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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몰랐던 또 하나의 이름 (70/148)

70화 몰랐던 또 하나의 이름

봄이 다 가기도 전에 진 꽃이 그들의 머리 위에 같은 낙화를 뿌렸다.

루키우스는 그것을 굳이 털어 내지 않았다. 모모가 보면 다짜고짜 비웃을 걸 아나 오늘만은 괜찮았다.

“루키우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그는 그녀가 무엇을 물어보든 전부 대답해 줄 작정이었다.

“제 다른 이름이요. 모건 르 페이랑 모르가나 말고 원래 운명대로 갔다면 지어졌을 이름이 뭐였어요?”

루키우스의 입안에는 사탕도 없는데, 갑자기 혀가 꼬였다.

“그… 그런 건 몰라도 되지 않겠어?”

암울한 과거보다 더 슬프고 잔혹한 과거. 벌어지진 않았지만, 그들이 엮이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일의 잔재.

최대한 축약해서 말했는데 하필 그런 걸 물어보다니!

“알려 줘요.”

“페이!”

“그냥 살짝 알려 주면 되잖아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진다고, 루키우스의 입술이 지조 없이 냉큼 열렸다.

“제나…였어.”

페이가 가벼운 말을 공중으로 흩날렸다.

“후후…. 티아나에 모르가나, 제나…. 제 이름은 어쩐지 나자 돌림에서 벗어나질 못하네요? 이것도 운명인가?”

“…….”

무슨 답을 할 수 있겠나. 루키우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날아온 말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역시 페이란 이름이 제일 나아요. 바로아 님이 손수 지어 준 그거요.”

“그, 그래…?”

“그럼요. 저하고 잘 어울리지 않아요? 루키우스 생각은 어때요?”

루키우스는 한 손엔 페이의 손, 나머지 손엔 약초 바구니를 들고 있어서 뒤통수를 긁을 새도 없었다.

멋쩍어도 별수 없지.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무거운 이야기를 끝냈는데도, 페이는 루키우스를 거리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거리를 두거나 하지도 않고 우리는 소… 손을 잡고 있지.

루키우스는 이미 달아오른 얼굴 옆의, 귀 두 개가 발갛게 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휘파람이라도 좀 불까. 그건 좀 경박한가…?

그가 오만 생각으로 들떠 있는 동안, 마탑의 자기 자리에서 푹 자고 있던 모모는 퍼뜩 선잠을 깼다.

왠지 역겹다.

“꾸에에, 끄으윽…!”

트림했는데도 구역질이 연신 나고 신물이 올라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꾸우?”

날개로 빈 배를 탁탁 두들긴 모모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끝내고는 인상을 쓰며 도로 잠들었다. 마탑 근처에서 누군가가 그의 심기에 거슬릴 일을 저지르나… 싶은 모모였다.

괘씸한 인간 놈들이 어디서 무슨 짓이라도 벌였나?

* * *

황태자에게 어려운 보고를 끝마친 카셀은 요즘 자잘한 임무도 거의 끝이 나서, 비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흠, 지금쯤 서신을 보내 만나자고 할까? 페이 양…. 그래, 티아나라고 불러 버릇하면 남들 앞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앞으로는 더 철저하게 굴어야겠어.’

그들은 남의 눈을 조심하기 위해, 미쥬앙 호텔의 그 자리 이외 다른 곳에서는 원래대로 부르고 존칭도 유지하기로 했다. 단둘일 때라도 어김없이.

그러니까 또 미쥬앙 호텔에서 만나자고 할까.

카셀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지어지기 직전이었다.

“카셀, 있니?”

“어머니.”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이곳은 집무실도, 기사단 내부도 아닌 황궁 모처.

갑자기 들이닥친 공작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근처의 응접실을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 부인은 퍽 억눌린 어조로 물었다.

“왜 요즘 저택에 오지도 않니.”

“…….”

단순히 보기 싫어서가 아니다.

도트리샤를, 도로테아를, 감히 티아나의 자리를 빼앗고 자기가 진짜 공녀인 양 행세하는 ‘그것’을 마주하면 괜찮을 리가 없다.

뻔뻔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목을 벨 가능성이 있기에 일부러 피하는 중인데.

카셀이 고개를 돌려 외면하자 공작 부인이 하소연했다.

“정말 너무하는구나. 우리 티아나가 네 눈에 좀 부족하다고 해도 엄연한 동생이고 클라인 공작가의 공녀야. 사교계의 다른 인사들은 티아나를 칭찬하기 바쁜데 너는 혈육이 되어서 얼굴을 보기조차 싫어하다니 이게 말이 되니?”

그에게 어떠한 제한이 없으면 당장에 진실을 폭로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페이와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지. 대신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어머니, 저는 가엾은 티아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차후에 생각해 보아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든 하지 마십시오. 상대가 누구든 말입니다.”

“뭐? 넌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는 거니? 전에도 비슷한 말을 하더니 또!”

“다 알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클라인 공작 부인은 자못 놀랐다.

그녀의 앞에서 단 한 번도 고압적으로 군 적이 없는 카셀의 적안이 무섭도록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대체 왜? 티아나에 대해 좀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네가 처음에, 우리 티아나와 관계가 삐끗했다고 해서 계속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잖니?”

모리스하고 틀어진 관계는 어떻게 못 하더라도, 카셀과는 원만하게 지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티아나는 부모가 아무리 싸고돈다 한들, 결국엔 반쪽짜리 공녀로 남고 말 게 아닌가.

“너는 클라인 대공자야, 마땅히 그 아이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지. 나나 그이가 해 줄 수 있는 것과 너의 영역은 또 다르잖니? 멀리 갈 것도 없이 황태자 전하와의 사이도 그렇고….”

카셀은 어머니의 말끝을 재빠르게 잘라 냈다.

“아이라기엔 이미 데뷔탕트를 치렀습니다.”

그러면서도 카셀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게 티아나는, 페이는 영원히 애틋한 아이로 남겠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 짝이 없군.’

클라인 공작 부인은 또다시 은은하게 차오르는 노기를 억지로 누르면서 말했다.

“정말 너무하는구나. 되었다, 내 앞으로 티아나의 일을 가지고 너에게 부탁하는 일은 없을 거고 차후로 다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렴! 네가 미온적으로 군대도 나는 보란 듯이 우리 티아나를 제국 최고의 신붓감으로 만들 거다.”

기어이 황태자 전하의 곁에 붙이려고 그러시나?

나는 그 일만은 절대적으로 막으려고 할 건데.

카셀은 설탕을 넣지 않은 차보다 더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홱 가 버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공작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두 분이 같이 오신 눈치였다.

“네가 널리 이해해라.”

“…….”

역시,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다 들으신 거로군.

공작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네가 제도에 없던 시간 동안, 모리스도 그렇고 부인의 마음이 많이 허했다. 다들 죽었다고 생각한 딸의 흔적이 잡힌 순간부터 평정심을 되찾기 어려워졌겠지.”

“네.”

“모리스는 요즘 잘 있는 게냐?”

사실, 카셀도 잘 몰랐다.

로지아 국경지대에 있을 때보다 요즘은 부쩍 더 모리스의 생각이 났다.

라파엘을 통해서 알음알음 들을 뿐, 괜히 보러 갔다가 동생의 결심을 무너뜨리게 할 것 같아서 망설였던 것도 수차례다.

공작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허허, 황궁에 올 때마다 늘 보고 싶지만. 괜히 얼굴을 보러 갔다가 녀석의 결심을 흔들게 할까 두렵구나. 기사 서임이 정해지는 날 얼굴을 마주하면 나더러 무정하다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른 기사의 말을 들어 보면 적응은 잘하고 있다고 합니다.”

“믿어야지, 내 아들이니. 그럼 나도 이만 가 보겠다. 티아나는 잘 있으니 공연히 마음 다치지 말고 나중에 선물이나 보내 주련, 좋아할 거다.”

“살펴 가십시오.”

끝내 가짜 공녀를 위해 무엇도 하겠단 약속을 하지 않은 카셀은, 부모님이 가신 후 깊은 고뇌에 빠졌다.

부모가 되기란 어렵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위해 어떻게든, 뭐든 하려는 게 또한 부모겠지.

도트리샤, 카피아. 너희 둘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번 다짐을 한 그는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페이에게 만나자는 서신을 보냈다.

이번엔 그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티아나야.’

아칸 제국은 지독하리만큼 넓다.

드라칸을 타고 제국 최남단의 시오넬 영지로 갔을 때도 느꼈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어도 거의 하루를 꼬박 써야 도달하는 곳이 그들이 사는 나라였다.

그만큼, 티아나를 데리고 가 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제도가 넓고 유행도, 생활환경도 최고급이라고는 하나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하다못해 그 험난한 로지아 국경지대에도 볼 만한 명소는 얼마든지 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기사단장직을 내려놓고 가고 싶다는 곳은 어디든 다 여행하자고 해야겠어.’

티아나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는 놈들도 일단 차단할 겸.

그의 마음이 막 희망으로 부풀어 오를 무렵.

탁- 

멀찍이서, 열었던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점차, 빠르게 달려오는 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절로 마음이 즐거워진 카셀은 몸을 홱 돌렸다.

타다닷-

미쥬앙 호텔 최상층의, 많고 많은 방을 헤매지도 않고 곧바로 그에게 달려온 그녀가 품에 와락 안겼다.

“오라버니!”

여전히 남의 눈과 귀를 조심하느라, 억눌린 음성.

그러나, 그의 귀에는 확실히 닿았다.

카셀은 그를 낳은 공작 내외가 보아도 입을 쩍 벌릴 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어서 오렴, 나의 티아나야.”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가 겪었던 고통과 번뇌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온갖 일을 다 겪어도 페이를, 티아나를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버릇처럼 다과를 먼저 내오게 해서 실컷 먹인 다음에야 용건을 꺼냈다.

“너도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카피아 성녀가 황궁에 오겠다고 서신을 보내 놓고, 마차를 타고 곧바로 오는 대신 주변을 돌고 돌며 탁발을 하는 중이다. 제도 코앞까지 온 모양인데 안으로 아직 들어오지도 않았단다.”

“들었어요. 그레이스 수도원에도 들러서 하루를 묵고 갔다고 하더군요.”

페이는 생크림을 곁들인 딸기를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성녀가 수도원에 들렀다 갔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서신도 그만두고 직접 다녀온 길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베릴 수녀원장님과 셰릴 사제님, 그 외에 수도원의 동기와 동생들은 기뻐하며 성녀님을 맞이했다고 했지.

성녀는 그날 밤 두 분을 모셔 놓고 온화한 척, 기뻐하는 척 공녀가 된 도트의 일과 황태자의 수족이 된 페이의 일을 상세히 물었다고 했다.

‘그전에 도트의 일로 언질을 준 바가 있어서 실크 로브와 루비 펜던트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지? 카피아도 공녀를 이용할 생각이 충분하기에 먼저 묻지도 않았고.’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수녀원장님이 페이의 칭찬을 늘어놓으며, 실크 로브와 루비 펜던트 같은 귀물을 가지고 맡겨진 아이이니 혹시 페이도 어딘가의 좋은 가문의 자제가 아니겠냐고 말을 꺼냈다면.

‘수도원에 흉수를 드러냈을 거야. 카리스 자작가를 처리했을 때처럼 또 우연을 가장한 불을 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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