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인과응보
“너무 잘생겼…! 흠, 마음대로 해요.”
아스테인보다 더 짙은 하늘색의 머리칼에 바다를 닮은 푸른 눈빛.
보는 순간 남들 눈에 너무 띈다고 생각한 페이는, 루키우스의 현 모습도 어차피 잘생긴 건 마찬가지라 그냥 놔두기로 했다.
오를레앙 공작가의 무도회에 홀연히 나타난 선대 마탑주.
그 소문이 더 거셀 거니까.
바꾼 외양이 페이의 취향과 또 들어맞았다고 생각한 루키우스는 환하게 웃었다.
누가 뭐래도 잘생긴 게 최고다. 귀찮음을 감수하고라도 이 얼굴을 들고 다닐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금방 다녀올게, 페이. 샴페인이나 뭐 갖다 줄까?”
“됐어요. 생각나면 돌아올 때 물이나 한잔 부탁해요. 급하진 않으니까 볼일 다 보고 천천히요.”
“응!”
힘차게 대답한 루키우스의, 정확히는 새로 등장한 바로아의 인영이 눈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페이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의 부재는, 그녀의 마음을 외롭게 만들지 않는다.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올 거니까….
1층으로 내려간 루키우스는 카피아의 소재를 순식간에 찾아냈다.
‘건방진!’
성녀는 에솔트 백작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무슨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었다. 나름대로 정숙해 보이려고 입은 연보라색 드레스는 흘깃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왔다.
그냥 죽여 버릴까, 사고를 위장해서.
루키우스의 시선이 턱 끝 하나 올리지 않고, 천장의 웅장한 샹들리에로 향했다.
저걸 떨구면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성녀라 할지라도 절명하게 만들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날카로운 크리스털 장식물에 마력을 실어 놓으면 더 확실하겠지.
당장 저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2층엔 세상의 그 누구보다 소중한 페이가 있다.
‘젠장.’
그녀의 눈앞에서 피로 얼룩진 참사를 일으키고 싶진 않다. 혹시 당사자가 일어나길 원한다면 또 모르지만.
그로선 무도회의 주최자인 라파엘의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었다.
루키우스는 입술 안으로 욕설을 삼키며, 꿩 대신 닭이라고 미약한 마력을 보내 성녀의 머릿속을 탐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간 기억을 읽어 과거의 일을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이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당히 훑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얼마 안 가, 루키우스의 입술은 혐오와 환멸로 일그러졌다.
‘괘씸한 것!’
페이가 생모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농간을 부려? 그냥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군!
그는 오래 살면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숱하게 봐 왔다.
그런 그로서도 성녀의 몸으로 이만큼 사악한 흉계를 품은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주신이 성녀를 정할 때, 조용하고 얌전한 성품의 소유자를 고르기 때문이었다. 그게 남의 눈에만 고요하게 보이고, 속내로만 끝없이 사악한 짓을 자아내는 건 예외였나.
‘좋다. 너와 주신전이 신성력의 약화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했지? 그 고민을 아예 없애 주마.’
루키우스가 카피아의 뇌리에 심어 뒀던 마력이, 살아 있는 실처럼 요동쳐 하나의 저주를 이뤘다.
성녀의 신성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0을 향해 무섭도록 추락할 거고, 종국에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말라 버리겠지.
어디 스크롤 따위로 사라진 신성력을 채우려고 발악해 봐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봤자 소용이 있더냐? 잠시의 갈증을 채울 뿐이지.
무시무시한 저주를 완성한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가벼운 한숨이 흐를 때.
그를 연신 힐끔거리던 젊은 귀족 몇몇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실례합니다.”
“…음?”
루키우스는 카피아만 쭉 바라보느라 타인의 시선을 뒤늦게 느꼈다.
그의 신비로운 외양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도 남았다.
갑자기 나타난, 제도에서 볼 수 없었던 멀끔한 사내. 언뜻 보아도 기품이 넘치고 수려하기 그지없다.
아스테인 황자보다 더욱 선명한 하늘빛 머리칼과 사파이어가 무색하도록 푸른 눈빛. 반듯한 코와 머리칼에 가려진 귀, 곧게 뻗은 목.
그 외에도 그를 구성하는 뛰어난 외양은 근처의 이들로 하여금 말을 걸고 싶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이 무도회를 장식한 대리석 조각상 못지않게 황홀한 외모일 터였다.
그를 정면에서 보고 감탄한 귀족들이 말을 붙이자, 루키우스는 뻔뻔하게 응대를 시작했다.
물, 페이에게 가져다줄 물 한 잔을 잊지 않은 채로.
그로부터 며칠 후.
재미도, 실용성도 없던 오를레앙 공작가의 자선 무도회 뒤로 할 일이 없던 성녀가 몸을 일으켰다.
“슬로트 경께 일러 주게. 이 몸, 황궁에 오고 나서 너무 편하게 있었지.”
“주신전으로 돌아가시렵니까?”
황궁 시녀의 눈치 없는 대꾸에 성녀는 화를 참아야만 했다.
“듣자 하니 클라인 공녀가 아파서 앓아누운 지 오래되었다지? 데뷔탕트도 치른 몸인데 봄부터 자리보전을 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 아닌가. 내, 주신의 은총을 받드는 몸이니 마땅히 가서 이마에 손을 얹어 주어야 할 것이야.”
“그럼 전령을 보내 약속을 잡겠습니다.”
“아니, 환자가 힘들게 몸단장을 할 시간을 주는 편이 민폐겠지. 예의는 되었어, 같은 여자의 몸이니 이불을 덮은 채로 보아도 괜찮을 걸세.”
미리 말을 해 두면 고 미꾸라지 같은 요물이 어떻게 도망을 칠 줄 알고!
카피아는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황궁 시녀를 노려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원칙적으로는 다 맞는 말만 하고 있다. 그게 성녀의 뜻과 거스를 뿐이지.
그렇게 한 시간도 안 되어 황궁에서 나온 카피아는 클라인 공작저로 들이닥쳤다.
운이 좋았는지, 때마침 클라인 공작 부인은 저택에 없었다. 공작은 황궁에 있음을 확인하고 나왔고, 공작 부인은 잠깐 시가지로 나갔단다.
소공작인 카셀은 기사단장 노릇을 하느라 거의 안 온다는 풍문은 익히 들어 놨지.
지금이 기회다. 가서, 남에게 도둑질한 지위로 호의호식하는 공녀를 일깨울 좋은 때야!
‘잘됐군!’
“저어, 성녀님. 성녀님을 맞이할 주인마님 두 분이 다 계시지 않습니다. 황공하오나 다른 날에 선약을 잡아 오심이 어떻겠습니까?”
맞이하러 나온 집사의 온당한 말에, 카피아는 지긋한 미소로 답했다.
“내 클라인 공녀가 아파서 여러 날 앓아누웠다는 말을 듣고 긴히 온 길이네. 우선,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악령이 머무르지 못하게 성수를 뿌리지. 소중한 공녀의 병이 쉬이 잡히지 않는다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서 말일세.”
“아…! 부탁드립니다.”
집사가 감탄하자, 성녀는 가뿐한 걸음걸이로 정원 중앙의 비석에 다가섰다.
클라인 가문의 위용을 자랑하는 비석 근처에 성수를 뿌리고, 가져온 작은 리스까지 풀밭 위에 놔두는 행위 하나하나가 성스럽기 짝이 없다.
공들여서 의식을 마친 카피아가 눈꺼풀을 위엄 있게 들어 올렸다.
“가세.”
“예.”
어느새 카피아의 위세에 압도당한 집사는 공녀의 침실로 홀린 듯이 인도했다.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게으름을 부리고 있던 도트는 느닷없는 노크 소리에 인상을 썼다.
“…왜?”
아픈 척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나 되어야 버티는 법이다.
성녀가 쇠심줄같이 황궁에서 버티고 안 나가니 안 그래도 짜증이 극심한데, 아랫것들까지 날 귀찮게 해? 식사 때도 아닌데?
“공녀님, 황궁에서 성…!”
“쉬잇, 그냥 치료사가 왔다고 하게. 공연히 놀라 몸을 일으키다 발이라도 삐끗하면 큰일 아닌가.”
“공녀님, 새 치료사께서 오셨습니다.”
카피아는 없는 인자함을 한껏 끌어올리며 집사를 안심시키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철커덕.
그들이 한 공간에서 마주쳤다.
세상에 둘도 없어야 하나, 둘이나 태어난 악당들의 연극이 드디어 막을 올리는 엄청난 순간이었다.
“……?”
대뜸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급히 이불을 덮고 누운 도트.
그녀는 카피아 성녀를 마주한 전적이 없었다.
전생에선 성녀가 제도로 올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시간이 되돌려졌지 않은가. 당시에도 카피아는 무척 조심스럽게 굴어 대면의 기회조차 없었다.
‘흥, 새 치료사라니. 그래 봤자 날 일으키진 못해! 난 성녀가 주신전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죽어도 안 일어나.’
일부러 두 눈의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고 눈알을 굴리니, 낯선 치료사 뒤의 집사가 보였다.
그런데 집사의 표정이 평소와는 좀 달랐다. 턱에 주름이 잔뜩 잡힌 채,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왜 저러는 걸까.
‘뭐지?’
새 치료사는 나이도 지긋하고, 말투도 상냥했다.
“그대로 누워 있으면 된답니다.”
감격에 겨운 집사는 성녀가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공녀님, 기뻐하십시오. 카피아 성녀님께서 공녀님이 편찮다는 소문을 듣고 황궁에서 친히 와 주셨습니다.”
뭐… 뭣… 뭐라고…! 성녀가 왜 와?! 외부 방문객은 철저하게 막으라고 했거늘!
안심하고 공작저 안에 꼭꼭 숨은 도트로선 누운 채로 까무러치고도 남을 끔찍한 상황.
이빨을 감춘 늑대와도 같은 카피아가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으음….”
손의 체온은 미지근한데, 도트는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로선 겁먹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달래야만 했다.
‘정신 차려! 난… 난, 초라한 도트리샤 카리스로 살 수 없어. 난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란 말이야, 여기서 떨거나 위축된 모습을 보여선 안 돼. 공녀다운 위엄으로 물리치라고!’
도트는 이마에 불청객의 손이 얹힌 채로 중얼거렸다.
“어머… 어머니께선….”
“마님께선 곧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그때쯤 깨끗하게 나은 공녀님의 모습을 보면 무한히 기뻐하시겠지요?”
아아, 틀렸어.
집사가 되어 가지고 내 기분 하나 맞춰 주지 못하다니!
도트의 눈망울이 미처 숨기지 못한 당황으로 물드는 장면은, 카피아에게 있어서는 쾌감과도 같았다.
성녀는 속으로 웃었다.
‘후후, 거짓말쟁이 나쁜 아이야. 너를 참혹하게 망가뜨릴 네 진짜 가족이 내 손안에 있단다. 공작저 안에 꼭꼭 숨어 있다고 해서 네가 달아날 성싶으냐? 네 가족 중 단 한 명만 남겨도 너는 필패야!’
카피아는 이마에서 손을 떼고 고상하게 말했다.
“그래, 집사여. 공녀께서 주로 호소하는 통증은 무엇이오?”
“예. 주로 두통을 호소하고 열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침상에서 한 발자국만 떼 걸으려고 해도 어지럽다며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저런. 이토록 연약하고 아리따운 공녀께서 병환으로 고생이 많으셨구려.”
성녀에게 완전히 홀린 집사는 결연히 말했다.
“성녀님께서 곧 낫게 해 주실 터이니 아무 걱정 없습니다.”
카피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야지. 자아… 그럼, 더는 어지럼증이 느껴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겠….”
음?
카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분명히 신성력을 발동했다. 그녀의 체내는 물론, 정신세계에서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는 신성력.
비록 선대 성녀보다 총량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빛으로 발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는 신성력이 잠잠하다.
뭐지?
성녀 후보로 발탁되기 전부터 느낀 신성력이 말을 듣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카피아는 다시 한번 오른손에 신성력을 뭉치려고 했으나, 여전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카피아는 노회한 자답게 당황하지 않고 품에서 성수병을 꺼냈다.
성수를 정제하는 과정은 보통 신관 급에서 하고, 사용에는 제한이 없기에 이 곤란을 타개하기에 적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