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죄를 지은 자는 발을 뻗고 잘 수 없다 (85/148)

85화 죄를 지은 자는 발을 뻗고 잘 수 없다

부스럭대는 종이봉투에는 조그마한 분홍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단내를 맡았는지 사내의 눈알이 회까닥 돌아오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거칠어진 손가락은 리본을 계속 매만졌다.

“흐어으어….”

“…페이 양, 이쪽으로. 그자와 너무 붙어 있지 마십시오.”

카셀은 이 부랑자가 안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페이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계속 걱정했다.

막 그녀가 카셀의 곁으로 오려고 할 때쯤, 사내가 울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흐… 흐흑… 우으으… 이거스을… 우리 도트리샤에게 줄 수 있다므언… 그 애도 좋을 텐데…. 흐어엉….”

“큭…!”

‘세상에!’

카셀이 신음을 흘리고, 페이가 속으로 경악하게 만드는 그 이름.

타오르는 적안과 당황으로 물든 연둣빛 눈동자가 한데 얽혔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란 말인가, 이자가?

남매는 섣부른 추측으로 아픈 환자를 추궁하는 대신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결국, 그 ‘신원 불상자’ 사내는 치료소가 아닌 근린 요양시설로 다시금 옮겨졌다. 여기는 카셀이 잘 아는 곳이라 타인이 함부로 이자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이 벌써 꽤 흘러, 마탑이든 황궁이든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데 둘 다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가는데도.

그들은 요양시설 뒤편의 나무 사이를 거닐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풋풋한, 새 나뭇잎 향을 맡으니 그나마 좀 나아지는 느낌.

꾸우욱.

카셀이 힘 있게 쥐는 주먹을 본 페이가 위로했다.

“그러지 마세요. 손 펴요, 네? 손톱이 손바닥 안에 박히면 아파요.”

그녀의 작은 손이 사내의 큼지막한 주먹으로 뻗어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당신은 왜 이런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않는 겁니까?”

“저는 견딜 수 있어요. 그러니 저 대신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페이는 그의 강인한 손등을 토닥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봄의 따스한 하늘이, 어느새 푸른빛을 머금으며 저녁으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또 끔찍한 일이 일어나든 시간은 흘러만 간다.

루키우스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했지.

“짐작이 가요. 다른 가족들도 인질로 붙들고 있으니, 보호하기 가장 까다로운 사람을 본보기로 공작저 앞에 내버렸구나 싶네요.”

성녀를 지극히 두려워하며 벌벌 떨던 사내.

맛있고, 귀여운 것들을 보며 여동생을 떠올리고 울음을 터트린 가엾은 사내.

그렇다면 당신이… 기록으로만 봤던 카리스 자작가의 둘째 루민트일까?

카셀은 담담한 그녀와는 달리 퍽 속상한 눈치였다.

“차라리 그냥 우십시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면서, 다 싫고 꼴도 보기 싫으니 치워버리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십시오. 이 끔찍한 상황을 그만 보고 싶다는 게 당신의 소원이라면…!”

“전 착한 아이가 아니에요.”

페이는 꽤 단호하게 말했다.

착한 아이, 그런 시시하고 슬픈 역할은 진작 그만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훌쩍거리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돌려주지 않는 얌전하고 순한 모르가나는 없지.

그녀는 조용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 왔다.

도트를 곤란한 지경에 내몰기도 하고, 드라칸과 합작해 성녀를 골탕 먹이기도 했지.

그러한 계략을 꾸민 자신이 타락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의 악행을 복수로써 돌려준 것뿐이니까.

“페이….”

“무작정 참고 있지 않아요. 그냥…. 저 사람, 정체는 함구하고 우선 쉬게 해 주세요. 저는 아픈 사람을 이용해서 도트를 몰아세우고 싶지도 않아요. 마지막 양심이라든지, 떠보기를 할 시간도 진작 지났고요.”

카셀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고, 드디어 마탑으로 그녀를 배웅하러 떠났다. 짐마차는 이미 공작저로 되돌려 보낸 후였다.

페이는 그의 등에 매달려 말을 타고 가는 내내 밤의 봄 풍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낮에 그토록 아름답던 꽃잎과 나뭇잎들은 밤이라 그런지 낮과는 달리 어둑어둑했다. 습한 기운 때문인지, 축축하게 젖은 풀잎들은 을씨년스럽게 보이기까지 하지.

고작 비추는 빛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암울하게 바뀌다니.

“…….”

“고생하셨어요. 늘… 고마워요.”

“페이 양.”

오로지 미쥬앙 호텔 최상층, 그곳에서만 서로를 끈끈한 남매로 대하는 둘.

카셀은 이 무겁고 견고한 족쇄를 언제쯤 끊을 수 있을지 조금 지겨워졌다. 아까 요양시설에서 내뱉은 말은 실은 그의 속내기도 했다.

다 터트리고 싶다. 변방에서 오래도록 구르며 진정한 기사가 된 그가, 여동생의 부당한 일만 못 참고 있었다.

가짜 공녀도 사악한 성녀도, 제국의 끝까지, 아니 대륙을 넘어 깊고 깊은 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켜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이 깊은 원한과 복수심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될까?

‘나는….’

“카셀 경은, 블루 로즈 기사단의 단장님은요. 제가 아는 기사들 중엔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기사님이에요. 이 말, 전에 했었죠?”

“아….”

그의 입술에서 탄식이 흩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 앞에서 ‘내가 클라인 공작가의 대공자요’라고 정체를 털어놨던 멍청한 날.

왜 그녀가 그토록 충격받은 눈을 했는지 나중에야 알았지. 정말로… 나중에야.

“카셀 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잘하고 있어요. 부디 용기와 자비로운 마음을 잃지 말아 주세요, 네?”

카셀은 여동생에 한정된 팔불출답게, 불쑥 다른 의문이 들었다.

페이의 눈에 그가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기사라면, 이성적으로 최고의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설마… 그 건방진 은발 마법사는 아니겠지. 아무리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만큼 실력이 월등하다고 해도 성격이 모난 남자는 안 된다.

우리 페이가 마음고생을 할 테니까!

그는 우회적으로 다른 용건을 꺼냈다.

“기사에겐 함부로 반하면 안 됩니다, 페이 양.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사생활은 엉망진창인 자들이 좀 있습니다.”

“우후후, 그래요?”

“마탑의 마법사 중에도 페이 양에게 구애하는 이들이 나올지 모르나 반드시 유의하십시오.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냥 한번 사귀어 볼까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앗.’

기사를 경계하라는 충고는 웃으면서 받아들였던 페이의 입가가 어색하게 굳었다.

그… 말한 적 없지, 응. 루키우스를 좋아하는 내 마음. 오라버니께도 전한 적이 없어. 난 좀 더, 어쩌면 많이 기다려도 괜찮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왠지 화를 내실 느낌인데?

엉겁결에 오라버니의 마음을 정확히 맞춘 페이는 얼른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은 금이다!

카셀은 차근차근, 고금의 일을 통틀어 못된 늑대(?)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해서, 큰일이 났던 겁니다. 페이 양? 듣고 있습니까?”

“네? 네… 네.”

어느새 마탑이 가까워졌다.

페이는 혼자 폴짝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먼저 내린 카셀이 내민 손길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보인다. 마탑의 문 앞에서,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팔짱을 끼고 있는 루키우스의 모습이.

카셀은 그를 흘깃거렸다가 일부러 페이의 모습을 자기 몸으로 가리면서 마지막 충고를 건넸다.

“자기 여자보다 마법이 더 중요하다는 마법사는 무조건 안 됩니다.”

“…누가 되었든 허락받고 만날게요.”

‘오라버니의’라는 수식어가 빠지긴 했으나, 카셀이 그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미소를 띠며 캐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뭐, 허락이야 해 주겠지. 루키우스와 나라는 존재 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다 말해 버릴 수는 없지만….

페이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살짝 바꿔서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유니콘 이야기만 해 줘도 카셀은 반 이상은 마음을 돌려 허락해 줄 거다. 루키우스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겐 헌신하니까.

“알겠습니다.”

남자에 대한 경고를 마친 카셀은 무척 뿌듯한 표정이었다.

“잘 다녀왔어…?”

남매 둘이서 작별 인사가 너무 길다고 생각한 루키우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쭈뼛쭈뼛도 아니고 자신 있게 다가오는 걸음걸이를 본 카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놈은 페이가 저에게 당연히 돌아가는 줄로만 아는데, 응, 그거 아니다.

언젠가 성녀와 가짜 공녀 둘 다 처단하는 날이 오면 새 저택을 하나 지어서라도 페이를 거기에 고이 모셔 둬야지.

우리 페이의 얼굴을 보는 일이 쉽다고 생각하나? 건방진 놈. 면회 한번 하려면 서류 접수에 면접으로 예의범절 여부까지 파악하고도 열흘 이상을 기다리게 해 주마.

그의 한참 늦은 판단과는 달리 페이는 해맑기만 했다.

“네! 루키우스도 잘 있었어요?”

쪼르르.

자신을 가린 오라버니의 몸을 돌아서 루키우스에게 가 버리는 페이의 모습.

순식간에 허망해진 카셀은, 일부러 큰 목소리로 작별의 말을 건넸다.

“페이 양, 이만 가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고 마법 연구도 쉬엄쉬엄하십시오.”

“그럴게요!”

“…….”

마탑 안으로 앞서 들어가는 페이의 뒤를 따르던 루키우스가, 목도 아닌 눈꺼풀만 까딱 내리깔며 인사를 건넸다.

‘건방짐을 사람으로 빚으면 저놈인가?’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세상 누가 되었든 그의 소중한 페이를 두고 쉽게 여긴다면 목을 날려 버릴 심산이었다.

카셀은 진지하게 마법사와의 결투법이 적힌 책을 뒤져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루민트를 클라인 공작저에 보낸 후, 카피아는 단체로 근신 중이라는 오를레앙 공작저를 조용히 방문했다.

클라인 공작저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영이 아닌 격렬한 분노가 성녀를 향해 몰아쳤다.

“어디 할 말이 있거든 해 보시지요!”

“…공작 부인.”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어찌나 몸을 떠는지,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한 핀까지 함께 파르르 떨고 있었다.

카피아는 그 모습이 화를 많이 내서 잘 죽는 카나리아 같다고 생각했다.

남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은 역시 싫다.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우리 가문은 당신의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오랜 세월을요! 그런데 남은 게 뭐죠? 주신의 은총이 오기는 한 거냐고요!”

“진정하십시오.”

“진정? 지난번에 당신이 그랬죠. 곧 제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래서 얻은 게 뭐죠? 당신이 드라칸을 타고 놀면서 찾은 치부 때문에 다 망했다고요!”

‘역시…!’

예상대로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그 일을 물고 늘어졌다.

동서남북 중 날아가는 방향을 지정한 사람은 카피아, 그녀 자신이라 음해라고 떠넘길 여지도 없고. 그때 내가 정말 왜 그랬을까?

카피아는 자신이 만든 오점이 치욕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부들부들 떨다가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가문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국의 오른편 심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해요. 그런데 지금의 처지가 어떤 줄 알고나 있나요? 중징계는 물론, 드리아나 산맥을 기점으로 한 근처의 영지가 통째로 황실에 귀속되고 말았다고요. 이게 끝도 아니고 제도의 징계는 따로 받을 거라는데!”

“네?”

공작 부인의 진노한 눈빛이 성녀를 향해 쏘아 왔다.

“이제 지방 영지에서 제도로 오려면 통행증을 일일이 발급받든가, 다른 영지에 사정해서 길을 빌려야 한다고요!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주신전에 틀어박혀 노닥거리는 당신이 아나요?! 우리 가문은 앞으로 황실에 굽신거릴 수밖에 없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