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또 한 명의 달라진 사람
페이를 위해 선대 마탑주 바로아로 새롭게 행세하려고 하니, 마법의 경지가 마음에 좀 걸렸다.
생긴 건 달라도 고위 마법사가 비슷한 시기에 둘이 나타나면 의심을 사기 쉽지 않나.
딱 그 일만 아니라면 홀트데인 앞이고 뭐고, 공간 이동으로 필요한 장소에 냉큼 가 버렸을 것이다.
‘제길, 귀찮군.’
페이와 둘만 있을 때는 전혀 안 들던 생각인데, 떠나기 전에 홀트데인이라는 애꿎은 놈을 보니 짜증이 팍 치솟았다.
한편, 그가 먼저 가 버리는 꼴을 본 홀트데인의 입은 귀에 걸렸다.
“페이!”
“아, 안녕하세요, 홀트데인.”
페이가 쓰는 물의 마법 중 큐어는 무려 7서클. 그 외에도 7서클의 마법을 다수 사용할 수 있게 된 그녀였다.
그리고 홀트데인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6서클.
마탑의 규율대로라면 그녀는 홀트데인에게 ‘오늘부터 내게 존대하십시오’라고 말해도 괜찮으나,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마탑에 와서 사귄 첫 사람이고 친구 아닌가. 앞으로도 홀트데인과 편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그깟 존댓말 받아 내기가 뭐 대수인가.
둘은 완벽하게 서로 다른 생각에 잠긴 상태였다.
밝게 웃는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흑요석 반지는 그전에도 봤던 물건!
그렇게 홀트데인의 덧없는 희망은 가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났다.
물론, 페이는 루키우스에게 사랑 고백을 받을 때 무지막지한 반지 선물을 받았다.
열두 달의 탄생석 반지와 기타 등등의 장신구, 그날 입었던 레몬색 드레스에 무수히 달린 비즈와 레이스만 떠올려도 다시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첫 반지만이 끼워졌다.
실피드와의 교감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루키우스의 마음을 더 느끼고 싶다. 그녀를 염려하고, 세심하게 살펴 준 사랑….
그의 시선이 방금 루키우스가 떠나간 길바닥 끝을 힐끔 훑었다.
“루키우스 형님은 뭐, 가셨나 봐?”
“아아… 네.”
그녀의 말꼬리가 묘하게 늘어지는 구간이 있다, 있어! 잠~깐 떠난 게 아니라 완전히 가 버린 거라면야 더 좋지!
홀트데인은 벙긋거리는 입을 숨기지도 못하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나하고…!”
“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홀트데인도 힘내요.”
“뭐?”
“나중에 봐요.”
늘 그렇듯이 자신을 향한 남의 연정에 둔한 페이는 냉큼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뒤에서 홀트데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도 못한 채로.
평소보다 적막하게 느껴지는 탑 내부.
축제 때 루키우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 잘만 다녔는데 왠지 어색하다. 그가 정말로 자리를 비웠음을 알아 버려서일까?
‘루키우스….’
헤어지고 고작 10분이나 흘렀나? 그리워할 겨를도 없는 잠깐인데 또 그를 떠올리다니.
나, 정말 가족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구나. 기사 리온 님의 정체를 알고 훌쩍거렸던 어린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픽 웃고는 새삼 공간 이동의 비밀을 지켜 준 그들에게 감사했다.
제도는 사소한 이야기라도 떠들면 화젯거리가 되기 쉽지. 이건 말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사로잡힐 만한 소재라 입이 근질거렸을 텐데 참아 줬잖아?
바로아와 루키우스를 같은 시대에 살아 있는 이로 두게 하려면.
선대 마탑주의 급부상 후에, 루키우스의 실력이 자극을 받아 올라갔다는 식으로 가는 편이 더 낫다. 이게 그와 페이가 내린 결론이었다.
페이가 루키우스와 잠깐 헤어지게 된 그날.
황궁의 접견실에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황태자가 보좌관과 함께 들어오자, 모인 귀족들은 차례로 경의를 표하며 눈치를 보았다.
어제 귀족원 소집령이 떨어졌고, 영문을 모르고 집결한 그들은 폭탄과도 같은 시오넬 영지의 조사 보고서를 읽고는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워낙 엄청난 내용이라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도 안 되는 상황.
그들은 드디어 오를레앙 공작가와 휘안테 후작가에 대한 처분이 내려지는 줄로만 알고 있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황태자가 과연 그 일에 관하여 언급할지 모두의 관심이 하나로 쏠렸다.
“지금 시오넬 영지의 영주인 스테파노 시오넬이 제도로 압송되어 오는 중이오. 영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그의 선언에 귀족들이 제각기 웅성거리려 하자 실라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시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묘지에 카리스 자작가의 대리로 묻힌 이들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수색은 계속될 거요. 또한! 이 일의 관련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으니 다들 명심하도록 하오.”
귀족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퀘이사 백작 쪽을 쳐다보았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시오넬 영지와 거리상으로 제일 가깝기에 일어난 일이라, 퀘이사 백작은 난감한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아는 바가 전혀 없소이다.”
실라스는 여전히 들고 있던 오른손의 손바닥을 잘 보이게 편 후 말을 이었다.
“카리스 자작가의 비극에 관해 자신이든, 남의 잘잘못이든 아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밝히시오. 어제 귀족원에 소집된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니, 작은 근거라도 후에 생각이 난다면 꼭 고하기 바라오. 만약… 알면서도 끝까지 침묵했다가 결탁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오.”
실라스는 교묘하게도, 그의 부하인 페이나 카셀을 비롯하여 클라인 공작가는 어제 소집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몇몇 가문이 소집령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상황을 보고 있던 남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전하. 어제 귀족원에서 저희에게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진범은 영주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맞소. 조사 중이니 나중에 가부가 다 가려질 거요. 그럼 이만 파하겠소.”
황태자는 접견실을 나섰고, 그가 복도로 나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실내가 몹시 소란해졌다.
서늘한 표정을 지은 그는 할 일이 또 있기에 어딘가로 바삐 향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창문에, 빈틈없이 붙여진 스테인드글라스.
그중 두 번째는 칼과 갑옷을 착용한 채로 괴물을 격퇴하는 용맹한 기사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아칸 제국은 기사의 나라.
그리고 그 앞에서 기다리던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꿇으라.”
“옛.”
서슴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사내, 모리스 클라인을 내려다본 실라스가 칼을 뽑아 그의 어깨에 댔다.
“모리스 클라인, 그간 그대의 성실한 언행에 감복한 자들이 많다. 충분히 발전했다고, 서임을 최초로 추천한 자는 황실 기사단 근위대장 해밀턴 경이다.”
“…부끄럽습니다.”
마구간 행도 불사하며 단련에 힘쓴 모리스는, 그전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편하디편한 공작저를 뛰쳐나온 이후 방탕하게 산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되었고.
귀족 남자가 기사가 되는 길은 당연하지 않다는 그 이치를 몸으로 터득한 것만으로도, 모리스는 이전과는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
“그대는 오늘부터 기사다. 크로우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기사단의 고귀한 문양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대가 속한 가문과 제국의 권위를 이고 평생을 임하라.”
“옛!”
황태자가 직접 와서 서임해 주는 건, 엄청난 영광.
모리스는 지급받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블루 로즈 기사단 쪽으로 가다가 반갑지 않은 이를 마주쳤다.
“오! 축하하오. 과연 그대는 인재야.”
“…라파엘 경.”
모리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라파엘이 그를 대놓고 놀린 적은 없고, 뭣보다 그의 소식을 형을 통해 가족들에게 알려 준 눈치라서 고맙긴 하지.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이상하게 라파엘이란 존재는 썩 내키지 않았다. 핏줄은 핏줄이라고 카셀과 이런 점에서는 똑같았다.
모리스가 그렇게 느끼든 말든, 라파엘은 금빛 태양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호감이 일지는 않는다.
“이젠 동료가 되었군. 형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중인가? 무척 좋아하실 텐데 나도 같이….”
“죄송하나 혼자 가 보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독대한 적이 없어서 제가 받을 질책도 있으니 저만 가서 다 감당해야 합니다.”
“난 뒤로 물러서 있으면 괜찮지 않겠나?”
“안 괜찮습니다.”
“쳇.”
라파엘은 대놓고 투덜댔으나, 모리스는 가벼운 목례만 건네고 카셀의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블루 로즈 기사단 본진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놓고 상대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그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따가운 시선.
모리스의 목 뒤편이 절로 뻣뻣해졌다.
‘큭.’
이겨 내야 한다. 황태자 전하께 친히 서임을 받은 기사로서 이만한 눈길도 받아 내지 못하면 자격이 없지.
그렇게 꿋꿋이 걸음을 옮긴 모리스는 드디어 카셀을 마주 보게 되었다.
태산처럼 큰 형은 기사가 된 그를 보고도 놀란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다고 한들, 모리스는 전처럼 서운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어린애 시절과는 멀어졌다.
존경스럽다. 자신이 겪은 시련은 형에 비교하면 십분의 일도 되지 않겠지, 그래서 더욱.
“…모리스.”
“오랜만입니다. 오늘부로 크로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
잘했다느니, 고생했다느니 하는 수더분한 인사치레는 없어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안다. 기사니까.
카셀은 동생을 보며 씩 웃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리스는 그간의 고생이 말끔히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조만간 저택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경의를 표하고 나가려는 모리스의 등을 보자, 카셀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잠깐.”
“예?”
“너는 잘못한 일이 없다. 저택에 돌아간 후에 어머니께서 또 질책하더라도 당당하게 굴어라. 누가 뭐래도 너는 클라인 공작가의 차남이고 내 동생이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다.”
카셀은, 어쩌면 그의 여동생이 영원토록 공작저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티아나가 자기 자리를 되찾고 말고는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공녀로 밝혀지고 나면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께선 충격으로 크게 앓아누우실지도 모르지. 그럴 때 늠름해진 모리스가 곁에 있어 준다면 큰 힘이 될 거다.’
모리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또 보지.”
그날 저녁, 모리스가 클라인 공작과 함께 귀가하자 클라인 공작저는 기쁨에 휩싸였다.
카셀이 든든한 대공자라고는 해도 모리스 역시 귀한 자식.
공작 부인은 몹시 기뻐하며 저녁 만찬을 호화롭게 차리게 했다.
“모리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모리스는 자신에게 언성을 높이고 나가라고 한 어머니께 억하심정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저, 한 명의 무덤덤하고 듬직한 기사로 성장해 돌아왔을 따름이었다.
그게 공작 부인에겐 한없는 자랑거리였다.
“오, 세상에. 맙소사! 이토록 멋지게 변한 사람이 내 아들이라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다. 이런 날이 오다니, 내가 건강하게 산 보답을 드디어 받는구나. 정말 잘했다.”
“흠흠.”
감격에 겨운 공작 부인과 좋아 죽으면서도 표현을 애써 감추는 공작,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거의 끌려 나와 있는 듯한 공녀.
모리스는 우두커니 의자에 앉은 자기 여동생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앞으로도 건강하셔야죠. 형님의 결혼식은 물론이고, 더 좋은 나날을 많이 누리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래. 그럼….”
클라인 공작 부인이 막 물색없이 ‘우리 티아나’에 관한 친목 도모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