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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닥쳐오는 공포 (90/148)

90화 닥쳐오는 공포

웃고만 있던 공작이 포크를 내려놓더니 공작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 어디 나갔던가?”

“예? 아니요. 어제도 오늘도 쉬고 있었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으음… 어제 귀족원이 소집되었는데 나는 빠져 있었지. 거기 갔던 에솔트 백작의 말로는 시오넬 영지라 했었나, 거기서 무척 큰일이 있었다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 다 믿기 힘들었는데, 오늘 황태자 전하께서 어제 모이게 했던 이들을 다 불러서 쐐기를 박았다는군.”

투툭.

공녀의 포크에 아슬아슬하게 집힌 오렌지 조각이 접시로 떨어졌다.

루민트의 일 때문에 어렴풋이 예감은 하고 있었으되, 무서운 진실이 들려오리란 생각이 닥쳐왔다.

‘시오넬’이란 단어가 들려온 그 순간부터….

“무슨 일인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공작 부인이 여상히 묻자, 공작의 눈길이 공녀에게로 향했다.

쯧쯧.

제 둘째 오라비가 기사가 되어 화려하게 돌아왔는데 살갑게 인사도 못 붙이고, 입맛이 없다고 하녀를 시켜 케이크부터 내오게 하더니 그것마저 깨작깨작.

돈이며 드레스며 외유며 원하는 대로 다 하게 해 줬는데도 왜 저럴까? 버릇이 없어, 버릇이.

가면 갈수록 예쁜 구석이 없으나, 나중에는 우리 모리스처럼 확 달라질지도 모르지. 사람은 오래 두고 보아야 하는 건가.

겉으로 보이는 예법은 잘도 배워 놨더니 그것마저 퇴화하는 중이라니.

공작은 애써 공녀의 허물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험한 이야기라 식사 도중에 할 만한 건 못 되오. 어차피 내일부터는 어딜 가든 이야깃거리가 될 테니 궁금하면 아무 데나 가 보오.”

“시오넬 영지…? 으음, 아! 알겠네요.”

“음?”

클라인 공작 부인은 박수 대신 손가락 몇 개를 가볍게 부딪쳤다.

“왜, 론 바니트 경 있잖아요. 바니트 경의 고향이 시오넬 영지라고 했어요. 조만간 바바라 가헬 남작 영애가 결혼하려고 시오넬로 떠난다던데요?”

공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바니트 경은 결혼하지 않았나?”

“네, 그이 말고 바니트 경의 숙부라고 했어요. 이름이… 뭐라더라. 거기까진 기억이 안 나는데 나이 차가 마흔이 넘는다던데요.”

“쯧쯧, 후처로?”

“뭐 그런 셈이죠. 시오넬 영지가 척박하고 살기 힘들다면서 다들 뒤에서 수군대더라고요. 지참금 대신 남자 쪽에서 돈을 받은 거 같다고요.”

“…….”

귀족가에서 딸에게 들려 보내는 지참금은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이자 방패. 그것마저 포기하다니 놀랍고 참담한 이야기였다.

“가기 전에 간단한 자수회나 다과회라도 열어서 적당한 선물을 안겨 줄까 해요. 듀란 자작 부인 말이, 그쪽에 가면 평생 제도로 다시 오기는 힘들다고 해서요.”

“당신이 잘하는 거요. 남에게 말 안 오가는 선에서 더 챙겨 주구려.”

“알았어요.”

진창 마차 사건은 까마득하게 잊은 공작 부인은, 시골 중의 시골로 가게 된 바바라를 퍽 안타깝게 여겼다.

같은 변방이어도 카셀이 있었던 동부 로지아는 보급이라도 잘 되고 길도 다 뚫렸는데 거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니 안됐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도트는 그 뒷날, 공작 부인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제 몸은 괜찮니?”

“그럼요.”

도트는 어여쁘게 웃으려고 애를 썼다.

바른 일꾼 길드에 몰래 숨어서 기다렸던 카피아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제도에 돌아오지 않은 몸 아닌가.

또 움직였다가 행적을 들킬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 그러나, 가만히 웅크리고 숨는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진다는 보장도 전혀 없지.

‘내 예상대로라면…. 아아, 너무 두려워. 그래도 알아야만 해!’

도트는 자기 몸에 불이 붙었다면,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구르고 또 굴러서 누구든지 괴롭힐 작정이었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모리스의 침실이 있는 위층을 힐끗 쳐다보고는 타일렀다.

“티아나, 네가 모리스의 외면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사실 안다. 그 이후로 사과도 받지 못했고, 응. 많이 서운했지?”

“전 괜찮아요. 둘째 오라버니께서 멋진 기사가 되셔서 귀가하신 게 제 기쁨이죠. 다 잊었어요.”

오랜만에 살아난 공녀의 애교에, 공작 부인도 활짝 웃었다.

“호호, 그래. 잘 생각했다.”

“어머니, 오늘 어디 나가실 건가요?”

“응?”

그제야 귀염둥이 딸이 자신과 함께 외출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 공작 부인은 생각에 잠겼다.

어제 남편은 분명 ‘험한 일’이라고 했다.

‘웬만하면 모르게 하고 싶은데.’

그녀야 사교계란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은 제국 내의 투쟁과 역사를 다 알고 있으나, 우리 딸은 아니지.

나름대로 고생했다고는 하나 사교계는 그와는 또 다른 세계 아닌가. 나쁜 일은 최대한 늦게 아는 편이 나았다.

클라인 공작 부인이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이자, 공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요즈음 아파서 그간 고맙게 해 주신 귀부인들 앞에 나서지도 않았죠. 적당히 인사만 하고, 저는 뒤편으로 빠져 있을 터이니 편하게 이야기 나누셔요. 제가 힘들었다고 해서 모습을 쑥 감췄던 일이 부끄러워서 같이 가고 싶어요.”

“오, 그게 무슨 소리니. 넌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단다. 하필 그 성녀가 왔을 때 자리를 비운 내 탓이지.”

공작 부인이 성녀를 언급하자, 도트는 경련이 이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살짝 만졌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이리하여 간신히 외출을 따라나선 도트는, 귀동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야 말았다.

‘미친…!’

구덩이를 파고 길트론을 잡아다가 밑으로 패대기라도 쳐야 하려나!

길드 안에서 느닷없이 성녀를 마주했을 적에도 예상은 했으나, 의뢰 내용이 성녀 측에 고스란히 노출되다니.

틀림없다, 내가 한 의뢰를 수행하는 척하고 시오넬 영지 북부 일대를 싹 뒤져서 내 흔적을 찾아낸 거야.

루민트는 물론이고 내 가족까지 다 빼돌려서 어딘가에 숨겨 놓고, 불을 질러 나를 안심시켜서 허송세월을 보내게 만들었어!

도트는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름대로 얌전하고 치밀하게 일을 수행했다고 뻐겼는데, 처음부터 성녀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꼴 아닌가.

“헛…!”

도트는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갑자기 무서운 추측을 하고야 말았다.

“왜 그러니?”

“아, 아니에요.”

애써 괜찮은 척한 도트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설마… 성녀는, 과거에도 이 일을 똑같이 알고 있었던 건가? 맞아.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야기가 다 돼! 다른 점이라는 건…. 내가 공녀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얼마 안 되어 모르가나를 죽였기 때문에, 성녀가 제도로 아직 오지 않아서라는 것만 다르잖… 잠깐.’

도트의 생각은 루비 펜던트에도 미쳤다.

지금의 생에선 그 귀물을 모르가나에게서 훔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공작저의 그 누구도, 왜 펜던트는 가지고 있지 않냐고 묻질 않았지, 오늘 이때까지.

공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에서 모르가나가 공작가의 잃어버린 딸임을 직감했을 당시엔 둘 다를 위조했다.

만약 훔쳤다가 ‘제가 어렸을 때 입었던 실크 로브와 루비 펜던트가 없어졌어요’라는 말을 모르가나가 했다간 큰일이니까.

실크 로브는 아예 며칠씩 가져다가 의상실에서 레플리카를 만들었으나, 루비 펜던트는 보석상에서 너무 값비싼 물건이라고 해서 위조도 힘들어 적당히 흉내만 냈었지.

진짜 루비인 보석보다, 금줄 부분이 의외로 재현하기 어렵다는 소리나 들었다.

그래도 바보 모르가나는 둔감해서 잘 몰랐잖아….

아무튼, 그 두 물건을 내밀었을 때 공작 부인이 까무러쳐 잡은 쪽이 실크 로브임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목걸이는 그 뒤에 어영부영 넘어가서 모르겠고.

‘어떻게 된 거지? 루비 펜던트는 가문의 표식이 아니라 성녀가 모르가나에게 준 선물인가?’

“도착했습니다.”

“오늘 고생 많았다, 티아나야.”

“네….”

도트는 마차 문이 열리기 직전, 공작 부인에게 일을 소상히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음은 굴뚝같아도 처지가 너무 고단한지라 안 되겠지만.

‘아아… 차라리 전생에서 물어볼 걸 그랬어. 난 그때에도 두 개의 물건을 다 훔친 시점이라 모르가나를 죽이는 그날까지 안심하지 못했잖아. 왜 난 단 하루도 신나게 살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만 하는 거지? 불공평해.’

또 한 번 시간을 거스를 수만 있다면, 그때는 정말 실수하지 않을 텐데.

도트는 정말이지 땅을 치고 싶었다.

만일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야말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거다.

모르가나가 수련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목을 졸라 죽이고 공녀로 인정받은 다음, 수도원에 불부터 질러 다 죽여 버려야지.

성녀? 카피아?

‘세 번째 삶을 살게 되더라도 또 나를 이용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공녀라고 검증을 해 주겠지. 난 당신이 방심하는 틈을 노릴 거야. 그래…. 할 수 있어.’

현 상황이 너무 끔찍해서 그런지,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생각만 자꾸 떠오른다.

그러나, 결국엔 내 힘으로 지금의 일을 타파해야만 하는 거잖아!

내가… 못 할 줄 알아?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어디 두고 봐라.

그날, 도트는 의연한 생각과는 달리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살려 주세요!”

불타는 카리스 자작가의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도트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곁에는 활활 타올라 숯검댕이가 된 가족들의 시신이 나뒹굴었고, 산 사람은 그녀 혼자뿐.

성녀의 군사들이 불타는 집을 에워싼 채로 수군대고 있었다.

“끝났으려나?”

“안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어, 그냥 놔둬.”

“불길이 너무 거세지면 누군가가 불을 끄러 올 느낌인데.”

“시오넬 영지는 그런 곳이 아니지.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 목구멍에 감자나 채워 넣으면 그만 아닌가? 다들 모르는 척할걸.”

“하하하. 그야 그렇군.”

“우린 제도권 근처에 사니 다행이군. 그런 끔찍한 주민들은 평생을 가도 안 겪을 거 아닌가.”

“하하하하!”

아니야! 아니야, 그만둬. 제발…. 날 살려 달란 말이야!

땀으로 흠뻑 젖은 도트는 눈을 번쩍 떴다.

몸은 악몽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천근만근.

“안 돼애….”

도트는 괴롭게 신음했다.

공녀가 되고 나서 좋은 날은 거의 누리지도 못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날, 황태자 실라스의 에스코트를 받았던 데뷔탕트도 두 명의 공녀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지.

‘아아, 이 지경이 된 내게 가장 큰 우군은 클라인 공작 부인이야. 하지만… 그녀도 진상을 알면 날 찢어 죽이려고 들 게 뻔해. 기사가 된 모리스는 또 어떻고? 전생에선 보잘것없이 망해 가던 이들이 다 달라진 지금이 너무 싫어!’

도트는 남은 방법이 하나뿐임을 알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간파한-어쩌면 과거의 기억마저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성녀의 입을 막고, 주신전 측에서 빼돌린 가족들의 행방을 알아내 ‘확실하게 처치하기.’

공작이 어디론가로 데려가게 한 루민트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게 함정이라고 해도 물러설 수 없어. 내가 살 길은 이것 하나야.’

길트론, 바른 일꾼 길드는 더는 믿을 수 없다.

암흑 길드로 가자!

내 목숨을 내걸고 큰 건을 성사하면 엄청난 이득을 준다고 조건을 걸어 보는 거야. 어차피 물러서기는 글렀잖아?

길트론은 암흑 길드의 졸개에 불과해, 난 상부와 직접 대화를 할 거라고.

도트는 빨개진 눈을 비비고, 공작 내외 모두가 저택을 비우는 날만을 노렸다. 그 와중에도 혹시 성녀가 제도로 복귀한다는 전언을 내걸까 봐 너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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