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바로아의 등장
이만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흔할 리가 없지 않나. 그게 아니라면, 원래 고위 마법사들은 성격이 다 괴팍할 수도 있고. 더군다나 반말 말투를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익숙할까…. 이상하긴 하군.
모닥불의 불씨가 사그라들 때쯤, 루키우스의 손가락이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죽어 가던 모닥불이 적당한 크기로 활활 타오르더니 샐러맨더가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실체화된 정령을 처음 보는 실라스가 감탄했다.
“이게 샐러맨더인가!”
“…….”
“뛰어난 마법사는 정령도 함께 다룬다더니 과연 놀랍군.”
샐러맨더는 뒷다리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적당히 뛰어가 보초를 서듯 근처를 경계했다. 작은 몸으로도 위용이 상당하여 실라스는 몇 번 더 감탄했다.
루키우스는 무심하게 물었다.
“저쪽에 계신 기사님들은 그대의 친구들인가?”
들켰나.
실라스는 이 방랑 마법사의 예리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마물 사냥에 미쳐 있고, 귀족을 우습게 아는 태도를 보인다고는 하였으나 애꿎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지.
지금도 충분히 불쾌함을 표시할 수 있는데 신사답게 말하고 있지 않나?
실라스는 능력이 출중하고 성격이 모난 편이 그와 반대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소.”
“퀘이사 백작네에서 온 느낌은 아니지만, 난 당신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으니 그런 줄 아시오.”
나름대로 생각해서 겨우 존대 비슷한 말을 붙여 줬으나 참을 대로 참았던 발리엣 경은 숨겨 둔 기사들도 들켰겠다, 낮게 으르렁댔다.
“이봐, 마법사씨. 예의를 배웠다면 버려두지 말게.”
“그만. 난 글라디스라고 하고, 그대의 생각대로 기사가 맞소.”
“귀한 집 기사겠지.”
‘틀린 말은 아니로군.’
실라스는 이 마법사가 툭툭 내던지는 말투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쓰게 웃었다.
아니 그런가? 돈도 없고 위세도 없는 집안의 기사라면 기껏해야 종자 한 명에 동료 기사와 말을 데리고 나선 길이겠지.
이렇게 마스터의 호위와 기사단 일부를 이끌고 남의 영지에 나다닐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미끼는 던져 봐야 한다.
“뭐 그렇다고나 할까.”
“미리 말해 두는데 난 한 군데에 진득하게 머무르기는 원치 않소. 내가 떠나온 곳에서도 마찬가지니 나를 어떠한 수단으로도 붙들 생각은 하지 마시오.”
퀘이사 백작도 나름대로 이 방랑 마법사의 실력에 눈독을 들여 직접 내려왔으나 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었나?
실라스는 황태자의 이름으로 이자에게 어디까지 뭘 하사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다 물었다.
“난 이름을 알려 줬는데, 그대는 알려 주지 않는 건가?”
“바로아.”
“바로…아?”
어디선가 들어 봤던 이름이라 실라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그게 현 마탑주 네이아 이전의 것임을 간신히 알아챘다.
마법에 통 재능이 없는 황가의 계보상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것만도 대단했다.
“…아침이 밝아 오는군. 슬슬 모닥불이 필요가 없어질 텐데 그만 일어나도 되지 않나?”
바로아란 마법사의 축객령이 떨어졌어도 실라스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선대 마탑주와 이름이 같군! 내 생각이 맞나?”
“…….”
대꾸가 없다.
실라스는 이를 호재라 여겼다.
“황궁으로 올 생각은 없나? 바로아, 자네와 비슷하게 황실의 관리하에 이름만 올려 두고 편하게 생활하는 마법사도 있다네. 물론 그녀는 성실하고 헌신적이지만, 상급자가 과도하게 귀찮게 굴지도 않는 편이지. 생각이 있다면 이 패를 줄 테니 나중에라도 찾아오게. 십 년 후, 이십 년 후라도 괜찮으니.”
황태자가 페이의 칭찬을 아낌없이 하자 루키우스는 속으로 너무 흐뭇했다.
그래, 예전에 그가 숱하게 경험한 고대 제국 및 왕국의 거만한 놈들보다는 이놈이 좀 낫다. 구관이 명관이라고는 하지만, 고대인의 핏줄을 이어 이만큼 나아졌으면 진화된 셈 쳐야지.
바로아는 샐러맨더를 불러들여 자기 소매로 쏙 넣으며, 그가 내민 패를 힐끗 보았다.
“그쪽의 얼굴을 봤으니.”
“……?”
“그 패는 없어도 되겠지.”
“오겠다는 소리인가?”
실라스가 되묻자, 루키우스는 얼굴 근육을 그가 보통 안 쓰는 방향으로 꿈틀거리려고 애썼다.
나름대로 황실에서 치열하게 산 놈을 인간이라고 우습게 보면 곤란했다. 방심했다가 선대 마탑주 바로아와 마탑의 마법사 루키우스가 동일 인물임을 들키면 골치가 아프니까.
“조만간 마탑에 들를 거니 뭐, 기회가 되면?”
“역시 선대 마탑주인가! 엘프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그냥 봐서는 나이를 모르겠군.”
‘윽!’
실라스가 흥분에 차 하는 말을 무심코 듣던 루키우스는 쿨럭거릴 뻔했다.
페이…. 그녀는, 그의 존재를 두고 ‘엘프 마법사님’이 아닐까 여러 차례 고민했다지 않았나.
뭐라더라? 하이 엘프의 피가 섞였기에 세월이 흘러도 젊어 보이는 게 아니냐고 해맑게 물었었지?
그와 비슷한 말을 남에게서 들을 줄이야.
“이만 가시죠. 할 대화는 다 하셨습니다.”
그새 인내심이 바닥이 난 발리엣 경이 루키우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젊은 실라스는 어릴 적 일이라 잘 몰라도, 그는 연륜이 있기에 선대 마탑주의 명성과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대 마탑주 바로아는 패도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직접 대하고 나니 못마땅한 것투성이긴 하지만.
딱히 거슬릴 게 없기에 이쯤은 날을 세워도 괜찮다고 생각한 발리엣 경이었다.
“잠깐. 아직….”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기회가 된다면.”
“좋네! 사실 난 방랑 기사 글라디스….”
“…가 아니라 황태자 실라스겠지. 옆에 있는 기사가 소드마스터인데 그냥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일 리 없으니. 내 말이 틀렸나?”
“하.”
실라스는 만족의 한숨을 쉬었고, 발리엣 경은 정체가 들킨 김에 손짓하여 근처에 대기하던 기사단원들을 다가오게 했다.
“그럼 난 이만.”
루키우스는 일부러 그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근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텔레포트로 혼자 쏙 사라졌다.
불쾌감을 꾹꾹 참고 있던 황실 기사단의 발리엣 경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무도한 자입니다. 전하의 정체를 알면서 끝끝내 반말을 일삼다니! 그만두십시오. 차라리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을 포섭하는 편이….”
“그만두게, 경. 오히려 저런 성격이 협력을 얻어 내기에는 더 쉽네. 돌아가면 마탑에 전언을 보내 선대 마탑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기록물을 좀 요청해야겠군.”
“…알겠습니다.”
실라스는 바로아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무척 흡족해했다.
“아는 사이 그 이상이 되었으니 수확은 좋군. 퀘이사 백작이 아직 영주관에 있다지만 들르진 않겠네. 귀환한다.”
“예.”
여전히 가발을 쓴 실라스가 기사단을 이끌고 사라진 후.
파앗. 작은 파열음과 함께, 다 꺼진 모닥불 근처에 루키우스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숯검정이 된 나뭇가지를 발로 비비며 중얼거렸다.
“인간과 어울리기는 역시 쉽지 않군.”
앞으로 1인 2역을 하려면 머리를 더 굴려야겠지.
귀찮은 일이 숱하게 떠밀려 온다고 해도 그는 다 해낼 작정이었다.
어느새 조금씩 하얗게 변해 가는 하늘에도, 별은 여전히 떠 있다. 이번엔 별을 연결해 페이의 얼굴을 금세 그려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페이, 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거 알아?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진 않아. 왜냐하면… 나하고 똑같으면 네가 너무 힘들 것 같거든. 넌 그냥 나를 적당히 좋아해 주기만 해도 돼. 노력은 내가 앞으로 알아서 할게.
황태자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으나 아무튼 ‘선대 마탑주 바로아의 재등장’을 증명할 이가 생겼으니, 이걸로 되었지.
그의 그리움은 페이를 향해 먼저 달려갔고, 이윽고 육신이 의지를 따라 마탑으로 향했다.
* * *
귀족 부인의 치장과 외출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느 시대, 어느 성장 과정에도 마찬가지나 그 대상이 공작 부인이라면 남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치장은 퍽 간소한 편이었다. 화려하게 꾸미는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돕는 하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지경이었다.
머리를 고정한 핀은 보석 하나 없는 은제에, 드레스도 레이스며 브로치를 다 빼고 단추도 밋밋한 것으로 골라 다시 달게 하다니.
드레스 색깔만 연갈색일 뿐 거의 상복이나 다름없는 수준 아닌가.
“마님….”
“치워라. 그런 걸 달고 다닐 때가 아니야.”
시녀가 보다 못해 들고 온 보석함을 물리게 한 그녀는 여분의 마차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근신하는 공작 부인이 임의로 공작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들켜선 안 돼. 그러니, 가문의 문양이 없되 적당히 괜찮은 마차를 골라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콰앙.
서늘한 말이 먼저, 문이 뒤늦게 열리는 순서로 라파엘이 들이닥쳤다.
귀하디귀한 외동아들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그녀는 경악하여 소리를 질렀다.
“라파엘!”
“나가 보게.”
라파엘은 차갑게 말했다.
“어….”
“어서!”
“알겠습니다….”
시녀는 둘의 갈등을 견디지 못해 쩔쩔매며 나갔고, 공작 부인의 내실에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는 모자만이 남았다.
이건 누가 뭐래도 월권행위다.
시중드는 시녀를 아들이 다그쳐 내 앞에서 내쫓다니!
당황으로 인해 턱 밑이 뜨뜻해진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야단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라파엘, 예의를 지켜야지! 네가 아무리 내 아들이라고 해도 남자와 여자 간에 지켜야 하는 선이란 게 있는 법이다. 또한 나는 이 가문의 안주인이야! 나중에 네 부인에게도 이러한 모욕을 줄 거냐?”
“나가지 마십시오.”
“라파엘!”
늘 선한 빛이었던 라파엘의 푸른 눈이 유독 비탄으로 가득했다.
“사교계에 나서지 말고 근신하라는 명령이 거둬지지 않았습니다. 왜 황가의 권위를 끝끝내 무시하는 겁니까? 원래대로라면 이 공작저 자체가 황실의 군사들로 포위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호의를 받는 지금이 모욕적이어서 견디기 힘드십니까?”
“난…!”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찔끔했다.
실은, 오늘 아침까지 고민하다가 생각을 겨우 고쳐먹은 시점이었다.
성녀 카피아가 믿기 힘든 인물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그녀가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에게 호의를 수없이 베풀지 않았나? 되돌려 받을 이문이 충분한데 그 패를 두고 불안하다고 단번에 엎어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다.
뭣보다 지난번, 클라인 공작 부인에게 당한 수모도 있고. 빚을 졌으니 그건 갚아 줘야 마땅한 일이다.
일단 말이나 좀 들어 보려고 성녀가 몰래 알려 주고 간 아지트로 가 볼 셈이었는데. 더구나 곧, 제도로 정식 복귀를 선언한다고 하기에 남의 눈을 피해 만나기는 지금이 적기였다.
하나 생각지도 못하게 라파엘이 막아설 줄이야!
“가문을 위해서라는 말로 모든 허물을 다 덮을 수는 없습니다.”
“라파엘,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라파엘은 보기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지으며 제 어머니를 추궁했다.
“저야말로 가문을 아끼기에 이러는 겁니다! 더는 좌시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어디를 가시려 했습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네가 지금 날 취조하겠다는 거야? 어찌 이런…!”
공작 부인의 말은 중간이 툭 잘리고 말았다.
“위중한 병이 생겨 치료사를 직접 찾아가야만 했습니까? 그도 아니면, 황제 폐하의 발치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려 하셨습니까?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외출은 불가능합니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