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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라파엘의 토로 (93/148)

93화 라파엘의 토로

“이 아들이 이토록 애원하는데도 제 말은 들리지 않습니까? 어머니…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권위가 저란 존재보다 더 귀합니까? 저와의 인연도 끊고 저택을 나설 만큼요?”

뜻밖에 말에 깜짝 놀란 공작 부인의 눈이 흔들렸다.

우리를 무시하고 여기를 나갈 수 있냐고? 그와 비슷한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 날은….

그녀는 본디 작디작은 제니오트 백작가의 영애였다.

영지도 작고, 세력도 시시하고, 형제자매 중 차별받는 처지라서 지참금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백작 영애라는 이름만 겨우 걸고 있는 사교계 최악의 웃음거리 소녀였지.

매일 우울하게 살아가던 그녀를 구원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인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그의 뜨거운 사랑은 지참금 한 푼도 없이, 가난으로 신음하는 그녀를 품어 데려왔으며 매정한 친정과는 연을 끊게 했다.

하루아침에 귀한 공작 부인이 될 그녀를 향해, 옛 가족들이 일제히 언성을 높였다.

“이제까지 같이 살아 준 우리를 모른 척하겠다는 거냐?”

“너도 제니오트의 사람이야! 공작인 남편이 널 버리면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잖니?”

“잘 생각해, 누이. 정말 우리의 도움 없이 살 수 있어? 하다못해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해도 친정의 증명서가 필요한 법이야.”

“귀한 몸이 되었으니 우리는 버리겠다는 거야? 잔인하게!”

그때 오를레앙 공작은 일제히 꽥꽥거리는 그들을 경멸하듯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아픈 날은 오늘로써 영원히 끝이오. 가지, 나의 부인. 아름다운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이런 장소에 단 한시도 머물러선 안 돼.”

공작은 이 순간부터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비와 누이 노릇을 다 해 주겠다고 단언했고 그 약속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주신전에 필요도 없는 기부금을 오래도록 쏟아붓게 한 잘못을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고….

어쩌면, 황실에 귀속되어야 하는 금광맥을 탐내 휘안테 후작가와 싸운 이유도 거기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내가 가문의 귀한 돈을 하염없이 쓰게 만들었으니까.

나가려고 단장한 그녀의 몸이 의자로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오를레앙 공작이 지금도 제니오트 가문을 철저히 무시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옛 가족들은 언제든지 그녀가 버림을 받으리라 생각했기에, 결혼식이 코앞인데도 작은딸을 억지로 보내 공작의 정부 자리를 노리게 했다. 그만큼 업신여김을 당하는 게 그녀의 삶이었다.

‘나는, 일련의 일들로 나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계속 생각했어. 그러기에 카피아와의 관계도 복원했고, 남편은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승인해 줬지.’

성녀의 알량한 신성력이 비약적으로 채워지는 일은 없었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도박은 끝끝내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공작은 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늘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내 착오를 가리기 위해 껄끄러움도 참고, 클라인 공작 내외 앞에서 주신전에 가 보라며 권하기까지 했지. 그 조언도 잘못한 걸까?’

출타한 오를레앙 공작이 돌아오면, 젊은 시절이 아쉽지 않을 만큼 멋지게 변해 가는 그에게 달려가 물으면.

그는 미소를 띠며 ‘당신은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소’라고 대꾸해 줄 거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그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해 온 그 남자는.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눈이 먼 과거를 더듬느라 아련함에 젖었다.

“…어머니.”

아직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각하께서 날 아껴 준 만큼, 너도 나를 똑같이 봐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네 질책을 듣고 보니 다 내 잘못이었구나.”

이걸 인정하기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우습고 허망했다.

“…….”

공작 부인은 머리카락을 고정한 핀을 풀었다. 젊은 시절처럼 탐스럽게 영근 머리칼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외출하지 않고 휴식할 생각임을 직접 보여 주자, 라파엘의 슬펐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라파엘, 나는 네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는데…. 아프고 힘들었어도 정말 기뻤지. 공작 각하만이 날 구성하던 세상이 한층 넓어졌어.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 뒤에 염원하던 둘째는 갖지 못했지만 말이다.”

“송구합니다.”

라파엘은 그의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들어왔다. 어머니는 가능한 한 딸을 꼭 낳고 싶어 했고, 그게 아들로 태어난 그의 잘못은 아니라도 기억은 해 달라고.

“송구라니? 아니란다, 너는 내 자식이고 또 소중한 아들이잖니. 충분했어…. 어느 날 네가 들꽃을 가득히 꺾어서 선물했었지. 딱 그 한 번이었지만 잊지 못하는 추억이란다.”

그날 라파엘은 무척 혼이 났었다.

소공작은 이름 모를 풀꽃을 꺾으면 안 되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딧물이 빼곡하게 줄기를 메운 꽃을 꺾어 바친 게 문제였었단다.

어린애가 뭘 알았겠나.

공작 부인은 괜찮다고 했으나, 라파엘은 그 이후로 집사나 하인이 정원에서 다듬은 꽃 외엔 손도 대지 못했다.

“전….”

“지금 생각하면…. 각하께서 날 아껴 주는 모습이 좋아서 너를 너무 억눌러서 자라게 한 듯싶구나. 그때 좀 말릴 걸 그랬어. 너도 충분히 소년답게 자랄 권리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라파엘 오를레앙은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청년이, 또 기사가 된 후에는 바람이 후 불면 날아갈 듯 말과 행동을 가볍게 하는 사내가 되어 버렸다.

올리브나무 가지를 꺾어서 상대 기사단의 단장을 놀려 줄 만큼.

“어머니…!”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 라파엘…. 내가… 내 크나큰 잘못을 돌이킬 수 있을까?”

영문을 모르는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당연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외출은 단념하시고 황실의 결정이 떨어질 때까지….”

“…그런 문제가 아니란다.”

그렇게 하여, 라파엘은 우는 공작 부인을 통해 클라인 공작가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야 말았다.

그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듣는 동안, 페이는 마탑으로 돌아온 루키우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루키우스, 잠깐만요.”

허리로 꼼지락대며 붙으려는 팔을 떼고 떼어 내도 계속 감아 온다. 이쯤 되면 거의 엉큼한 뱀 수준인데.

“싫어. 이 정도는 허락해 줘도 되잖아?”

“이것만 좀 보고요.”

“그럼 내가 뒤에서 안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봐.”

예전 같으면, 멀리 갈 필요 없이 마탑 내부에 있는 홀트데인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말.

페이는 루키우스가 기어코 자신을 들어 소파…에 앉는다고 해야 하나, 그의 무릎에 앉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도 서신의 봉투를 뜯고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황태자궁에서는 정기적으로 서신과 봉록의 의미로 금화를 보내온다.

그리고, 이 서신은 그것과는 다르게 좀 급하게 써졌는지 다른 재질의 종이.

“…라이칸슬로프?”

그녀를 뒤에서 잔뜩 안고 있던 루키우스가 사전처럼 즉각 읊었다.

“늑대인간이지. 왜, 어디 나타났대?”

“크기가 평균적인 개체보다 훨씬 커서 라이칸슬로프 킹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는데요. 세상에, 제도 근처에? 그런 말 전혀 못 들었는데…!”

그녀는 책상 위에 놔둔 완드를 힐끗 보더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네가 굳이 갈 필요 없어.”

“사람들이 물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빨리 가서 처리해야죠.”

그레이스 수도원처럼, 제도 바깥에 터를 잡은 단체나 주거지가 드문드문 있는데 그런 곳이 습격당하면 큰일이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느긋하기만 했다.

“페이, 네가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제국의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해결할 수는 없어. 기사들은 뭐 허수아비야? 알아서 처리하겠지.”

“기사들로 상대가 될까요?”

“그 정도도 못 건사하는 나라는 그냥 없어지는 편이 낫지.”

황궁의 발리엣 경을 비롯하여 누군가는 들으면 기절할 소리를, 루키우스는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으음….”

“마침 카피아가 제도 복귀를 선언했다는데 놔두자고. 성녀님의 은총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 않겠어?”

그녀는 갑자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면 닿을 아슬아슬한 거리에, 루키우스의 코가 있고 그의 다정한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다.

“설마 루키우스가 라이칸슬로프를 소환한 건 아니겠죠?”

“내가 왜. 뭐,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물을 이계에서 소환하는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닌데 구태여 제도권에 저지를 이유가 있어? 더군다나 라이칸슬로프는 여기 출신이라고.”

“으음….”

루키우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리고 그가 안 했다고 하면 진짜로 그런 거겠지.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대하는지 몰라도 나한테는 거짓말 안 하잖아.

페이는 오래도록 드래곤으로 산 루키우스의 교활함은 모르기에 대충 넘겨짚었다. 어차피 그녀가 틀리게 생각한 것도 아니라 별다른 상관도 없었다.

“루키우스의 간섭도 아니라면 왜 갑자기 이런 곳에 나타났을까요?”

“라이칸슬로프도 나름대로 생명 아니야? 카피아가 또 제도에 모습을 드러내니, 구린내를 기꺼이 따라서 온 거지.”

“…그거, 마법사다운 해석은 아닌데요.”

루키우스는 환하게 웃고는 페이의 몸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쪽. 가볍게 부딪힌 입술에서 정열의 기운이 몰려나오는 동안 루키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사는 별은 살아 있어, 페이. 인간이 모든 일을 다 주관할 수는 없거든. 음… 지금은 그러니까, 시기로 따지면 마물이 강해지는 때야.”

“루키우스의 봉인도 그래서 풀렸어요?”

이것 봐라.

페이 말고 다른 존재가 드래곤을 보고 ‘마물’이라고 칭하면 그는 노하여 브레스를 뿜을 것이다.

물론, 그가 하는 행위라곤 헤실헤실 풀린 웃음 짓기가 다였다.

“원인에 보탠 건 사실이지. 시간이 오래 흘러서 풀릴 때가 되기도 했고.”

“정말 안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카셀 오라버니께 처리를 명하시면 꼼짝없이 가야만 하잖아요.”

쪼옥. 

루키우스의 입술이, 예고 없이 페이의 것을 한 번 더 삼켰다. 아까는 살짝 닿은 거라면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빨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읏…!”

농밀한 애무는 아직 견디기 힘든 그녀였다.

루키우스는 마주 본 채로 거의 무너지려는 페이를 안으며 속삭였다.

“그쪽을 동원하려면 너에게도 연락이 재차 올 거야. 괜히 나서지 말고 그 일대나 한번 순찰해서 보고서를 보내 주자고.”

“밥값이라, 좋아요.”

제도 위를 드라칸으로 날아다니는 일은 당연히 허가를 받아야 하나, 부절도 있고 제도 근처의 가벼운 비행은 괜찮다는 언질을 전에 들어 뒀다.

마탑이 제도 안에 있어도 어차피 루키우스가 외곽으로 데려다주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페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모모를 데려다가 본체화시켰다.

“탈까?”

윽! 

짧은 말을 여상스럽게 내뱉는 저 입술이, 견디기 어렵다.

애써 그의 너른 품을 무시하고 드라칸의 등 위에 올라도, 뒤에 훅 다가오는 온기와 맞닿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페이의 아랫입술이 경련으로 자꾸만 떨려 왔다.

“그러다 떨어지겠어.”

“헛…!”

루키우스가 옆구리를 팔로 부드럽게 받쳐 주자, 페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렸다.

「구우우….」

약간의 불만을 표하는 드라칸의 음성과 함께, 귓전으로 달콤한 말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꽉 잡아 줄게. 아까처럼 무릎 위에 앉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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