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즐거운 한때 (81/148)

81화 즐거운 한때

샤르프 제국 말기로 치달으며, 드래곤 숭배 사상은 가면 갈수록 역풍을 맞았다. 어렴풋이 끝을 예감한 루키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사제들의 기억을 지우고 안전한 빈 땅으로 보냈다.

인간들의 섬김을 구태여 받고자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마음을 의탁할 자리가 필요했던 자들이 고룡 루키우스의 이름 아래에서 쉬고 싶어 했을 뿐.

일방적인 숭배를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았으나 그는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그들을 구했다.

자신의 봉인은 못 막은 대신, 그들의 참극은 면하게 해 주었으니.

페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운데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네요. 보통 고대의 역사가 제정일치라서 종교 세력이 더 강한데, 샤르프 제국은 아니었죠. 황제가 제사장을 겸한 적이 많은데도 말이에요.”

“역시 넌 영특하다니까.”

“에이, 무슨…!”

평소처럼 루키우스의 칭찬에 부끄러움을 타려던 페이는 그냥 웃어 버렸다.

루키우스가 좋다. 누가 뭐래도, 난 그와 함께하고 싶어. 지금 뭘 하는지 안 알려 주는 저 못된 속내까지 포함해서.

그녀는 따로 챙겨 온 간식 바구니를 내밀었다.

간단히 준비한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는 내내, 그녀의 시선은 근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기 바빴다.

꼬박 천년을 버틴 유적지라는 점도 신기하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하는 것도 즐거웠다. 곁에 정답을 아는 루키우스가 있는데도 미리 묻지 않는 건, 홀로 탐구하는 과정이 좋아서였다.

천생 마법사다운 행동이었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루틴을 아는지라 묵묵히 기다려 줬다.

이윽고 페이가 물었다.

“여긴 어디에 있어요?”

“…내 레어 안. 원래 여긴, 지금으로 따지면 오를레앙 공작가의 지방 영지 중심부에 있었는데 옮겼어.”

“네? 여기가 루키우스의 레어라고요? 그럼 드리아나 산맥 안이란 거예요?”

“어… 어.”

루키우스는 무심코 대답하다 당황했다.

만약 그녀가 레어 안을 다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고백의 준비를 하느라고 너절하게 늘어놓은 계획서나 물건들을 발견당하면!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난 완벽한 상태에서 말하려고 참고 있었는데!

페이가 봄 구경 나간다고 하길래 막 떠올린 좋은 장소가 여기라서, 루키우스는 자기 손으로 무덤을 판 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페이는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하늘이 밝다고 생각해서 그냥 야외인 줄 알았어요. 레어 안이면 공동이나 다름없으니 그럼 천장의 빛은 멀찍이서 들어오고 있는 건가요?”

다행히도 빠져나갈 궁리가 생긴 지라, 루키우스는 냉큼 답해 주었다.

“그건 아니고 마법으로 밝게 해 두었어. 내 권속들도 종종 오가고. 왜… 너도 알잖아. 인력으로 지어진 건물은 사람이 살면서 기름칠도 하고, 호흡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거야.”

“그래요?”

“안에 든 사람이 비워지면 벽에는 금이 가고, 관리를 열심히 해도 생명체가 산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거든.”

“…정이 들었나 봐요?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 흔적을 다 보존한 걸 보면요.”

루키우스는 픽 웃었다.

“그런가?”

드래곤의 신부가 되겠다고 의미 없는 다툼을 하던 천 년 전의 사람들.

그들이 지금도 안식에 거했는지, 어디선가 환생해서 잘 살아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괜찮았다. 그와는 다르게 끝이 비극이진 않았으니까.

꽃 내음도, 풀 향기도 없는 이상한 봄 소풍.

그렇지만 페이는 그날 루키우스와 조잘조잘 떠들며 용신전 곳곳을 구경하느라 행복했다. 밟고 있는 돌 하나도 전부 유적지요, 귀한 유물이라고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호들갑도 좀 떨고.

루키우스는 괜찮다고 했으나 어디 그런가?

“아! 잠깐만요.”

“음?”

루키우스의 본체를 표현했는지, 사납게 생긴 드래곤 석상 앞에 선 페이는 피리를 꺼내 힘차게 불었다.

이윽고 나타난 새하얀 유니콘은 페이가 갈기를 만질 수 있도록 허리 부근을 대 줬다.

“와아….”

왜 유니콘을 불렀는지도 잊고 부드러운 갈기를 멍하니 긁적이던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역시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이미 멸망한 문명의 유적지와 전설 속의 유니콘.

아련한 분위기를 구상하는 배경과 사물로서 둘은 그야말로 최적이었다. 그녀는 유니콘의 엉덩이를 밀어 낮은 담벼락 아래에 편히 쉬게 해 주고 중얼거렸다.

“데생을 좀 배워 둘 걸 그랬어요. 이런 광경은 직접 그려 둬야 제 눈 속에 두고두고 남을 텐데요.”

“네가 원하면 언제가 되었든 같이 또 오자. 흠흠…. 그림이라, 뭐. 네가 원하면 붓하고 물감은 얼마든지 구해 줄게.”

종이야 마탑 어디를 가든 널렸고.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루키우스의 반응이 미지근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다방면으로 꽤 유능한 드래곤이긴 하나, 그림과는 통 연이 없었다.

수백 년 이상을 노력해도 썩 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태생부터 안 되는 능력이다. 어느 정도 성취야 이뤘으나 그의 성에 차지 않으니 쓸모없는 거지.

거기에 대한 반발심으로,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도 꽤 소장하고 있긴 하지만….

‘페이가 원하는 이 광경을 그려 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가 직접 그려 봤자 공간과 사물을 파격적으로 해석한 추상화라는 소리나 들을 거고.

루키우스는 드래곤이라는 자존심과 페이에 대한 사랑 말고, 다른 방면으로는 객관성을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러기에 그녀가 원하는 그림을 대신 그려서 선물한다는 허황된 소리는 지껄이지도 않았다. 안 되는 건 죽어도 안 되는 거다….

“좀 더 느긋하게 있어요.”

“그래.”

뭐 어때, 그림은 못 그려 줘도 그녀의 눈에 아름답다고 여기는 풍경을 가득히 담아 주면 되는 거잖아.

루키우스는 유니콘을 보며 웃는 그녀를 바라본 채로, 바보처럼 환한 웃음을 흘렸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요즘 토라졌던 페이의 서운함은 싹 풀렸다.

이래서 사람은 가장 좋은 환경에 있더라도 가끔 몸을 움직여서 기분 전환을 해 주어야 한다니까.

그녀는 아쉬움을 삼키고 용신전 전경을 둘러보았다.

언제 다시 오게 될까?

“여기, 그냥 놔둬도 파괴되거나 하진 않죠?”

“당연하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네가 원할 때마다 오게 할게.”

누가 감히 드레곤의 레어를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루키우스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요?”

“어, 잠깐.”

그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고 벌떡 일어섰다.

“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온 김에 책 한 권 가져가야겠다.”

용신전 입구에서 막 마탑으로 돌아가려던 루키우스의 육신이 공간 이동으로 쑥 사라졌다.

그 순간, 페이의 품에 안겨 있던 모모가 머릿속으로 또 속삭였다.

「페이여…. 어흠, 아무튼. 조바심 내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그러면 된다.」

“응? 뭘?”

“뿌삐잇~?”

페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으나 모모는 귀여운 척하는 소리를 내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뭐지…? 나한테 뭐 중요한 암시를 준 거 아니었나, 방금?

“왔어!”

몇 분 되지 않아 루키우스는 책 세 권을 안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내민 바른 손에는 큼지막한 연하늘색의 꽃잎이 인상적인 꽃 한 송이가 들렸다.

“꽃…?”

이 꽃은 평소에 보던 것보다 유독 커서 신기했다.

“이건 고대에 사멸한 꽃 테리프리아라고 해. 내 레어에 특수한 화단이 있어서 거기서만 씨앗을 받아 자라거든. 화병에 두고 향기를 맡으면 머리가 맑아지는데, 온 세상에서 너만 가질 수 있는 꽃이니까 받아 줄래?”

‘예쁘다.’ 

그에게 또 꽃 선물을 받은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얼마나 급하게 챙겼는지, 꽃줄기를 자른 후 미처 못 닦은 진액이 방울져 묻어나도 상관없었다.

페이는 루키우스가 미처 알지 못하게, 손바닥으로 그걸 훑어서 감췄다. 그가 조그마한 실수를 눈치채고 쩔쩔매지 않도록.

닦아도 잘 안 지워질 끈적임 따위는 기분 나쁘지 않다.

누가 뭐래도 나에겐 이게 행복인걸.

그녀는 소중한 꽃을 갈무리하고, 루키우스와 함께 마탑으로 돌아갔다.

* * *

페이가 봄의 기억을 소중하게 챙기는 동안, 누군가는 눈치를 보며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건 바로 꾀병 앓이를 그만둔 도트였다.

주신전을 향해 떠난 성녀가 통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지.

풍문으로는 제도와 주신전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포교 활동을 펼친다는데, 이대로 영원히 헤어졌으면 했다.

‘휴….’

제국의 종교인들은 거의 시엘 주신을 믿으나, 제국 전체가 종교 국가는 아니었다.

믿든 믿지 않든 신앙은 자유기에 주신전의 사제들이 민가로 나가는 일은 흔했다. 그래야만 세력을 유지할 수 있어서였다.

성녀가 갈 적엔 꼭 돌아온다고 장담을 하고 나갔다는데, 그게 언제일지도 모르는 상황.

도트는, 공작 부인이 정원에 뿌려 뒀다는 성수를 제거하는 작업을 커튼 사이로 훔쳐보던 기억이 무척 좋았다.

성녀의 흔적 자체를 없애려고 이리저리 손가락질하며 지휘하던 나의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어머니.

앞으로도 공작 부인이 성녀의 헛짓을 철저히 막아 준다면 두려울 게 없지.

‘그래. 내 친자 검증 과정에 개입한 세력이 성녀라고 치자. 그럼 성녀는 나에게 협박을 하려고 들 거지, 우리 어머니께 그 증거를 내밀 리가 없잖아? 그건 따지고 보면 주신전의 관리 소홀로 딸을 잘못 찾은 셈이 되니까 자기 허물이 돼.’

교활하고 늙은 성녀와 일대일로 마주할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되찾은 도트는 가장 가까운 사교계 일정을 살폈다.

일이 잘되려는지, 당장 오늘부터 뭐가 있다.

“에솔트 백작가의 다과회라….”

금광산 발각 건 이후로, 오를레앙 공작가와 휘안테 후작가는 변명도 못 하고 자숙하는 상태라고 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현재 에솔트 백작가와 퀘이사 백작가, 듀란 자작가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 도트가 속한 클라인 공작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도트는 퀘이사 백작가란 이름을 떠올리자 기분이 도로 나빠졌다.

“…철광산은 왜 또 거기에 있었던 거람!”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으니 공작에게 퀘이사 백작가의 무구 손상 건을 귀띔할 시기가 왔는데.

저 멍청한 두 가문의 수작 때문에 입질을 할 기회가 엉뚱하게 날아갔다. 더구나 하필 거기서 철광맥이 발견되는 바람에 일이 다 어그러지고 말다니.

보나 마나 뻔하다.

질 좋은 새 철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난 뒤.

장비 준비가 덜 된 게 마음에 걸렸던 퀘이사 백작이 조급해져서 황실을 졸랐겠지. 그러니 황태자가 바로 지원을 약속한 것일 테고 말이다.

망할!

‘아직 최후의 한 수가 남았어. 내년의 드래곤 습격, 이건 바뀔 리가 없는 재난이잖아. 이미 말해 뒀으니까 기다리기만 하면 돼. 뭐…. 그전에 내가 결혼해서 여길 떠날 가능성도 있기는 하구나?’

참 우습다. 뭣도 모르는 귀족의 권유로 드라칸 비행을 다녀오라고 시켰더니, 성녀는 주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날자고 했다지.

그래서 발견한 금광맥 때문에 제도에서 잘나가는 두 가문이 한꺼번에 침몰하게 되고. 가증스러운 모르가나는 성녀를 귀히 모시지 못했다며 잠깐 자숙했다고 했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도트는 이 해괴한 연쇄 사건에 있어서는 모르가나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금이니 철이니 하는 이야기 자체가 전생에선 아예 몰랐던 방면 아닌가.

‘모르가나? 이왕 잘못을 저지른 김에 마탑에서 영원히 안 나오는 편이 좋을 거야. 카피아 성녀, 너 따위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