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야밤의 작전 개시
서신과 함께 온 불청객 한 명의 투덜거림도 함께.
“…너무합니다, 페이 양. 어떻게 나를 빼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
페이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 도저히 올 수 없는, 일의 전모를 알면 안 되는 인물 라파엘 오를레앙이 오다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근엄하게 외쳤다.
“나 라파엘 오를레앙은 아칸 제국 황실을 수호하는 크로우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기사의 맹세를 생의 끝까지 지키고 신조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가 모를 리 없다.
이 일을 저지르고 나서, 설령 사금의 일이 조작이라고 폭로한다 한들 오를레앙 가문이 잃을 신뢰는 영구히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황태자 실라스에게 진실을 듣고 기꺼이 온 것이다.
자기 가문을 파멸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라파엘 경….”
“서운합니다.”
“같이 가도 마음이 괜찮을까요?”
아스테인의 눈도 약간 시무룩했으나, 라파엘의 푸른 눈빛은 평소와는 달리 긍지가 철철 넘쳐흘렀다.
“벌을 받을 일을 했다면 마땅히 지고 가는 게 도리입니다. 기사의 도리도, 공신 가문의 귀족으로서도 당연히 행해야겠지요.”
“…….”
좀 멋지다.
페이는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클라인 공작저가 싫고 끔찍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젠 많이 무심해졌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들이 폭삭 망해도 단순한 조소만 날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카셀은….
그녀의 마음속에 유일한 가족으로 남은 그의 불행이 담보된 복수라면, 조금 망설일지도 몰라.
그리고 눈앞의 라파엘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려고 기꺼이 오지 않았는가.
기사란, 역시 어렵구나.
라파엘은 눈앞의 페이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나직이 말했다.
“페이 양, 금광맥의 발견을 보고하지 않고 숨겼다고 해서 오를레앙 공작가가 멸문에 이르는 화를 입지는 않습니다.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만 그건 업보니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것은, 알아요.”
누군가에겐 때로 경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은 입가에 부드럽고 안온한 미소가 지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모님 두 분이 더는 제도의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만들 겁니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오히려 내가 나서도 되는 명분까지 얻게 되니까 반대는 불가합니다. 그럼, 가실까요? 음…? 모모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다.”
구석의 나무에 삐딱하게 기댄 채 라파엘의 구구절절한 말을 듣던 루키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라파엘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우리가 탔던 드라칸의 실제 존재가 당신이었단 말입니까?”
루키우스가 눈을 부라렸다.
“웬 헛소리야? 도착할 좌표는 잡아 놨고, 거기에 마법사의 눈도 풀어놨는데 근처에 경계하는 사람 하나 없다.”
“예?”
급하게 오느라 공간 이동의 말은 미처 못 들은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테인은 가져온 가죽 모자를 머리카락이 안 보이게 꼼꼼히 쓰고는 루키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합니다, 마법사님.”
“흠.”
“…루키우스! 그러지 말고 설명 좀 해 줘요.”
“일단 너부터 이리 와 봐.”
준비성이 철저한 아스테인은 흡족한 눈으로, 라파엘은 벌레 보듯 하던 루키우스의 눈빛이 페이에 이르자 다정하게 풀렸다.
그는 페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지 않게 후드를 씌우고 긴 스카프를 둘러매 주었다.
손수 챙겨 주는 내내, 그의 검고 그윽한 눈빛 안에서 끈적한 허니 시럽이 끝도 없이 쏟아질 것 같은 달콤하고 몽롱한 기분.
아, 안 돼. 이런 눈빛으로 보면 눈치 빠른 둘 다 금세 알아 버릴 거잖아!
‘루, 루키우스도 정말!’
페이는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솔직히 좋았다.
그야 뭐…. 먼저 껴안은 건 그녀라지만 기원의 숲을 나오면서 우린 손도 잡고, 또 껴안았고, 그도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으음…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끝?
‘어라?’
그래서, 우리는 무슨 사이인 거지?
새삼 그와의 관계성에 의문이 생기자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흑요석 반지가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당시 루키우스는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느라 너무 긴장해서, 페이 네게 미안하고 잘못했으며 네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처절한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어. 이후로 전보다 다정하게 굴긴 했는데 중요한 뭔가가 빠졌….
그는 날 위해 귀하디귀한 엘릭서를 주고, 꽃다발 선물도 했고, 환상의 유니콘과도 연결해 주었어. 근데… 그것, 전부 그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기 이전이었잖아.
그 뒤에는….
없네?
‘어? 진짜로 없다고?’
페이는 진실을 깨닫고 멍해졌다.
“라파엘 경, 우리는 공간 이동을 통해서 금광맥이 있는 강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내일이 성녀님이 황궁에 오시는 날이라 드라칸을 타고 날아가 제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어요.”
“아, 그렇군요. 하긴 드라칸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쪽에서도 관찰 가능하니 들킬 확률이… 알겠습니다.”
그사이 아스테인과 라파엘이 나누는 대화가 귀로 버젓이 들어왔다.
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네.
살짝 당황한 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가 얼추 된 것 같은데 슬슬 출발할까요?”
“…그래.”
상황을 좀 파악한 라파엘은 냉큼 일어서면서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카셀 경과 동행하지 않는군요. 하긴 성녀님이 황궁으로 오신다니 경계와 기사들 재배치를 위해 못 움직이는 게 당연하지요.”
“카셀 경은 바쁠 겁니다.”
“지금쯤 눈이 완전히 충혈되어서 일에 매몰되었겠군요? 하핫, 그럼 어서 가 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흥.”
루키우스가 발끝을 들어 바닥을 대충 치자, 정교한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페이는 출발 직전 라파엘에게 마지막으로 다짐을 받았다.
“라파엘 경, 정말 후회 안 하겠어요? 크로우 기사단의 일원으로 간다고 해도, 결론적으로는 당신을 낳고 길러 준 가문의 일이에요.”
라파엘은 손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은밀하게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네?”
“이번 일 등등으로 인해 명예가 깎여 만약 아버지께서 일선에서 물러나면.”
“…물러나면?”
“……?”
그새 공간 이동 마법진을 완성하고 마법 발동을 기다리고 있던 루키우스가 이상한 대화에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공작이 되는 겁니다.”
라파엘은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그는 싸한 분위기를 모르는 척 한술 더 떴다.
“페이 양, 한번 사는 인생 시원하게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되어 볼 생각 없습니까?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가문에는 금화와 영예가 넘칠 것이고 남편인 나는 사랑이 넘쳐흐르는 남잡니다.”
“푸흐흐…!”
페이는 참으려고 했는데, 솔직히 너무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작은 웃음을 터트리자 이게 농담임을 어렵게 안 아스테인이 한숨을 쉬었다.
“라파엘 경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농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농담이라니, 난 여성 앞에선 언제나 진심입니다!”
“그럼 남자에겐 늘 사기를 친단 소린가?”
루키우스의 지적에 라파엘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자리에 카셀 경이 없는데 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지?”
“이제 진짜로 가요, 네? 날이 새기 전에 서둘러 처리해야 해요.”
페이의 재촉에 세 남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은연중에 그들은 페이가 원하는 대로 다들 이끌려 가고 있었다. 그걸 또 당연하게 여겼고.
루키우스의 마법진 안에 네 명의 남녀가 차례로 섰고, 마법은 여지없이 발동되었다.
그 시각, 성녀의 도착이 임박하여 서류 처리에 골몰하던 카셀의 눈은 퍽 충혈되어 있었다. 적안 옆의 흰자에 실핏줄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그가 머릿속에 담아 둔 생각은 하나였다. 하나여야만 했다.
일… 일… 일….
일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었다. 해야지, 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해…!
뚜둑.
기어이, 튼튼한 펜대를 부러뜨린 카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티아나를, 페이를 떠올려선 안 된다. 잘하리라 믿고 내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벌써 보고 싶다.
‘후-우.’
그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쉴 무렵, 공간 이동은 무사히 성공했다. 드리아나 산맥의 작은 줄기 안으로 온 그들은 서로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주변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오밤중이라 채굴 작업은 중단했을 겁니다.”
“이쪽…인가?”
“이리로, 자.”
루키우스는 페이의 손만 잡고 걸음을 옮겼다.
제도는 어두운 밤이 되어도 불을 밝히는 건물과 순찰을 도는 이가 있어, 완전히 깜깜해지진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칠흑 같은 어둠과 머리 위의 별빛을 제외하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반딧불이나 어느 집 창문에 놔둔 랜턴의 빛 따위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빛을 비추는 마법을 쓰고 싶어도 누군가가 멀리서 보고 발견하면 곤란하니까.
페이의 발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가 있어, 두려워하지 마.”
루키우스는 그의 뒤에 바짝 붙은 페이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말했다.
“…으, 으응. 네.”
그에게 뭔가를 추궁하고 싶은 속내는 엄청난데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장소도 때도 다 안 맞아.
“저쪽에 물소리가 들려요. 따라가면 될 것 같은데요?”
눈에 보이는 게 없어도 호기심은 충만한 아스테인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둠에 눈이 조금 익어, 서로의 인영은 조금씩 보였다.
“가시지요.”
“넌 뒤에 와라, 미끄러지면 다 같이 곤란해지니까.”
기사라고 선두에 서려던 라파엘을 막은 루키우스는, 그가 앞장을 섰다.
강 근처여도 풀이 생각보다 많진 않았고, 흔적을 덜 남기는 게 좋기에 그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었다.
도착 후 어느 정도 밤눈이 생겨 시야도 밝아졌고, 긴장이 풀린 라파엘이 낮게 말했다.
“흠, 여기를 이렇게 와 볼 줄은 몰랐습니다.”
“영지 곳곳을 다 아는 거예요? 대단하네요.”
페이가 감탄하자 라파엘은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냥 이런 곳도 있었구나 싶었을 따름입니다.”
하긴, 영지 경계를 지키는 민감한 구역에 가문에 달랑 한 명인 후계자를 보낸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카셀… 오라버니는 정말로 특별한 경우지만.
“그, 그래요.”
“다 왔다. 저기가 광맥의 아래로 이어지는 강줄기야.”
졸졸, 소리를 내던 강물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소리가 꽤 커진 상태였다.
페이는 은근히 걱정했다.
“여기에 사금을 뿌려 둬도 내일이 오기 전에 다 쓸려 내려가는 것 아닐까요?”
“물의 힘이 무섭다지만 그렇게까진 아닐걸. 그리고 이곳저곳에 흩어 두는 편이 눈에 띄기 좋을 거야.”
“그렇군요….”
“시작하죠.”
페이는 미리 준비한 주머니를 꺼내 아스테인과 루키우스에게 나눠 주었다. 끈을 젖히자 반짝이는 빛이 어둠 속에서도 은근하게 비쳐 왔다.
그런데, 라파엘은 내민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역시…. 엄호를 위해 와 주긴 했어도, 가문을 몰락하게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란 어렵겠…?
“그게… 뭐죠?”
라파엘은 자기 가방에서 뭔가 묵직한 것을 꺼내고 있었다!
“괴금입니다.”
“괴…금? 사금보다 더 큰 그거요?”
“네. 이왕이면 더 잘 발견되라고요.”
자갈 밑과 바위틈에 사금을 잘 숨겨 놓던 루키우스가 한소리 했다.
“모모가 진짜로 욕심 부려서 먹을 수도 있어. 걔는 금을 소화하는 녀석이니까 그냥 넣어 둬라. 돈만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