도 남았으나 혹시 부족할까 우려되네.”
‘오늘, 그 마법사 덕택에 신성 마법을 많이 쓰지도 않았으니 남은 신성력으로 정제하면 될걸.’
슬로트 경은 못마땅했으나 내색 없이 가진 성수병 두 개를 건넸다.
“고마우이. 밤이 늦었는데 잘 자게.”
“성녀님도 주무십시오. 오늘의 전투에 대해 급히 보고를 올려야 하니 모시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망할 것, 괘씸한 놈!
카피아는 돌아서면서 슬로트 경을 향한 욕을 입술로만 곱씹었다.
상처가 가면 갈수록 아파 온다. 힐링 포션이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까 싶어 놔뒀더니. 고작 성수 두 병이라니! 눈치도 없는 놈. 이걸로… 이걸로 되려나.
성녀는 처소로 돌아와 문을 닫고 나서야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이마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땀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거둬 낸 카피아는 신음하며 상처에 성수를 뿌리고, 또 뿌렸다.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주신의 가장 큰 은총을 받은 성녀인 그녀가 타인의 치료를 요한다고….
할 수 없겠지. 그나마 죽은 이들에 대한 제령을 요구받지 않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카피아는 이를 악물고 다친 곳을 어떻게든 봉합하려고 애를 썼다.
육신의 고통, 끔찍한 고통.
능력 없는 성녀로 살아오며 멸시당하는 일이 가장 괴로운 줄 알았지. 정신적인 고통이 가장 크다고….
그러나, 몸에 난 상처 하나가 이토록 아프고 끔찍할 줄은! 아아, 아… 아아, 아아….
새벽이 다 새도록 성녀의 서투른 손길은 계속 방황하기만 했다.
이토록 힘든데도, 카피아는 참회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건 횡액이다, 횡액.
나를 단죄하기 위해 주어진 벌이 아니야, 억울하게 받은 시련일 뿐이지. 그게 돌아가야 할 죄인은 따로 있는데!
어둠 속에서 악에 받친 카피아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 * *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뭘 하면 좋을까?
페이는 요즘 그런 공상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루키우스가 만들고 보존한 공간에서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기도 당연히 좋다. 그렇지만, 세상을 완벽히 등지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다. 고립은 외곬으로 치닫기 쉬운 조건이라 위험하다.
세상에 간간이 섞이도록 노력해야 해.
모모를 타고 전국을 유람하는 일도 재밌겠고, 어디엔가 남았을 고대의 흔적을 발굴하러 다니는 것도 기대된다.
예전에 루키우스가 그랬었다.
“봉인되고 천 년 뒤에 나와서 딱히 기대 안 했는데, 눈앞에 고대 제국의 유물이 떡하니 있더라.”
“어떤 거였어요?!”
“제도 근처에 규모 좀 있는 장원. 무너져서 머리는 없고 날개 한 짝도 달아난 가고일 상이 굴러다니던데 그거 천이백 년 전 꺼야.”
“처… 천이백 년이요?!”
“작정하고 찾아다니면 더 나오겠지? 딱히 쓸모는 없다지만.”
그 장원에서도 고대적 물건인 줄은 모르고 그냥 흙 파다가 나와서 방치해 놨을 거라는데, 세상에.
어딘가에 숨겨졌을, 옛날 흔적을 발굴할 생각만 해도 설렌다.
‘흐응….’
루키우스와의 대화를 떠올리니, 최근의 일도 생각이 났다.
모모를 타고 상공을 비행했을 때 라이칸슬로프 킹의 흔적은 못 찾았다. 그렇지만 기사들은 찾아냈고, 성녀를 필두로 토벌하러 진짜로 떠나 버렸다지.
파인 에코의 보고를 통해 이 일을 뒤늦게 안 페이는 루키우스에게 간곡히 청했다.
좀 도와달라고.
‘면목 없는 일이지만, 루키우스 말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은 없었어. 나조차도 못 하는 거잖아.’
그리하여 그는 급히 바로아로 변장하고 좌표를 잡아 떠났으나, 기사 몇몇이 죽고 다치는 일은 막지 못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거기까진 그러려니 하는데 좀 미심쩍은 일이 있다.
‘루키우스, 기사들이 죽었다고 했을 때와는 달리 성녀의 낯빛이 새파랬다고 말했을 당시엔 기분이 좋아 보였어. 성녀가 놀라서 신난 거였나? 루키우스도 참 이럴 때는 어린애 같다니까.’
그가 다친 기사들은 치료해 주고, 카피아는 경상을 입은 줄 알면서도 빼놓고 왔다는 일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페이였다.
똑똑.
“페이 양, 실례합니다.”
“벤 마법사님!”
“님은 무슨, 페이 양은 곧 나와 같은 반열이 될 거 아닙니까. 그보다 잠깐 대화 가능합니까?”
“네?”
벤은 두툼한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들고 읽던 페이의 안색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굳었다.
클라인 공작이 마탑에 오겠다고?
반사적으로 종이를 밀치려 하자, 벤이 난처한 표정으로 간곡히 설득했다.
“부탁합니다. 공작이 오겠다고 한 날은 나는 물론이고 네이아 님을 위시하여 전부 부재중입니다.”
고위 마법사들 여럿이 상아탑에서 회의를 시작하면, 못해도 나흘에서 열흘 이상은 걸린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냐고?
마법사는… 원래 그런 족속.
사정을 알긴 한대도 페이는 클라인 공작과 관련된 일은 떠맡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페이 양, 진실 판독의 석상 사용법은 상아탑으로 가기 전날까지 전부 알려 드리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공작이 오기 전에 임의로 시험해 봐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페이 양보다 더 믿음직한 이가 없으니 부탁하고 싶습니다.”
클라인 공작이 마탑의 진실 판독 석상 사용을 의뢰하러 오다니!
루키우스의 예측이 옳은 걸까? 아니면, 공작은 실망스럽게도 다른 일의 진실을 알려고 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웬만하면 대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페이는 요즘 멀쩡했던 심장이 마구 날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이런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 같긴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