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뇌조 사냥제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이 일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면 어떡하나? 휘안테 후작가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가문인데!
드라칸 비행 자체는 성녀의 뜻대로 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도권 바깥으로 날아갈 때 무심코 주신전이 있는 서편으로 날자고 한 건 내 선택이었으니…!
‘미치겠군.’
일의 처리가 어찌 되든 황실의 입장에서 두 가문의 처벌은 피할 수 없겠지. 그때 모든 원망이 내게로 날아오지는 않을까?
입지가 불안정한 카피아로선 가슴 철렁하는 며칠간이었다.
매일 드리아나 산맥 끄트머리에서 금광산이 발견되었다, 광산의 발파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역력하다, 근처에서 금을 은닉한 창고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려올 때마다 불안감으로 잠을 이루기조차 어려웠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성녀님, 내일 황실의 뇌조 사냥이 있는데 초청장이 왔습니다. 가시겠습니까?”
요 며칠 안색이 수척했던 카피아의 입술이 어렵사리 떨어졌다.
“나에게?”
“예. 황가에선 매년 첫 뇌조 사냥을 황실 전용 사냥터에서 거하는데, 전통적으로 제국의 두 공작가에서 번갈아 가며 보좌합니다. 올해는 오를레앙 공작가 차례입니다.”
그들은, 금을 몰래 캐다가 발각이 되어 곤란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카피아는 의문을 품었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올해 순번을 건너뛰기란 곤란하니 할 수 없이 허용했겠지. 으음…. 드라칸 비행의 일이 날 겨냥한 음모 같진 않지만, 지금보다 더 불리한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는데.’
성녀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뇌조 사냥에는 황족들만 참석하게 되는가?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보좌를 도맡는다면, 클라인 공작가 측에서도 올 만할 텐데.”
“사냥제는 원칙적으로는 황실의 직계를 필두로 열리며, 황실 방계 및 두 공작가 인원의 참석은 유동적입니다.”
“그래…?”
진짜 공녀를 보았으니, 가짜 공녀도 슬슬 마주할 때이지.
카피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되물었다.
“그, 황태자 전하의 부하라는 드라칸 라이더도 오게 되는가?”
진짜 공녀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식으로 묶어 놓을 절호의 기회가 왔었거늘, 그것도 안타까이 놓쳐 버렸다.
주신전에선 데면데면하던 슬로트 경이 신이 나서 금의 발견을 알리며 잘했다고 두둔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괘씸한 놈!
하지만 카피아에겐, 슬로트 경은 꿈도 꾸지 못할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
오를레앙 공작가의 후원으로 어찌어찌 유지하는 성기사단 내의 충성스러운 세력. 언젠가 그들을 이용해 비상할 때 저 성기사 단장은 반드시 갈아 치워 버릴 것이다.
화를 억누른 성녀는 우울한 기미라고는 전혀 없었던 공녀를 떠올렸다.
다른 장소에서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때 내가 놀라긴 했으나 괜찮다는 식으로 언질을 주면 마음에 빚을 지게 될 거 아닌가?
초청장을 가져온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이디 모르가나는 황족도, 두 공작가의 혈육도 아니기에 참석할 근거가 없습니다. 설령 빈객이라도 원칙상 안 될 일입니다. 성녀님, 참석의 의향이 있거든 오늘 저녁 안으로 아이리스 궁에 전갈을 넣어 주십시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권력욕으로 충만한 성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황제와 황태자를 다시 보는 기회도 중요하고, 오를레앙 공작가 사람들에게 해명할 자리도 만들 수 있으니.
한편, 클라인 공작저에선 생각지 못한 우환으로 어수선했다.
본채 안의 조용한 침실.
하얀 베개 위에 연갈색의 머리칼이 힘없이 늘어졌고, 기품과 위엄을 담은 푸른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공작 내외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막내딸이 며칠째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으으….”
“티아나, 좀 어떠니?”
공녀는 눈을 흐릿하게 뜬 채 끙끙댔다.
“머리… 머리가 어지러워요.”
클라인 공작 부인은 문 쪽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의사는 아직인가?”
“마님….”
“아휴! 다들 뭘 하는 거람? 빠르게 안 오면 너희가 가서 마차로 데려와야 할 게 아니냐?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티아나, 괜찮다. 억지로 일어서지 말고 누워 있으렴.”
“네, 네.”
도트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아픈 기색을 만들려고 사력을 다했다.
뇌조 사냥제에 가면 실라스 황태자를 알현할 순 있겠으나 가서 만에 하나라도 성녀를 만나면…. 얼굴을 보는 일 자체가 부담이다. 아까워도 이 욕심만은 부려선 안 돼!
주신전의 성녀가 황궁 안으로 들었다지.
친자 감별 과정에 있어서 영 켕기던 도트가 택한 최선책은 꾀병 발동이었다.
일부러 아프려고 속옷을 빼고 얇은 외투를 골라 입거나, 오밤중에 테라스 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았건만 열은 나지 않았다.
공작저의 주치의는 당연히 멀쩡하다는 진단을 내렸고, 공작 부인은 화를 내며 제도 내에 소문난 명의들을 죄 초빙하는 중이었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아프다고 끙끙대는 공녀를 보는 공작 부인의 속은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얄미운 꽃샘추위가 하필 우리 딸에게 닥치다니! 뇌조 사냥제는 다른 귀부인들 간섭 없이 황태자 전하와 마주할 절호의 기회거늘 아깝구나.’
벌써 몇 명의 의사에게 보였는데도 아픈 원인을 못 잡으니 그녀로선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를 너무 사모한 나머지 병이 난 게 아닐까? 오늘 아픈 기색을 참고 억지로 가게 한들 괜찮아지려나. 정말 속상하기 짝이 없어. 그분과 약혼만 확정지어도 싹 나을 병인데!’
이런 사정이 있어, 올해 뇌조 사냥제에 참가하는 클라인 공작가의 일원은 카셀 대공자 혼자였다.
전후 사정을 모르고 뇌조 사냥에 나온 카피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속으로 당황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적지?’
황제를 필두로 한 황족 및 호위 인원은 약 서른 명.
수가 많진 않으나, 호위대는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실력으로 구성되어 제법 규모가 있다.
그러나 망토로 소속을 통일한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숫자는 적음을 넘어 초라함에 가까웠다.
그중 얼굴은 낯설되 파란 장미 문양을 갑옷에 새긴 흑발의 청년. 클라인 공작가 측의 카셀 대공자가 틀림없다.
다만 그를 따르는 이가, 종자 둘과 같은 갑옷을 입은 기사 셋뿐이란 게 문제였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동생은 왔느냐고 살갑게 물어보아야 하나?’
카피아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찰나였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라파엘 경.”
‘아!’
카피아가 기다리던 오를레앙 공작가의 사람들이 왔나 보다.
성녀는 재빠르게 그쪽을 보았으나, 여긴 더 심각했다. 라파엘 오를레앙과 기사 두 명을 제외하고는 뒤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뭘 하자는 거지? 보좌역이라며 클라인 공작가 측보다 더 적으면 어쩌려고?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슬로트 경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성녀님. 최근에 일이 있어 오를레앙 공작가에선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단체로 자숙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고심 끝에 라파엘 공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오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건가!
낭패라고 생각한 카피아는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젊디젊은 라파엘이, 제 어머니인 오를레앙 공작 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 리가 없다. 젊은 혈기가 있을 터이니 그런 쪽으로는 말도 통하지 않을 거고.
한마디로 오나 마나 한 존재란 뜻이었다.
이 와중에 가짜 공녀는 왜 얼굴도 안 보이는…!
“공녀님이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모셔라.”
실라스는 전령의 보고를 듣자 위엄 있게 일렀다.
뭐? 왔다고?
카피아는 성녀의 체면도 잊고는 뒤편을 홱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너무 낯선 외양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밀실에서 보았던 가짜 공녀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잖아? 지금 다 같이 짜고 날 목표물로 삼아 놀리는 건가?
카피아의 답답함은 얼마 안 가 풀렸다.
금발에 진한 녹안을 가진 마뉴엘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와 인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마뉴엘라 드 랏셀, 초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왔습니다. 늘 강녕하십시오.”
“공녀여, 선두에선 화살이 날아다녀 위험하니 후미든 초입이든 있을 곳을 편하게 고르시오.”
“네.”
타국 출신의 공녀는 자신이 파혼서를 건넸던 황태자와, 그 아비인 황제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 후 뒤쪽으로 빠졌다.
이 꼴을 보는 카피아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게 뭐람! 하, 내 목표물인 두 공녀는 오지도 않고 엉뚱한 공녀만 오다니.’
성녀의 불붙는 속내와는 달리, 뇌조 사냥은 늦은 오후까지 순조롭게 이어졌다. 속이 상한 카피아는 물을 몇 잔이나 청해 마셨는지 모른다.
저녁 무렵.
그날 가장 맛이 좋으리라 점쳐진 뇌조 구이는 당연히 황제를 위해 바쳐졌다. 두 번째로 잘 구워진 뇌조는 카피아의 접시에 올려졌는데, 성녀는 속으로 몇 번이나 고민했다.
이 접시를 황태자에게 밀어 겸양을 보이는 게 좋을지? 아니면, 다른 말로 사람들의 경탄을 사 볼까.
결정은 곧 내려졌다.
카피아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먹음직스러운 뇌조를 향해 눈짓했다.
“뇌조처럼 귀한 요리를 보게 되다니 탄성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이 음식을 빈민들과 나눠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합니다.”
다 만든 요리를 뒤늦게 멀리 가져가 봐야 식고 굳을 게 뻔한데.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지극히 성녀다운 말에, 몇 명의 귀족이 웃었고 누군가는 답을 했다.
“자애와 헌신으로 생을 잇는 성녀님의 담화에 감격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또한 조용히 지내며 그간 아낀 봉록의 일부를 내놓겠습니다. 부디 신음하는 빈민을 위해 함께 써 주십시오.”
마뉴엘라의 말이었다.
다 완성된 요리를 빈민과 나누겠다고 말을 하였을 때와는 달리, 반응이 좀 더 좋았다.
“오오!”
“랏셀 공녀님답습니다.”
“과연 현숙한 분이시군.”
할 말을 마친 마뉴엘라는 살포시 눈꺼풀을 내리깔았고,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 형국이 된 카피아는 답답해서 가슴을 탕탕 치고 싶을 따름이었다.
당했다!
‘일부러 탁발을 길게 하면서 황궁행을 늦춘 이유를 저 공녀가 다 말아먹고 있지 않은가! 성녀는 난데 왜 저것이 나서서 관심을 훔쳐 가는 거지?!’
카피아는 결국,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자신의 뜻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다.
매년 봄 사냥의 해금을 알리는 황궁의 뇌조 사냥제는 이로써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벌써 달이 떠오른 늦은 시각.
봄이래도 아침저녁으론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큰 숄을 두른 랏셀 공녀는 귀가 전 누군가를 긴히 찾았다.
대상은 황태자 실라스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당분간 마탑에 근신한다고 알려졌으나, 어쩐 일인지 황궁의 모처에 있던 마법사 페이.
마뉴엘라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모르가나. 무도회에서 스치듯 보았을 때는 정식으로 인사할 겨를이 없었군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마탑의 마법사 페이입니다.”
마뉴엘라는 상대방을 보고는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환히 웃었다.
“어머, 그것 말고도 훌륭한 수식어가 많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요. 천재 물 마법사라는 건 왜 빼나요?”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긴요! 당신의 말이 나오면 흥미로워 눈을 빛내는 이들이 많답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이고요.”
실제로 대한 마뉴엘라는 생각보다 훨씬 밝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