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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사랑은 타이밍 (76/148)

76화 사랑은 타이밍

은근히 황태자와 닮은 금발도 그렇고, 고지식하기 쉬워 보이는 녹안이 오히려 눈길을 사로잡는다. 과연 한 나라의 왕녀다운 기품이 넘쳐흘러 호감을 산다.

“…….”

공녀는 오래 끌지 않고 본론을 내놨다.

“라냐 황비님께 들었어요. 날 위해 애써 주신 일들을요.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겠어요.”

뜻밖의 말에 페이는 펄쩍 뛰었다.

“은혜라뇨? 아니에요, 저는 공녀님을 데뷔탕트 무도회에 억지로 나오게 하진 않았는지 늘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말로는 강요하진 않았다지만 황궁 초청장의 무게는 그 누구에게도 무거우니까요.”

마뉴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은혜가 옳아요. 내가 저택에서 당당히 나올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그대입니다. 레이디 모르가나의 앞날에 서광이 비추기를 매일 기도하겠어요.”

“공녀님.”

“…당신은 내 발목에 달린 몇 겹의 족쇄를 풀어 준 사람이에요.”

페이는 랏셀 공녀의 힘겨웠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신도 그러했으니까.

이 년. 그 길고 긴 시간을 클라인 공작저에 갇히다시피 하며 쓸모가 있을 때만 인형처럼 사교계에 끌려다니지 않았나.

그건 외출이랄 수 없었다. 그저, 목줄을 맨 애완동물을 잘 키웠다는 식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 힘들지 않게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남들이 보기에 돈과 경호의 걱정 없이 사는 공녀라 할지라도.

금광맥의 발각 건으로 오를레앙 공작가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마뉴엘라 측이 운신하기는 전보다 훨씬 편해졌을 터였다.

‘으음.’

귀족 간에는 약혼과 파혼이 제법 많다지만, 황족과는 또 다르다. 페이는 카셀과 정보를 나눴기에 랏셀 공녀가 억지로 파혼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단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그 약혼이 수월하게 다시 이어지리라고 생각하긴 어려울 터이다. 많은 이가 파혼을 당한 쪽이 황태자임을 아는 것도 최악의 상황이고.

‘만에 하나 황태자 전하께서 랏셀 공녀님을 지극히 사랑해, 약혼을 재차 진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또 모르지만.’

실라스 황태자, 얼굴로는 나무랄 데가 정말 없다.

루…키우스, 사랑스럽지만 최근엔 약간 미워진 그와 비교하면… 으음….

‘루키우스는 오래오래 살았는데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투덜대는 경향이 있고, 황태자 전하는 늘 진중하신 분이지.’

화려한 금발보다 더 보기 힘든, 옅은 색의 금안도 멍하니 보고 있자면 신기하다.

감정이 고즈넉할 즈음엔 달콤한 벌꿀을 보는 듯 몽롱한데, 때로는 흑표범의 동공처럼 사납게 몰아쳐서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지.

이것도 후자 측은 카셀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황태자는 페이 앞에서 감정을 격하게 드러낸 적이 절대로 없었다. 첫 의뢰를 받을 때, 랏셀 공녀님 때문이냐고 지적할 무렵 눈빛이 미미하게 요동치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그럼 진짜로 화를 내실 때는 얼마나 무섭단 소리야?’

공녀는 용건이 끝났는지 일어날 것처럼 하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아한 곡선의 어깨가 살며시 다가오는 모습은 같은 여성이 봐도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뉴엘라의 붉은 입술이 이윽고 조심스레 열렸다.

“실은… 내 약혼은, 정략적으로 정해진 거라 선택사항이 없었습니다.”

왜 당연한 말씀을 하는 걸까? 그건,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람이라면 정해진 숙명이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아는데.

페이의 총명한 머리로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나와 그분과는 끝이 났으니, 차후의 접근을 거리낄 이유는 전혀 없지요.”

“네?”

공녀는 어느새 눈을 동그랗게 뜬 페이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혹시 나 때문에 그분과의 사적인 만남을 망설인다면, 그럴 필요 없다는 소리였어요. 난 용기를 내 진실을 밝힐 기회를 놓쳤고, 그 결과로 오랜 시간 내 발을 스스로 묶게 했죠. 그분께도요…. 돌아보면, 나야말로 근시안적으로 구는 바람에 민폐를 끼쳤어요.”

“……!!”

그제야 페이는 눈앞의 공녀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되었다.

지금 페이와 황태자 간의 관계가 완전히 오해받고 있다!

그녀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젓고 흔들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루키우스가 선물한 흑요석 반지는 보통 사랑의 증표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만약 그게 루비나 사파이어 정도만 되었더라도, 공녀가 반지를 보고서 멈칫하여 이런 말을 대뜸 꺼내지 못했을 텐데.

“아니에요!”

“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였어요. 만약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감정이 생긴다면, 그때 내 말을 떠올려도 괜찮아요. 모든 일에는 여지라는 게 있답니다?”

페이는 공녀의 너그럽다 못해 상냥한 말을 들으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대체 왜 이런 오해가 생긴 거람! 나한테는 내 남자가 있는…!

‘으으….’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내겐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함이 틀림없고, 우린 마음이 하나로 통했노라고.

그에게 물어도 내게 거울을 비추듯이 똑같은 대답을 할 거라고. 비록, 그와 나의 종족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말 못 하는 이유는 하나잖아.

기원의 숲에서 우린… 하아.

페이가 얼른 반박하지 못하자 랏셀 공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 이만 일어설게요. 황궁에서 나갈 시간이 되었는데 오래 끌면 의심하는 자가 나오니까요.”

“공녀님.”

“언젠간, 레이디 모르가나와도 편하게 얼굴을 마주할 나날이 생기겠죠? 난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그대와 나의 마음에 늘 훈풍이 부는 시절이 오기를요. 그때는 친구로 지내요?”

어마어마한 오해를 산 페이는 마탑으로 몰래 돌아와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시오넬 영지의 일을 해결하고 성녀의 황궁 입성을 준비하느라, 루키우스와 그… 그 방면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시간이야 솔직히 있긴 했으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 그는 내가 하는 고민이 뭔지 알고나 있을까?

루키우스!

루키우스, 루키우스…!!

“…….”

“피…유우….”

늦은 밤이라고 잘도 자는 모모의 코 고는 소리도 오늘따라 어찌나 얄미운지. 당장 일어나서 네 주인한테 나랑 앞으로 어쩔 거냐고 물어보라고 할 수도 없고!

“하아.”

그냥 내가 먼저 말할까?

내가 너 많이 좋아하고 이 마음이 오래도록 변치 않으면,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하고 싶다고. 내 생애에서 노을이 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자고.

페이는 과감한 유혹에 그날 밤 내내 시달렸다.

달콤한 한숨이 몇 번이나 얼굴 위의 공기를 뜨겁게 메웠는지 모른다.

* * *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어딘가의 무도회장.

높디높은 천장에 매달린 눈부신 샹들리에가 번쩍이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벽에선 금방이라도 천사가 튀어나올 듯이 으리으리했다.

그뿐인가? 

곳곳에 놓인 값비싼 대리석 조각상은 섬세하기 짝이 없다. 와인에 잔뜩 취한 자라면 얼핏 보고 연인으로 착각해 끌어안고 입맞춤을 시도할 만큼 멋졌다.

파티를 준비하는 이들의 면면도 훌륭하다.

핑거 푸드를 나르는 메이드의 옷깃에는 음식물이 튄 흔적이 전혀 없고, 하얀 옷은 빳빳하게 다려져 눈부셨다.

이 모든 결과물을 합쳐 무도회를 연 가문이 오를레앙 공작가란 걸 제외하고, 모든 게 완벽했다.

‘속죄의 자선 무도회라며? 어딜 봐도 황궁의 수준과 떨어지지 않는데, 진정 황실의 화를 돋우려고 작정했나?’

카피아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황궁에 들어온 이래, 성녀의 대접이라 하기엔 불합리한 일들이 많이 터졌다.

특히나 금광맥 건으로 불안했는데, 때마침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속죄의 자선 무도회를 연다는 게 아닌가.

무도회의 이름부터가 자신들의 죄과를 일부 인정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녀는 공식 초청장을 받았기에 망설이지 않고 참석했다.

이곳의 동향을 살피는 일에 더하여 기대되는 일도 있긴 하다.

과연 이 자리에는 그동안 꼭꼭 숨었던 클라인 공녀가 나올는지?

괘씸한 슬로트 경이 저에게 들어오는 소식을 재깍재깍 알려 주지 않는다고는 하나, 카피아도 드디어 알게 되었다.

가짜 공녀는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앓아누워 있다지? 아프기는 무슨!

‘네가 스스로 네 무덤을 파는구나. 제도에서 신성 마법을 나보다 더 잘 다루는 이는 없어, 주교와 성기사 단장 둘을 합쳐도 나만 못하단 말이다!’

네가 기어코 이 무도회에도 오지 않는다면 내가 특별히 선량함을 베풀어 직접 가도록 하지. 너의 그 꾀병을 낫게 해 주려고 친히 강림하마.

성녀는 생의 끝이 와서 눈을 감은 뒤에도 성녀다. 넌 천인공노할 가짜 공녀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짜에 대한 우월감을 잔뜩 품은 카피아의 입술이 실룩였다.

“…….”

무도회장의 2층.

1층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배리어 로프를 쳐 놓고 그랜드 피아노로 막아 뒀기에, 아래의 손님들은 위로 올라올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리고 오늘 자선 무도회의 주최자인 라파엘이 두 인영과 함께 있었다.

“정말 내려가지 않을 겁니까?”

라파엘은 꽤 섭섭한 눈치였다.

“미안해요, 라파엘. 제 입으로 근신하겠다고 해 둬서 내빈들께 얼굴을 보이긴 좀 민망하네요. 이제 황궁에 가면 먼저 아는 체하는 분들이 늘어서요.”

그는 투덜댔다.

“성녀 측에 초청장을 안 주려고 했는데, 총관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도 우는 소리를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음번에 뭔가를 열 때는 제발 주신전으로 간 상태라면 좋겠군요.”

라파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성녀를 대면하기 불편한 페이의 심중을 헤아려 주고 있었다.

“설령 성녀님이 안 오셨어도 제 얼굴은 못 보이죠. 어쨌든 저는 사고를 친 몸인데 무도회에 당당히 나다니면 되겠어요? 당분간은 사려야죠.”

라파엘의 눈이 아름답게 치장한 페이의 얼굴을 훑었다.

“모두가 페이 양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사소한 일들은 잊어버릴 겁니다. 반짝거리는 보석인 줄 알고 손을 뻗는 자도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녀는 칭찬하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쳐 몸서리쳤다.

“라파엘도 정말! 또 사탕발림이에요?”

“사탕발림이라뇨? 진심입니다. 왜, 전에 오를레앙 공작 부인 생각 없냐는 제안은 유효하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 나는 최소한 일 년간은 자유의 몸입니다. 그 뒤에는 보장 못 하니 결정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어휴!”

페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픽 웃고 말았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라파엘의 말도 꽤 일리가 있다.

공간 이동으로 몰래 날아온 페이는 예쁨을 넘어 특별한 매력을 뽐냈다.

화려한 연핑크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고정하고 하얀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었는데, 목으로 닿을락 말락 하는 귀밑 머리카락이 더욱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하염없이 쓸어 보고 싶던 루키우스는, 둘의 뒤편에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쓸모없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페이….’

원래 이 무도회에 둘은 같이 오기로 약속했었다. 라파엘이 속죄의 자선 무도회 운운했던 바로 그날에.

당시만 해도 루키우스는 그가 페이를 에스코트해도 괜찮을지 고민했으나, 거절할 이유란 추호도 없었다.

구태여 다 꾸며서 와 놓고는 1층으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다 이해 가능한 범주였다.

막상 대한 성녀가 생각보다 더 교활한 존재라, 오늘의 결정은 썩 나쁘다고 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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