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도망친 대가
“그게…. 으흠, 클라인 공녀께선 대공자와 사이가 썩 원만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데서나 떠들기는 뭐한 말이니 저는 이만.”
“어머, 자세히 말해 봐요. 바니트 경! 가지 말고 말 좀 해요. 네?”
선대 백작을 위해 박수를 치면서도, 공녀의 얼굴이 일그러져 가고 있음을 본 이들이 적잖았다.
공녀는 자기 오라버니와 인사도 하지 않고 기어코 달아났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채나 불투명한 와인 잔 따위로 입을 가리고 아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 할 것 없이 은밀하게 소곤댔다.
얼마 후면 그 루머 중 몇 가지가 추려져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의 평판을 이룰 것이다.
한편 허겁지겁 도망친 도트는 갈 곳을 즉시 지정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녀는 마차 안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분해. 억울해. 미쳐 버리겠어, 누구든지 내 손에 걸리는 즉시 다 죽여 버리고 싶어!!
꼭꼭 숨겨 뒀던 공격성이 한꺼번에 되살아난 도트는 바른 일꾼 길드에 들렀다. 더는 참을 수가 없기에, 상황을 봐 가면서 하려던 마지막 작업을 저지를 작정이었다.
그레이스 수도원을 불태우고,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멍청이 모르가나를 살해해 달라고.
앞의 의뢰는 돈만 주면 받아들여 줄 터이나 뒤의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지. 어려워도 난 꼭 해낼 거야, 나한테는 행운이 잇달아 떨어졌잖아?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는 사람, 그게 나 티아나 마리에타…!
“어서 오렴.”
“아아악!”
길드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조용한 의뢰실 안으로 들여보내진 도트는 비명을 질렀다.
이곳에서 절대 들려선 안 될 목소리!
도트의 천장을 뚫을 듯한 새된 고함에도 놀라지 않은, 흑색 후드를 젖힌 여성이 픽 웃었다.
성녀 카피아였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데 왜?!
“다… 다… 당신!”
철컥.
도트를 들여보낸 문이 뒤에서 닫히자, 그녀는 기절할 듯이 놀라 문으로 다가갔다.
갇혔어!
“열어, 열라고! 당장 열지 못해? 너희들, 내가 누군지…!”
문을 두들기며 비명을 질러도 답은 없었다.
다 한통속이야? 이것들, 나한테 감히 이럴 수가 있어? 길트론! 당신, 알고 있지? 내가 왔다는 걸? 어서 문을 열란 말이야. 나를…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
남은 건 정면 돌파뿐인가?
도트의 붉어진 눈이 화병이며 책 한 권 없이 말끔한 책상 너머의 적을 노려보았다.
성녀는 여유롭게 그 눈빛을 마주했다. 카피아의 눈에 이 아이는 독니도 덜 자란 새끼 뱀에 불과한데 왜 두려워하랴?
“뭐죠, 당신?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성녀를 보고 예의를 갖추지도 않는구나, 쯧쯧. 궁지에 몰렸다고 밑바닥을 보이다니.”
“내 말에 대답이나 해요!”
“목소리 낮추는 편이 좋을 거다, 가짜 공녀야. 우리의 대화를 문 너머의 누군가가 들으면 곤란해지는 사람은 너 하나 아닐까?”
“뭐, 뭐라고…!”
이 와중에도 활로를 모색하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였다.
‘가…짜? 내가…? 역시… 알고 있었어, 이 여잔 다 알면서 나를 일부러 공녀로 만들어서 보낸 거였어!’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 도트가 멍하니 있자, 드디어 우세를 점한 카피아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버릇없고 건방진 네게 건넬 훈계는 많으나, 우선 보여 줄 게 있단다. 왜, 우시장에서도 소를 먼저 보여 주고 가격을 매기잖니? 우수한 종자인지, 병이 들었는지, 잡종인지 말이다. 네 위치가 뭔지 통렬하게 깨닫도록 하렴.”
도트의 말본새도 문제였으나, 제국의 공녀–물론 가짜라지만-를 향한 말로는 참으로 무엄한 언행.
서로를 꼭 닮은 그들의 싸움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열어라.”
카피아가 위엄 있게 명령했다.
이 방에, 누군가가 또 있었나?
촤아악!
세찬 소리와 함께 열어젖힌 커튼 너머로 보이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흐리멍덩해진 두 눈으로 그의 정체를 파악한 도트는 또다시 경악했다.
그들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유리막 너머에서 두 눈을 흐릿하게 뜬 채 축 늘어진 남자.
“저건… 저건…!”
루민트!
그녀가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트린 둘째 오라비! 안 죽고 살아 있었어?
질겁하는 가짜 공녀를 보며 카피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후후후…. 이제야 알겠니, 가짜 공녀? 아니… 도트리샤 카리스라고 불러야 하나. 제법 머리를 굴려서 공작저로 갈 적엔 도로테아로 이름을 바꿨다만, 너무 안일했구나.”
“으….”
“차라리 시오넬 영지 전체를 불태우지 그랬니. 제국 내에 도트리샤란 이름을 가진 이가 너 말고 몇 명이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말해 보렴?”
도트의 두 손이 무릎 위의 허벅지로 툭툭 떨어졌다.
나… 내가 당하다니….
카피아는 반박할 기력조차 잃은 가짜 공녀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넌 그냥 태생부터 잘못된 거란다. 알겠니?”
“…….”
너무 몰아세웠나? 벌써 대답도 막히다니.
카피아는 오래 고생한 만큼, 이 요물과도 같은 소녀를 이용해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갈취할 작정이었다.
그 뒤에, 눈동자에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나락으로 떨어트리기로 마음먹었다.
고상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도트의 귓전을 끔찍하게 때려 왔다.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단다. 네가 지금까지 부당하게 누려 온 모든 영예와 칭호, 돈은 물론…. 네 가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보낸 의뢰까지 다 너의 목을 조르고도 남는 처사지.”
넌 영원히 가짜니까.
또다시 짚어 일러 주지 않아도, 도트의 눈은 거의 사경을 헤매는 수준으로 어지러워져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도트는 입술을 깨물지도 못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깐. 성녀는 내가 가짜임을 확신하고 있어. 그렇다면… 모르가나를, 모르가나가 진짜 공녀라는 사실은 알고 이러는 건가?’
그녀는 혀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케케묵은 숙원을 털어놓았다.
“죽여요.”
“뭐? 후후…. 진심이니? 이대로 포기하겠다고? 생각보다 대가 약하구나.”
도트의 얼굴에 돋은 솜털이 일제히 솟아났다. 지금 도트는 일생 최대의 승부수를 거는 중이었다.
“그 뜻이 아닌 거 알잖아요. 당신… 진짜 공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죠?”
“이 와중에도 나를 떠보려는 거냐?”
백작가에 도달하기 전만 해도 푸르렀던 눈망울에는 어느새 독기가 가득했다.
“모르가나를… 마탑의 마법사 페이를 죽여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당신이 뭘 원하든지 최대한 협조하죠.”
“하!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눈치구나, 어리석은 아이야. 훔친 지위를 가지고 협상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거니?”
도트는 음성을 낮췄다.
“잘 생각해요. 모르가나는 자기가 공녀인 줄 모르는 바보 천치지만, 마탑의 마법사이고 또 황태자 전하의 수족이기도 해요. 만약 자기가 공녀란 사실을 눈치채는 순간,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당신도 나도, 결국 무사하지 못할….”
타악.
먼지 한 톨 없는 책상에 두 손을 세차게 짚고 일어선 카피아.
성녀는 눈짓으로 커튼을 도로 닫게 한 후, 차갑게 말했다.
“너는 내 발밑에 엎드려 기어도 시원찮은데 이 지경이 와도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과연 뻣뻣하고 지독해.”
“현실을 보라는 이야기였어요.”
도트는 약간 답답해져 소리를 질렀다.
“네 현실이나 똑바로 보라지!”
“……!!”
카피아의 상체가 앞으로 확 기울어졌다.
주신전의 누군가에겐 그저 인자하게 보이는 나이다운 주름이, 도트의 눈에는 추악한 생각을 품고 오래도록 늙은 증거처럼 보였다.
마탑에 머무르는 그 어떤 마도사보다 더 사악한 눈빛.
씨근덕대는 더운 숨이 도트의 콧잔등 위로 후욱 뿜어졌다.
“좋다. 너, 네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똑똑히 알게 해 주마. 기대하거라, 가짜 공녀야. 내 성수를 맞고 병이 나았으니 마땅히 선물을 주어야지. 우리가 숙녀답게 대화할 기회는 이걸로 끝이고, 넌 내 앞에서 읍소하며 참회하게 될 거란다.”
성녀가 움직이자 같은 공간에 있던 수하들도 뒤를 따랐다.
이윽고 커튼 너머에서 루민트를 짐짝처럼 끌고 가는지 우… 우… 하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도트는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한 끔찍한 흐느낌에 두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워, 무서워, 다 싫어!
한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도트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자, 모든 상황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텅 빈 의뢰실, 온데간데없는 성녀와 루민트, 그리고… 나 혼자만 남았다.
‘기대해라’는 그 말을 잘못 들었고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공작저에서 나오지 말 걸 왜 심통을 부렸지?
도트는 속으로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으나, 끔찍한 현실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른 일꾼 길드에서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길트론을 찾아 오늘의 일을 따질 생각은 나지도 않았고, 더 떠올리기도 싫어 시녀장을 추궁하지도 않았다.
이튿날 새벽녘, 클라인 공작저 앞.
“…지 못해!”
“으으….”
“웬 소란이냐?”
클라인 공작은 아침잠이 적은 편이라 깨어 산책 중이었는데, 소음에 민감한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을 뒤따르던 기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됐네. 먼 거리도 아니 그냥 같이 가 보세.”
공작은 시끄러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연둣빛 나뭇잎들이 어느새 청록으로 물들고, 여린 나뭇가지도 단단해지는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작저 담벼락 근처에서 옥신각신하던 자들 중 하인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공작 각하. 웬 부랑자 한 명이 외벽에 기대어 있기에 내보내려 했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나가라고 해도 혼잣말을 웅얼거리기에, 수레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뭐라?”
공작은 하인들이 촘촘하게 둘러싼 걸인을 보았다.
낯선 이들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은 하인이 하고 있어도 실력 행사를 하기에 충분한 덩치의 사내들이 숱한데, 그자는 자기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입술은 허옇게 튼 게,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거의 없었다. 입은 옷도 남루함의 극치였고 땟국물이 흘러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쯧쯧.’
제도에 못사는 사람들이 살긴 하나, 그들이 클라인 공작저 근처를 침범하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공작저는 번화가와 조금 떨어진 구역에 있는 데다 근처엔 순찰을 도는 사병들도 있다.
그런 곳에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가 무슨 수로 여기까지 혼자 왔겠나, 병사들의 눈을 피해 가족들이 여기에 내다 버렸겠지.
‘지독하군. 형편이 어렵다고 자기 가족을 외면하고 버려?’
클라인 공작이 생각에 빠져 입을 다물자, 침입자를 서둘러 내쫓지 못한 하인들이 눈치를 보았다.
“서둘러 바깥으로 내보내겠으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아니다. 아침도 안 된 시각인데 빈민에게 못되게 굴어서야 되겠나?”
“예?”
공작은 주신교에 독실한 신자는 아니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식은 여전히 간직했다.
그가 없을 때 성녀가 왔었고, 아내가 불같이 화를 내서 내쫓았다지? 성수를 뿌려 둔 비석의 흔적까지 말끔하게 치워 버리고.
이런 상황에서 공연히 덕을 쌓을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본채와 먼 남자 사용인들 처소가 있지 않나? 리그렛 하우스 정도면 괜찮겠군. 거기에 들여서 죽부터 끓여서 먹이고, 옷도 갈아입히고 안정을 되찾으면 목욕도 시켜라. 상태가 좀 괜찮아지면 치료소로 보내고 이 돈도 함께 맡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