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상냥함을 잃지 않으면
공작이 금화 몇 닢을 내밀자, 하인들은 할 수 없이 부랑자를 공작저 안으로 들이게 되었다.
“끄으으으….”
“…보아하니 자기 이름도 모르겠군. 쯧쯧, 같이 있는 동안 알게 된 사항이 있으면 치료소 직원에게도 알려 주어라. 어떻게든 자기 가족은 찾아야 할 거 아니냐.”
“예.”
공작저 안에 부랑자 한 명이 들어왔다는 소문은 반나절도 안 되어 금세 퍼졌다. 두려움에 떨며 웅크리던 도트의 귀에도.
‘서… 설마?’
어젯밤 성녀가 독살스럽게 말했던 협박.
도트는 벌벌 떨면서도 그 ‘새로운 부랑자’를 관찰하기 위해 본채를 나섰다.
태양이 높다랗게 떠오른 시각이라 그런지, 봄의 계절은 꽃과 푸르름을 새벽보다 더 찬란하게 뽐내고 있었다.
페이의 눈동자를 닮은 연둣빛을 잔뜩 머금다 못해 황금빛으로 물든 나뭇잎도, 벌써 열매를 맺게 하려고 작은 꽃잎을 오므린 식물의 신비함도, 정원사가 뿌린 물방울이 고여 만든 작은 웅덩이도 도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도트리샤 카리스에게 있어 작은 즐거움이란 오로지 재물과 ‘누군가가 만든’ 화려함에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짜 공녀는 타박타박 걸어 리그렛 하우스 주변에 도달했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루…민트, 루민트잖아. 아악! 루민트! 카피아…. 으윽, 진짜 나하고 무슨 원수가 져서 이러는 거야!’
어제 보았던 그 참상은 꿈이 아니었다. 두 눈으로 확인했던 끔찍한 일들이 모조리 사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도트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날 오후.
카셀은 여느 때처럼 전갈 없이 공작저에 잠깐 들렀다. 그가 직접 확인하고 가져갈 물건이 하나 있어서였다.
그건 페이에게 줄, 도수가 굉장히 약한 와인이었다.
‘사실상 술이라고 부르기도 곤란한 수준이지만 우리 티아나가 처음으로 마시기엔 최적이야.’
그는 말에서 내리기 전 씨익 웃었다.
귀엽고 씩씩한 여동생에게 해 주고픈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주도를 알 리가 없으니 조금씩 가르칠 요량으로 찾는지라, 여기에 와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어어어!”
“무슨 소리지?”
그가 막 타고 온 말을 맡기려 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송구합니다. 그게….”
마구간지기에게 사정을 들은 카셀은 와인 챙기기도 잠시 미루고는 리그렛 하우스로 향했다.
새벽녘에 발견되었다는 걸인은 머리를 다쳤는지, 눈앞에서 사람이 오가든 말든 그르륵대는 소리를 목에서 끓기 바빴다.
‘안됐군.’
다른 부위도 아니고 하필 머리를 다쳤다니.
부랑자는 새벽과는 달리 옷도 갈아입고, 배도 채웠고 몸을 씻어 깨끗해졌다. 그런다고 할지라도 카셀의 입장으로선 페이가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우리 티아나도 머리를 다쳐 기억을 한동안 잃었기에 오래도록 가족을 못 찾고 헤맸지. 저자도….
말도 못 하나 생각까지 앗아 갈 순 없으니, 외롭겠군.
“치료소로 데려간다고 하였나?”
“예.”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치료소가 문을 닫을 시간은 한참 남았기에, 황궁으로 돌아갈 때 같이 데려가면 되지 싶었다. 여기서 눈칫밥을 먹느니 빨리 데려가 무슨 치료라도 받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리그렛 하우스를 일별한 카셀은 찾던 와인 두 병을 단단히 포장하고, 짐마차까지 하나 준비케 했다.
사특한 가짜 공녀나, 그런 이에게 단단히 홀려 있는 어머니와는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난 훌륭한 귀족은 못 되는군. 평생의 숙적을 눈앞에 두고도 미소를 지을 줄 알아야 하는데 불편하다고 피하다니.’
어제, 도트리샤가 무단으로 에솔트 백작의 다과회에 왔다가 나를 보고 당황하여 그냥 돌아갔다고 했었지.
카셀은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종자는 아니나, 그 일은 솔직히 통쾌했다.
사람 눈치만 이리저리 보면서 자기 이득만 챙기려 한 결과가 지금의 가짜 공녀인 것이다.
대공자가 저택에 온 줄도 모르는 시각, 도트는 이를 갈면서 거의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손톱으로 커튼이라도 모조리 잡아 뜯고 싶었다. 그 모든 패악질을 단 하나도 할 수 없는 공녀란 신분이 지금은 저주스러웠다.
“가짜 공녀야.”
“크으으…!”
카피아가 조롱하던 말투만 떠올려도 돌아가실 지경이다. 그런데, 루민트가 와 있어. 루민트가…. 혹시 그 망할 놈이, 내 옛 이름을 지껄이기라도 하면 어떡해!
‘루민트부터 죽이라고 의뢰를 다른 곳에 넣어야 하나? 아니야…. 아니야, 그 교활한 성녀가 루민트만 살려 뒀을 리가 없어. 나머지 그들도 어딘가에 감춰 두고 저자를 첫 미끼로 던진 거라면 어떡해?’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른 일꾼 길드를 지금부터 믿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다시 가서 따져봐야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성녀의 끄나풀이 남아 있으면 긁어 부스럼이지.
도트의 바짝 마른 입술이 시트 안에서 위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들이 더 화근이지. 모르가나는 자기가 공녀란 사실을 지금도 모르지만…. 그들이 날 두고 내가 도트리샤 카리스라고 주장하면 모든 게 끝나. 끝이 나 버린다고…!”
짜악.
도트는 두 손을 들어 뺨을 가볍게 쳤다. 힘들고 어려워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여기서 다 잃을 수는 없어!
* * *
부랑자를 짐마차에 싣고 치료소까지 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의 속도와 맞추느라 카셀은 오랜만에 말을 천천히 달렸고, 그 바람에 시가지도 구경하게 되었다.
“봄이로군….”
무뚝뚝한 그의 입술에서도 감탄의 말이 흘렀다.
정말 아름답다. 겨울의 나뭇가지에서 움터 제각기 자라난 나뭇잎들과 흐드러지도록 피어난 하얀 꽃잎들.
봄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 놓고, 카셀은 엉뚱한 생각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저것들, 다 합쳐 봤자 우리 티아나만 못하군. 우리 티아나가 풍성한 머리카락을 마음껏 나풀거리며 들판에서 뛰면 꽃잎들이 자괴감을 느끼고 다 떨어져 버리겠지? 당연한 일이다.
여동생을 향한 그의 팔불출은 검술 실력 못지않게 하늘을 뚫을 지경이었다.
흐뭇하게 웃던 그의 적안이, 반대편에서 오던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오…! 카셀 대공자님?”
이런 장소에서 마주할 줄이야!
어제 황태자의 에솔트 백작가 방문은, 아무래도 황궁 바깥으로 나오는 길이라 도착 전까지는 비밀이었다. 심지어 선대 백작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페이와는 거기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었지. 그는 그날이 오기만을 며칠씩 기다리느라 퍽 즐거웠다.
대외적으로 그들은 너무 붙어 다니면 곤란한 사이라, 미쥬앙 호텔이나 남들을 앞세우는 일정이 아니고선, 이렇게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페이도 생각지 못한 만남이라 그런지 반가움에 그를 무심코 ‘오라버니’라고 부르려다 정정해 버렸고.
그는 역시 대뜸 말에서 내렸다.
와인이고 부랑자고 잠시 다 밀쳐 둔 채였다.
“페이 양, 어딜 가는 길입니까?”
“아…. 네. 그냥 뭐, 쇼핑 좀 하고 슬슬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자와 같이 온 길은 아닌가?
카셀은 자동으로 건방진 마법사, 루키우스를 떠올렸으나 곧 훌훌 털어 버렸다. 그자가 곁에 없는 편이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 좋겠지.
그의 적안이 순식간에 다정한 빛을 띠었다.
“더 살 건 없고요?”
지금보다 빠르게 마주쳤으면 좋았을걸.
티아나…. 네가 원하는 물건이 맛있는 과자든, 드레스든, 마법봉이든 다 사 줄 수 있는데. 부티크 직원이 네 머리카락을 땋아 화려한 리본을 매 주는 광경을 보면 좋겠구나.
페이는 웃으며 대꾸했다.
“다 샀어요! 대공자님이야말로, 어디 가시는 길이신가요? 짐마차까지 대동한 걸 보니, 제가 공연히 길을 막아 세운 게 아닌지 걱정되네요.”
그는 그제야 짐마차 안에서 신음하는 부랑자를 떠올렸다.
“치료소로 데려다줄 이가 있어서 가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공작저 대문 앞에서 발견했다는데, 괜찮다면 동행하시죠? 일이 끝난 후 마탑까지 배웅하겠습니다.”
클라인 공작저 앞에 다친 사람이 있었다고?
성녀가 제도로 온 후, 페이는 클라인 공작저에 있던 파인 에코를 잠시 돌아오게 했다.
우선 물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북돋게 한 다음에 수도원으로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도트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힘을 하나로 모으려는 처사였다.
그 결정엔 후회하지 않는데, 이럴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물어보니 불편하네.
“어… 음, 좋아요.”
페이는 배웅을 받기가 미안해서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의 오라버니 카셀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사람.
남들 눈이 있기에 그걸 늘 억누르고 참는 줄 뻔히 안다. 그런데도 겸양을 떠느라 에스코트를 거절하면 서운하겠지.
카셀은 자기 말 등에 페이를 태우고 싶어 했으나, 그녀는 사양하고 짐마차에 올랐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귀에 대고 이런 말을 재빨리 속삭였다.
“마차 끝에 앉고, 만약 저 걸인이 말없이 다가온다든지 하면 소리를 지르십시오. 머리를 다쳐 제정신이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카셀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짐마차 안에서도 햇빛이 전혀 안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웅크리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으음, 정말 아픈 사람인가 보네.’
모르는 사람이 떡하니 올라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이다.
페이는 이 남자의 사연을 잘은 모르나, 치료소에서 부디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했다.
“으흐으으!”
짐마차 안에서 내내 얌전하던 그는 치료사들이 팔을 조심스레 붙들고 내리려고 하자, 놀랐는지 소리를 질렀다.
안타깝지만 적응해야겠지. 페이의 연둣빛 눈동자가 막 그에게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사내가 흐느끼듯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주시…께 용서를 비러, 으허어…. 그래야, 흐으으…. 성녀니미이….”
‘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페이의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곁에 있던 카셀 역시 낮은 탄식을 흘리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주시했다.
“괜찮을까요?”
사내를 붙들려던 치료사 한 명이 대답했다.
“신의 가호를 찾는 자라면 오히려 안정시키기 쉬울 겁니다.”
“괜찮다면, 이분이 머무를 병실까지 함께 가고 싶어요. 우는 것 같은데 어떻게 위로라도 해 드리고 싶네요.”
카셀은 반대하지 않았다.
치료사들을 따라가는 동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페이는 그 함축적인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머리를 다쳤다고 하니 남 일 같지 않네요.”
남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성녀’라는 단어는 못 들은 척 일관하고 있었다.
치료소의 병실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뭣보다 1인실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잘 베푸는 공작이 맡긴 금화의 힘이었다.
그래서 페이는 깨끗한 침대 위에 냉큼 올라가 웅크린 사내에게 눈치 보지 않고 쉬이 말을 붙일 수 있었다.
“저희, 이제 가요.”
“…….”
사내는 아까 부정확해도 말을 했다는 사실이 꿈으로 느껴질 만큼,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음…. 어이, 월터. 잠깐 서류 가져와 봐. 쓸 게 있어.”
“예.”
사내를 맡은 담당 치료사는 사내의 이름에 ‘신원 불상자’라고 적기 위해 병실을 잠깐 나섰다. 페이는 그 틈에 오늘 산 간식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설탕 과자하고 비스킷인데, 식사를 마치고 혹시 배고프면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