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앓아누운 라파엘
“돼… 됐어요!”
“왜, 오늘 하루쯤은 드라칸 라이더 말고 그냥 날 타도 괜찮잖아.”
“됐다니까요?!”
「그어어어!」
잘 먹고 잘 놀아서 몸체가 번들번들한 드라칸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 냈다.
망할 주인, 망할 드래곤. 저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지껄이고 있는 건가!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연인들이란!
제도 근처에서 드디어 하나로 맺어진 남녀가, 비행하는 드라칸은 나 몰라라 하고 하하호호 투닥거린 며칠 후.
드디어 돌아온 카피아는 황궁 모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후우.’
사라진 신성력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도 되찾지 못했다. 카피아는 고민 끝에 성전을 일으킬 때 쓰라고 주어졌던 신성의 돌을 삼켰다.
‘거북하군.’
오래 묵어 거의 귀퉁이가 부스러질 듯 위태로운 사용설명서에는, 돌 안에 든 신성력을 다 흡수하려면 일 년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하였다.
원래 신성력의 고작 삼분의 일 정도나 돌아왔을까. 아마 나머지는 간에 기별도 안 갈 만큼 적은 양이 서서히 흡수되다가 중간에 끊길 느낌이다.
이만큼도 귀한지라, 카피아는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기운을 겨우 참고 있었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끝내 오지 않았어. 그러면….’
“황제 폐하 드십니다!”
카피아는 서둘러 이마를 살짝 숙이고 눈만 치켜들었다. 식탁과 의자를 모조리 빼 버린 플렌티 홀은 전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황실에서 중대 발표가 있고, 자신도 참석할 수 있다는 말에 지체 없이 달려온 카피아였다.
이윽고 황제와 그 뒤를 따르는 황태자가 차례로 들어왔다. 황태자는 작은 금홀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찬란하여 카피아는 멍하니 서서 하염없이 보았다.
저토록 눈부신 광명이 왜 내겐 없을까. 인간들의 황제보다, 시엘 주신의 사랑과 선택을 받은 내게 자격이 없단 말인가?
“제국의 오른편 심장인 오를레앙 공작가에 고한다.”
뭐라?
깜짝 놀란 카피아는 황제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눈을 가져갔다.
있는 줄도 몰랐던 오를레앙 공작 내외가 거기에 서 있지 않은가! 그 옆에 선 자는 휘안테 후작 혼자였고. 왜 못 봤지?
성녀는 당황하는 대신 재빨리 계책을 짜냈다.
‘금광산 때문에 좋은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하니, 훈화가 끝난 뒤에 내가 접근해야겠어.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면 쐐기를 박게 해 줘야…!’
“오를레앙 공작가는 그간 숱한 전공과 혁혁한 업적을 세워 왔으나, 금광맥을 숨기고 근처의 휘안테 후작가와 다투는 중한 죄를 저질렀다. 또한! 지방 영지의 소란을 덮기 위해 일부러 상대 가문과의 싸움을 제도에서 조장하기까지 했다.”
카피아는 숨을 죽였다.
좋아, 잘하고 있는 거다. 황실이 오를레앙 공작가를 몰아붙이면 할수록 틈은 벌어지겠지. 거기를 노리면 안 될 일도 성사될 게 뻔하다!
“이에, 향후 오 년간 오를레앙 공작 내외의 황궁 출입을 금한다. 그에 더하여 어떠한 경로로도 사교계에 일절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라. 영지를 지키는 이외 다른 군사적 행동과 참여도 금하노라.”
“헛!”
놀란 누군가가 중간에 숨을 들이켰지만, 황제의 단호한 명령은 계속 이어졌다.
“이를 어길 시에는 공작 위를 일시 박탈하여 백작으로 머무르게 하고, 현 소공작인 라파엘 경이 작위를 이을 때 도로 얻게 한다. 오 년 후, 그대들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허어….”
“오, 맙소사….”
“단, 크로우 기사단 소속인 라파엘 오를레앙은 위의 처분에서 제외한다.”
정작 오를레앙 공작 내외는 차분한데, 플렌티 홀에 모인 다른 귀족들이 놀라 소리를 냈다.
무려 오 년을 사교계에 나오지도 말라는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외아들이 처벌에서 빠졌다고 해도 기뻐하기 힘들 정도로.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음의 처분을 말했다.
“휘안테 후작가 역시 마찬가지며 똑같은 수준의 벌을 내린다. 두 가문의 존폐가 걸린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아이리스 별궁으로 들어와 고하여도 좋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겠노라.”
황제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서기관이 무언가를 정리하여 황궁 하인에게 건넸다.
서류를 각각 받은 세 고위 귀족은 침음조차 흘리지 않고 억지로 삼켰다.
방금 황제가 공언한 처벌보다 더 무서운 벌금 및 앞으로의 처분이 얼른 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녀가 발걸음을 막 옮기려 할 때였다.
어쩐지 후련한 표정을 한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미안해요.”
“부인…! 그대가 왜 사과한단 말이오?”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이라니 좋지 않다.
공작은 늘 그랬듯, 자신의 부인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 했으나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잘못이 컸기에 당신도 여기까지 온 거겠죠. 전 다 받아들이겠어요.”
“오 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오. 부인, 항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더한 처벌을 감수하고라도 사교계의 출입만은 유하게 봐달라는 부탁을 드려 보자는 이야기였소. 라파엘도 나이가 있는데, 부모 없이 외로운 결혼식을 치르게 할 거요?”
“난 당신을 믿는 만큼 라파엘도 믿어요. 곧….”
공작 부인은 나긋나긋하게 말을 잇다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
“우선 돌아가요.”
오를레앙 공작은 라파엘의 말이 나오자 갑자기 입을 다물었고, 그들은 황궁을 향한 어떠한 표식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이렇게 나오니 휘안테 후작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허탕을 친 성녀가 다른 목표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어려워도 황궁에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얼굴을 보기도 어려워진다는 전언이었지, 아마?
오를레앙 공작 부인.
‘날 유독 싫어했던 분.’
클라인 공작 부인도 권위적인 사람이나,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그야말로 예법을 사람으로 빚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지식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 공작 부인의 눈매는 어쩐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데자뷰가 느껴진다.
달라졌던 모리스를 만난 그때와 비슷하게, 얼어붙은 감정이 조금 풀리려고 해.
페이는 과거의 앙금을 묻고 담백하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
“나도 반가워요, 레이디 모르가나. 라파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
라파엘이 ‘일방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긴 하나, 과도한 오해가 없게 하려고 적당한 나이대의 귀족 영애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결혼한 귀부인이나 지나치게 어려 걱정이 없는 소녀들은 예외라지만, 사춘기가 올 시기쯤에는 귀신같이 멀리했다던가?
그리고 페이는 애매하게 그 부류와는 빗나가 있었다.
미혼에, 작위까진 아니어도 귀족의 칭호는 받았고 적당한 권위는 있되 완벽한 레이디라고 하기엔 조금 꺼려지지.
사교계 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당했다고 하니 홀로 황궁에 나다닐 아들이 걱정되어 온 건가?
‘반지를 끼고 올 걸 그랬나? 으으, 곤란하네. 루키우스하고 사귄다고 온 황궁에 돌아다니며 소문을 내는 건 창피한데.’
어떤 말로 이 위기를 넘길까 걱정하던 차에, 공작 부인이 용건을 늘어놓았다.
“부탁해요. 우리 라파엘에게 문병을 가 주었으면 해요.”
“네? 문병이라고 하셨나요, 라파엘 경이요?”
페이의 커진 동공을 보며,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꾹꾹 눌러 왔던 염려를 털어놨다.
“레이디 모르가나, 그대는 황태자 전하의 부하이니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겠죠? 우리 가문에 일이 있다는 것쯤은요. 그와 꼭 관련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 라파엘이, 상심할 일이 생겨 덜컥 앓아눕고 많았어요.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친우들께 문병을 부탁하긴 힘들었어요.”
“아….”
“부탁해요.”
아스테인 황자나 카셀 오라버니가 그곳에 드나들기는 껄끄럽긴 하지. 설령 라파엘이 아프다고 해도 눈치가 보일 거야.
페이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생각을 거듭했다.
‘그런데, 라파엘이 아픈 적이 있던가? 시오넬 영지까지 갔을 때도 늘 쌩쌩했잖아. 강물에 들어갔을 때도 감기 안 걸리고 멀쩡하기만 하던걸.’
페이는 눈앞의 공작 부인이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동전을 걸고도 남았다.
구태여 날 두고 말도 안 되는 함정을 팔 리가 없지.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이 뒷문으로 가면 마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따로따로 가서 만나도록 하죠.”
‘오늘 좀 늦겠네.’
혼자 황궁으로 가겠다고 하자, 입술이 댓 발은 튀어나온 루키우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그녀가 언제 돌아오나 재미없게 시간을 세고 있을 텐데.
실피드한테 알려 줘서 마탑으로 전언을 보내게 할까?
페이는 잠깐 다른 생각을 떠올렸으나 곧 그만두었다.
루키우스가 정말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자 한다면 하고도 남는다. 그러면서도 안 하고 기다려 주는 건 페이의 결정과 능력을 존중해서다.
기다려 줄 거야, 나를.
그리고 설마 라파엘이 꾀병을 부리기야 하겠어? 이유는 몰라도 진짜로 아픈가 보니, 일단 내가 가서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도움을 요청하자.
몸을 일으킨 그녀는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준비한 마차를 타고 공작저에 도착했다.
오를레앙 공작가의 정문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드디어 들어오는구나….’
모르가나로 살 적에는 입성은커녕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공간.
네가 에이나로 부족해서 초대를 못 받는 거라고 은근슬쩍 뒤에서 비웃었던 도트. 그런 아픈 말에 단 한마디도 거들어 주지 않았던 클라인 공작 부인….
라파엘이 속죄의 자선 무도회를 열 때 오기야 했으나, 그때는 왔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뒷문으로 들어왔고, 곧바로 2층에 숨었지.
지금처럼 비록 가문의 인장이 없는 마차라고는 하나 당당히 들어온 때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잘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페이는 둘 다 살아 있기에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는 인사를 건네며 응접실로 향했다.
미리 와 있던 공작 부인은 아직 머리에 쓴 모자도 내려놓지 않은 상태였다.
“와 줘서 고마워요, 레이디 모르가나.”
“라파엘 경은 괜찮은가요?”
공작저 본채 안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적막했다. 건물 어디를 보아도 고풍스럽고 장식도 호화롭기 그지없는데, 분위기가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페이는 비로소 라파엘의 와병을 걱정하게 되었다.
시녀를 시켜 모자를 벗기게 한 공작 부인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의사에게 보였는데, 가벼운 열에 들떠 있기는 하지만 전염의 위험은 없다고 해요. 그래서 불렀어요.”
“저는 그런 점에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의 마법을 많이 연구한 마법사는 유독 장수하고 질병에도 강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사실이기도 했다. 물의 마나를 순환시키기만 해도 신체가 조금씩 회복되기 때문이었다.
“…부탁해요. 지금 누워 있는데, 의식은 있으나 가끔 헛소리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개의치 말고 용기를 북돋아 주세요.”
“네.”
페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라파엘이 누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타악.
문이 닫힌 이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귀에 매달린 스피넬 귀걸이도 주인의 마음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내가 저지른 일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어. 내가 내 마음 편하자고 털어놓은 비밀을 품고 있느라 저토록 앓아눕다니! 아아, 가엾은 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