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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을이 된 남자 (77/148)

77화 을이 된 남자

라파엘과의 약속이니까 나오기는 하되 참석은 안 한다고, 서로 기분이 상할 리도 없었고 말이다.

그녀와 라파엘이 일정 이상의 교분을 유지하는 편이 유리하니까 놔두는 편이 낫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며칠 전부터 페이의 태도가 조금 냉랭하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예전 같으면 공간 이동 마법을 쓰면 루키우스 정말 대단하다고, 고맙다면서 칭찬을 꾀꼬리처럼 늘어놨을 텐데 오늘은 ‘수고했어요’ 한마디가 다였다. 그 말조차도 느낌이 서늘하니 불안했고.

왜?! 

‘설마 냉…각기?’

둘의 사이에 본격적으로 뭐가 시작된 적이 없으니, 권태기라는 단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끌고 올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냉각기뿐인데…. 아아. 그거나 이거나 뭐가 달라! 그녀의 태도가 현격히 달라졌음이 문젠데!

페이와 라파엘은 뒤편에 홀로 버려진(?) 루키우스는 안중에도 없는지 계속 대화를 나눴다.

“요즘 이쪽 집안 분위기는 어때요? 역시 안 좋겠죠?”

“페이 양, 그 일을 두고 공연히 마음의 빚 따위 질 필요 없습니다.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지요.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나, 현재 오를레앙 공작가 곳곳은 쑥대밭이 된 처지였다. 광산이 발견된 구역은 물론 제도 내에 있는 오를레앙 상단 측도 압수수색에 들어갔다지.

오늘 연 이 ‘속죄의 자선 무도회’도, 준비한 음식의 열 배만큼의 식료품을 빈민가에 기부한다는 명목으로 열었다.

취지는 좋게 보이나 보통 이런 식으로 이름이 붙여진 무도회는 귀족가에 굴욕으로 여겨졌다.

클라인 공작은 아무 일 없어도 시시때때로 수도원에 기부를 했었는데….

문득 생부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린 페이는 기분전환을 하려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기둥에 기댄 채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키우스를.

그 모습이 참… 비 맞은 하얀 강아지 같다고나 할까?

나 좀 잘 봐달라는 흑안이 소심하게 시선을 보내온다.

페이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곁에 있을 때 잘할 것이지!

‘흥!’

생각다 못해 먼저 고백할까, 생각은 했는데 아무래도 좀 못마땅하다. 먼저 좋아하면 진다는 말 같은 건 안 믿는데 기분이 별로라 그만두고 말았다.

이건 순전히 다 루키우스 잘못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꽃도 주고, 반지도 주고, 네게 용서를 구한다는 말까지 들을 건 다 들었는데 가장 중요한 말은 못 들었으니까.

널 좋아하게 되었다든지, 우리 정식으로 교제를 하자든지 그걸 왜 말을 안 해? 난 눈빛만으로 모든 걸 다 이해하는 여자는 아닌걸.

‘으흠?’

라파엘은 항상 웃고 다니지만 남들보다 눈치는 월등하게 빠른 자.

딱 봐도 페이와 루키우스, 둘의 사이에 수상쩍은 균열이 보이니 솔직히 흥미로웠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지 않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페이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개수작을 부렸다.

“그럼 페이 양, 잠시 후에 음악이 시작되면 한 곡 추실까요?”

“여기서요?”

“안 될 거 있습니까? 여기가 아래보단 못 해도 두 명 춤출 만큼은 됩니다.”

1층은 홀과 테라스가 있고, 2층은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사각형으로 안이 뻥 뚫려 가장자리를 연결한 구조였다.

라파엘 말대로 두 명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다가 서로 핑그르르 돌아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넓다. 난간 위로 몸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래에선 잘 보이지 않겠지.

페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라파엘도 정말! 오늘 무도회의 주최자잖아요? 공작 내외 두 분 다 못 오시는데 어디 주인이 2층에서 노닥거리려고 해요. 뭣보다 라파엘이 여기에 계속 숨어 있으면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지 않을걸요?”

“쳇.”

그가 소심하게 투덜대자, 페이는 웃으며 그의 등을 밀어 주었다.

“어서 내려가기나 해요. 피아노 없는 다른 계단으로요.”

“여기, 내 집입니다. 벌써 공작저 구조를 여기저기 파악하는 걸 보니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될 마음이….”

“없으니까 어서 가요.”

라파엘은 발을 움직이면서도 입을 나불댔다.

“나중에 내 결혼식에서 땅을 치고 울지 마십시오. 페이 양, 난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아무한테나 결혼하잔 말을 두 번씩이나 한 적이 없는데 정말 아깝습니다. 당신을 부르는 꽃마차를 이대로 보내고도 후회 안 할 겁니까?”

“됐다니까요.”

‘누구누구가 좀 새겨들었으면 좋겠네.’

페이는 빙긋이 웃으면서도, 뒤의 루키우스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를 지금도 많이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다.

그러나 답해 주지 않을 마음을 기다려 주며 바보 같은 망부석이 될 생각은 절대로 없다.

기회가 뭐, 아무 때나 있는 줄 아나. 나도 내가 귀한 사람이다. 첫사랑이 중해도 난 내가 나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일이 먼저거든!

라파엘이 내려가고 나서 아래의 좌중이 조용해지더니, 그가 뭐라뭐라 말을 하는지 군중이 또 웅성대는 소리를 냈다. 1층과 2층의 거리가 꽤 있어서 내용을 자세히 엿듣기는 힘들었다.

‘으음….’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온 루키우스가 뒤에서 말을 붙였다.

“왜, 뭐 도와줄까?”

“아뇨.”

‘아뇨’라고 하는 그 말조차도 루키우스의 귀에는 쌀쌀맞게 들렸다. 페이는 분명 평범하게 대꾸했는데.

시무룩해진 그가 차마 손을 뻗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1층에서 부드러운 현악기 소리와 함께, 왈츠의 선율이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몸을 천천히 돌린 페이가 루키우스를 향해 물었다.

“한 곡 추실까요, 선대 마탑주님?”

그제야 그녀의 말투가 덤덤하다는 걸 깨달은 루키우스가 서둘러 다가섰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그들의 귓전을 울릴 정도는 충분해서, 둘 중 누구도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오르골 안의 발레리나가 돌아가듯 유연하기 그지없었다.

페이, 잘 춘다.

루키우스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루키우스는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내가?”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입은 귀에 걸렸고 적당히 허리만 감싸도 되는 팔은 페이의 반대쪽 옆구리까지 엉큼하게 진출해 있었다.

허락만 받으면 숫제 그녀를 끌어안고 2층 테라스 너머로 마탑까지 날아갈 기세였다. 실제로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네.”

페이는 또렷한 연둣빛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 잘생겼다. 여름날의 축제서 본 첫날에도 그랬는데 오늘도 그의 눈부심은 평소보다 더했다.

창백한 초승달을 닮은 은빛 머리칼과 칠흑의 색보다 더 까맣고 어두운 눈망울.

신비로운 은발에 반해 다가갔다가, 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고 움찔하여 말을 못 걸 사람이 태반이지.

루키우스를 멀찍이서 훑어보기만 하고 자세히 대하지 못한 이들은 영원히 모를 거다. 그의 눈이, 마법사답게 진리를 탐구하는 생각에 깊이 잠겼을 때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그는 아름다워.

드래곤이니, 엘프니, 인간이니 하는 종족을 떠나 루키우스만이 가진 특별함이었다.

그건, 적어도 지금 세대에서는 페이만이 알 거다.

그녀는 그게 좋았다.

나만의 남자. 나만이 아는 그의 비밀.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난 지금 루키우스한테 화가 난 건데 왜 또 반하고 있어?’

페이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입술을 움찔거리자, 루키우스는 심경에 변화가 생겼구나, 짐작하여 아무 말이나 냉큼 꺼냈다.

“너하고 춤을 춰서 기분이 좋은가 봐.”

“…어디서 춤을 많이 춰 봤나 봐요?”

“어?”

의문이 가득한 되물음.

루키우스는 멍청하게 대꾸해 놓고서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의심이고 질투다. 아무래도 페이가 나에 대해서 오해를 단단히 한 눈치인데, 안 돼!

그는 길고 긴 드래곤의 유희를 즐기면서도 누군가와 백년가약은커녕 가벼운 연애조차 한 적이 없는, 나름대로 청정한 사내였다.

그는 등에 식은땀이 살짝 배는 것을 느끼며 변명했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의례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누군가와 화려한 생활을 즐긴다든지 그런 적은 없어.”

“네?”

“더군다나 아칸 제국의 역사를 함께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마… 마지막일 거고. 앞으로는 없겠지, 전혀. 내 남은 삶에는 오로지 너만 있어.”

흥.

마음에 드는 대답이 나오자 페이는 기분이 좀 풀렸다.

그녀는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고대는 어떤 시대였어요?”

“어느 정도의 연도가 궁금해? 샤르프 제국 이전? 아니면 고대 제국?”

상당히 추상적인 질문인데도 루키우스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아무 때나요. 그냥, 루키우스의 눈으로 본 전체적인 시대상요.”

“음…. 샤르프 제국 이전엔 많은 왕국과 부족국가가 난립하던 시기라서, 지금보다는 더 혼돈의 시대였어. 그래도 사람들은 다 살아갔고 또 살아남았지. 그 후손들이 여기에 있는 거고.”

“그랬군요.”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둘은 느릿느릿한 왈츠 연주가 다 할 때까지 서로의 몸 사이를 종이 반 틈 정도 남겨 두고 춤을 췄다.

부드러운 스텝을 밟는 내내 루키우스는 속으로 고민했다.

그녀가 고대에 흥미를 갖는 모양이니 잘 좀 가르쳐 볼까? 그러면, 갑자기 쌀쌀맞아진 태도도 은근슬쩍 풀릴지도 모르고….

“…갔으려나.”

“음?”

왈츠가 끝나고, 아쉬운 손을 놓을 때쯤 페이가 중얼거렸다.

“성녀요. 황궁에서 버티다가 이 무도회까지 안 놓치고 일부러 온 걸 보면 노림수가 있겠죠. 클라인 공녀는 안 왔다지만 누군가를 만나 뭔가를 또 획책하려고 들 수 있잖아요?”

“내가 가서 보고 올까?”

“어…. 그러네요. 아, 근데 사람들이 제 말을 물으면서 시비를 걸면 어떡하죠?”

페이는 흔쾌히 그러라고 하려다가 주저했다.

대외적으로는 그녀가 드라칸 비행의 미숙련으로 일련의 사태를 일으켜 피해를 끼쳤다고 귀족 사회에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 함께 마탑의 루키우스가 페이와 동행하는 동료란 사실도 사교계엔 이미 알려져 있다.

모든 속성 마법을 고루 사용하는 7서클 마스터는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황태자의 부하.

그 일을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면 황실에 대적하는 의도로 보이기에, 내가 나갔을 때 대놓고 말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루키우스는 실력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데도 그 방면으로는 취약해….

권력이란 건 묘하구나. 약한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고 강한 사람을 불안으로 떠밀기도 하다니.

루키우스는 그녀가 걱정해 주는 눈치를 보이자, 신이 나서 주워섬겼다.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고 가면 되잖아! 음, 그래. 누가 물으면 바로아라고 할게. 그러면 되겠지? 난 공식적으로 마탑주 자리도 내놓고 간 몸이니까 어디에도 부담이 안 돼.”

“네? 하지만 바로아 님의 모습이랑 루키우스랑 똑같잖아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몰라. 사념체가 내 모습을 본뜬 건 사실인데, 실제로 내 얼굴을 본 건 너뿐이야. 널 감싸느라 로브를 잠시 벗은 거고 수도원에 도달했을 때쯤 다른 걸 뒤집어썼으니까. 일 년 내내 마탑 어디든 로브 상태로 다녔거든.”

“그래요?”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옳다.

루키우스가 마탑에 왔을 때, 바로아 시절의 마법사들도 당연히 존재하는데 그 누구도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지.

나만… 아는 거구나.

“이 정도면 어때?”

그는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빨리 변신 마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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