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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공작 부인의 분노 (79/148)

79화 공작 부인의 분노

“주신의 은총이 가득한 이 성수로 클라인 공녀를 축복하니, 아픈 몸은 깨끗이 나을 거랍니다. 조금 쉬고 일어나서 걸어 보도록 해요. 틀림없이 될 거랍니다.”

촤악, 촤악.

성녀가 든 성수병에서 성수가 몇 방울씩 튀어 도트의 이마와 코, 입술과 목, 할 것 없이 조금씩 묻어났다.

도트는 속으로 너무너무 싫어서 이불을 둘러쓰고 숨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으아악!’

집사는 손을 맞잡고 있다가 물었다.

“성녀님, 공녀님께서 여러 날 누워 있느라 몸은 다 나아도 당장 걷기가 불편하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시녀들의 부축과 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을 하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요.”

신성력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아 찜찜했던 카피아의 음성은 그새 조금 탁해졌다.

가짜 공녀를 몰아붙일 심산으로 즐겁게 왔는데 느낌이 불길하다.

‘제길.’

무슨 변수지, 이건? 내 신성력이 왜 이러는 걸까? 오늘만 이러고 내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누구에게도 이 일은 들켜서는 안 된다.

특히, 나와 함께 주신전으로 온 성기사 단장 슬로트 경과 내가 몰래 키워 두는 세력들도 내 신성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면 대번에 등을 돌릴 수 있어.

“그렇다면….”

“아니!”

“공작 부인!”

그때였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났고, 덜 닫은 공녀의 방문 앞에 누군가가 빠르게 걸어와 서더니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시가지로 나갔다던 공작 부인이었다.

중간에 연락을 받고 곧바로 돌아온 길인지, 머리에 쓴 베일 햇은 핀 고정이 풀려 기우뚱했고 입술에선 가쁜 숨이 연달아 흘렀다.

도트는 무서운 성녀 앞이란 사실도 잊고 ‘어머니!’라고 구원자를 부를 뻔했다.

“이게 웬일이냐?”

그제야 성녀의 열렬한 추종자에서 클라인 공작저의 집사로 돌아온 그가 급히 일렀다.

“마님, 성녀님께서 공작저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공녀님께서 편찮다는 말을 듣고 오신….”

“아픈 아이를 내 허락도 없이 외부인에게 턱턱 보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카피아는 곤란함에 입술을 살짝 깨무는 대신, 태연하게 굴었다.

“클라인 공작 부인,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따님을 찾으신 일을 축하하고 싶었으나 마음에 걸려 오래도록 망설이다, 공녀의 병환이 있다기에 왔습니다. 가장 순수한 성수를 골라 뿌렸으니 곧 나을 겁니다.”

공작 부인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대신 카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공녀가 여러 날 앓아 휴식이 필요하니, 응접실로 가지요.”

역시 우리 어머니!

벼랑 끝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도트는, 성녀와의 대면을 간신히 끝마칠 수 있었다.

그녀는 강제로 쥐어질 지팡이 대신 이불을 코 위로 끌어당기고,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공작 부인을 향해 한층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좀 쫓아 달라는 신호였다.

공녀의 침실 바로 옆에 붙은 작은 응접실.

황궁에서 대접받은 디저트 못지않게 훌륭한 것들이 카피아의 앞에 나란히 놓였다.

다즐링과 우유 잔에, 색색이 다양한 구움과자 중 하나엔 유독 새빨갛고 달콤해 보이는 체리가 위에 얹혀 있었다.

카피아는 달콤한 과일을 유독 좋아했다.

나도 저것만 편리하게 떼어먹는 삶을 살고 싶구나. 남의 눈치를 보느라 맛없는 과자 부분까지 억지로 먹는 수고는 그만하도록… 말이지.

이날이 오기만을 누구보다 지루하게 기다린 만큼, 껄끄러운 상대라도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원수를 대한 클라인 공작 부인의 노기는 생각보다 더했다.

“여긴 어쩐 일로 온 겁니까?”

“그건, 방금….”

“난 내 딸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이후로 편하게 잠든 날이 없었소.”

옛일에 대한 추궁인가.

만약 그 일을 공작 부인이 따진다면, 주신전을 이끄는 카피아로선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공녀를 돌려보내는 날, 성기사단의 호위를 늦게 붙이게 된 건 실상 그녀가 정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 인적이 드물고 합류하는 장소도 주신전 근처라, 누가 사사로이 접근하지도 않는 지역이었거늘.

그때 성기사단을 이끌던 단장은 지금의 슬로트 경도 아니라 책임을 떠넘길 수도 없고!

공작 부인의 눈에 화염 같은 분노가 들어찼다.

“내 가엾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주신전에 데려다 놓을 때, 당신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걸 제공했지. 어떠한 불편함도 감수하지 않도록! 하녀 넷에 유모를 딸려 보낸 건 물론, 돈과 식재료와 그 외 여타의 물건 중 부족한 게 있었는지 말해 보오.”

“송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가문의 기사들도 응당 보내고 싶었으나 주신전의 입장이 있다길래 못 했지. 여기로 돌아오기로 한 그날도!”

틀린 말이 없기에 받아칠 말도 딱히 없었다.

공작 부인의 분노는 계속되었다.

“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물러서고, 물러서고, 한없이 양보한 나 자신을 제일 먼저 죽이고 싶소. 성녀께선 내 마음이 얼마나 누더기가 되어 살아왔는지 이해는 하시려나?”

카피아는 추궁당하는 와중에도 애써 밝은 희망을 찾고자 했다.

공작 부인의, 딸을 향한 애착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러니 자신이 가짜임을 뻔히 아는 저 사특한 악마는 겁에 질려 내 발밑에 꿇어 엎드려야만 할 거다. 진실이 폭로되면,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게 뻔하니….

“그….”

“오 년. 오 년을,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주신전에서 기르도록 했소. 그리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내 딸을 만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지.”

소피아 클라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사교계의 암호랑이와도 같은 공작 부인의 눈물을 멍하니 보고 있던 카피아는 위기를 느꼈다.

“공작 부인…! 저 역시 그 일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을….”

분노한 여인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뭐, 안타까워? 나는 그날 이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살았어! 주신전의 그 누구도 횡액 이후로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내 티아나의 머리털 한 올이라도 찾아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지.”

“저희 측에서 면목이 없어 말을 고르려다 보니 부득이하게….”

“닥쳐! 그게 당신네의 성의인가? 나는 하루하루 클라인 공작가의 망령으로 살았을 뿐 뭘 먹어도 단맛도, 쓴맛도 못 느끼고 살았어!”

그새 드레스 룸으로 들어온 도트는, 벽에 귀를 대고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성녀를 향한 공작 부인의 고성을 듣고 있자니 고소해 미칠 지경이었다.

도트는 손으로 입을 막고 귀를 쫑긋 세우며 성녀가 곧 내쫓기길 기다렸다.

“진정하십시오.”

“진정? 하, 여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는지 어디 말해 보시오. 내가 우리 딸, 에이나로 쓰려고 데려온 내 딸의 물건을 우연히 발견해서 주신전으로 데려간 건 사실이지. 그때 당신은 주신전에 있지도 않았다며!”

있었다. 하지만 없는 척 슬로트 경과 사제들의 눈을 피해 석상 옆의 밀실에 숨어 있었지. 나 혼자 남아서 석상의 질문을 가짜의 뜻대로 조작하기 위해서.

알리바이를 위해 꾸몄던 일이 지금은 카피아의 목을 시시각각 졸라 오고 있었다.

“그건…!”

“당신은 내 딸을 위해 무엇도 하지 않았어. 그야말로 아무 상관도 없는 생판 남이지! 어디 내 딸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성녀랍시고 으스대?”

정상이 아니다.

아무리 과거의 원한 관계가 있다고 한들, 주신전 전체를 아우르는 성녀에게 이런 식으로 폭언을 내뱉어선 안 되지.

그러나 카피아는 하필 신성력도 발동 못 하는 이상 현상까지 겪은 몸.

심리적으로 수세에 몰린 성녀는 쩔쩔맸다.

“그게 아니라 이 몸은, 아픈 공녀를 돕고자….”

클라인 공작 부인은 엄숙히 선언했다.

“내 딸은 오로지 내 힘으로 되찾았고, 당신들은 한 게 없어. 심지어 공녀를 찾았다고 공표했을 적에도 잠잠했지? 오 년 동안, 신전에 그 아일 위탁한 대가도 돈으로 충분히 다 지불했고!”

“진정하십시오. 네?”

공작 부인은 성녀의 호소를 단 한마디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

“모든 일이 다 끝난 이제야 말을 얹을 필요란 없으니…. 성녀 카피아여, 부디 주신전으로 잘 돌아가시게.”

“…….”

성녀 앞에서 단호하게 말을 마친 공작 부인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미련도 없이 레이디스 메이드를 데리고 가 버렸다. 주신전하고 영원히 결별할 기세였다.

혼자 남은 성녀는 눈앞의 차와 디저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체리는 여전히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냈으나, 입맛이 남았을 리가 있나.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화풀이 대상을 향해 속으로 이를 가는 것뿐이었다.

‘두고 보자. 도트리샤 카리스! 이 굴욕을 언젠가 모조리 돌려주마. 너는 주신전으로 와서 신상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매일 깨끗이 닦아야 할 거다.’

뭘 하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나?

정답은 이미 나왔다.

‘네가 암흑 길드와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안다. 너는 지금 네 가족이 죽어 땅에 묻혔으리라 여기지만, 그들과 한 번 더 접촉하려 들겠지. 진짜 공녀와 수녀원의 지인들을 없애 입을 막으려고 말이다. 내가… 실크 로브에 대한 일을 드라칸 라이더에게 살짝 흘리면 끝장인 것을!’

카피아는 그날부로 잠시 주신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황궁에 남았을 슬로트 경에게는 짧은 편지 한 장만을 남겼다.

제도에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더 살펴보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 주신전에 가서 꼭 챙겨 올 게 있다면서.

늦어도 열흘 안으로는 다시금 올 터이니 뒤쫓을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주신전으로 향하는 성녀의 옆얼굴은 사악함으로 물든 악령, 그 자체였다.

성녀가 간 이후, 화를 참지 못한 공작 부인은 애꿎은 집사를 쥐 잡듯이 닦달했다.

“성녀가 와서 뭘 했나?”

“마님, 오자마자 정원의 비석에 가서 성수를 뿌려 축복을 하고 리스를 놓았습니다. 공녀님께서 편찮으니 꼬일지도 모르는 악령을 물리친다면서….”

“감히 어디에 손을 대?! 집사, 자네는 생각이 있나? 말렸어야지!”

“소, 송구합니다.”

“어서 가세!”

클라인 공작 부인은 씩씩대며 성녀의 흔적이 남은 비석으로 향했다.

성수는 여타의 물이나 액체와는 다르기에, 금세 말라 버리지 않고 비석에 촉촉이 묻은 흔적이 남았다.

공작 부인은 하녀들을 시켜 그 자국을 하얀 수건으로 닦게 하고 그걸 모아 소각로에서 활활 불태웠다.

함께 버려진 물건 중에 성녀가 들고 온 리스가 포함되었음은 뻔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씨근덕대며, 불청객 때문에 힘겨웠을 딸을 보러 갔다.

* * *

“흐으응….”

페이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어깨와 등이 뻐근했다.

‘큐어라도 써 볼까?’

그녀는 느긋한 생각을 하다 말고 바구니 안에서 곤히 자는 모모의 날갯죽지를 간질였다. 잘 자던 모모는 푸르륵, 하는 콧소리를 내다가 도로 엎어졌다.

“…네 주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응?”

오를레앙 공작가의 무도회가 끝난 후.

루키우스는 무척 짧게, 성녀가 클라인 공작저를 찾아갔다가 얼마 안 가 쫓기듯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그 뒷날에 황궁으로 진상을 알아보러 갔더니, 성녀는 주신전에 ‘잠시’ 돌아갔다고 하질 않나.

때마침 만난 황태자의 서기관이 그녀를 붙들고 자체 금족령을 그만해 달라기에,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 나온 참이었다.

그리고 루키우스의 모습은 요즘 통 안 보였다.

페이는 쿨쿨 자는 모모의 날개 위로 허무한 투덜거림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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